시/훌륭한 시인의 훌륭한 시들 14

김지하 시인의 산정리 일기, 비녀산, 빈산, 성자동 언덕의 눈

-산정리 일기/김지하- 나를 여기에 묶는 것은 무엇이냐 뜨거운 햇발 아래 하얗게 빛날 뿐 고여 흐르지 않는 둠벙 속에 깊이 숨어 끝끝내 나를 여기에 묶는 것은 무엇이냐 눈부신 붉은 산비탈 간간이 흔들리는 흰 들꽃들조차 가까이 터지는 남포 소리조차 아득히 멀고 흙에 갇힌 고된 노동도 죽음마저도 나를 일깨우지 않는다 흐린 불빛이 가슴을 누르는 소주에 취한 밤 목쉬인 노래와 칼부림으로 지새우는 모든 밤 뜬눈으로 지세우는 알 수 없는 몸부림에 기어이 나를 묶는 것은 아아 무엇이냐 개어 있지도 잠들지도 않는 끝없는 소리 없는 이 어설픔은 무엇이냐 밤마다 취해서 울던 붉은 눈의 해주 영감은 죽어버렸다 열여섯 살짜리 깨곰보도 취한 채 잠을 이루지 못한다 어디에 와 있는 것이냐 나는 살아 있는 것이냐 무딘 느낌과 예리..

[2017 제5회 제주 4.3평화문학상 시 당선작]박용우검정 고무신ㅡ박용우

[2017 제5회 제주 4.3평화문학상 시 당선작]박용우 검정 고무신 ㅡ박용우 어린 동생이 끌려가던, 길이었다 따라오지 말라고 눈물로 던진, 길이었다 여기다, 여기다 하며 두려움이 떨어뜨린, 길이었다 누이가 주워 가슴에 품고 가는, 길이었다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칠석날, 까마귀도 종소리에 숨죽인, 길이었다 섯알오름에서 노을이 핏물처럼 흘러내리는, 길이었다 땅 밑에서 고구마가 굵어지고 땅 위에서 고구마 꽃이 자주 빛 울음을 터뜨리는, 길이었다 누이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손으로 막고 초경을 앓던, 길이었다 동생에서 누이에게로 흘러내린 붉은 핏줄기가 상모리(上慕里) 불타는 골목마다 비린내를 몰고 가는, 길이었다 저작자 표시컨텐츠변경비영리 댓글0추천해요0 스크랩0 댓글

북촌리의 봄 박은영

북촌리의 봄 박은영 한 여인의 젖을 아이가 빨고 있었다 말 못하는 어린 것의 울음이 서모*에서 부는 바람소리 같았다 핏덩이를 등에 업은 어미의 자장가가 들리는 듯한데 젖몸살을 앓던 아침, 붉은 비린내가 퉁퉁 불어 마을을 떠돌아다녔다 새들이 총소리 를 물고 둥지로 날아갔다 소란스런 포란의 방향, 꽃을 내준 가지가 동쪽으로 기울었 다 그것은 서쪽에서 해가 뜰 일 서모에서 부는 바람소리가 말 못하는 어린 것의 울음 같았다 뚝뚝, 지는 목숨들 사이 아이는 나오지 않는 젖을 한사코 빨아대고 있었다 어미를 살려내려는 필사적인 몸부림, 그 힘으로 동백꽃이 피고 젖 먹던 힘을 다해 봄이 오고 있었다 * 서우봉 [출처] 제2회 제주4.3평화문학상 시 부문 대상-북촌리의 봄/박은영|작성자 목화

곤을동-현택훈

- 현택훈 예부터 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 살았지 늘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서 곤을동 안드렁물 용천수는 말없이 흐르는데 사람들은 모두 별도천 따라 흘러가 버렸네 별도봉 아래 산과 바다가 만나 모여 살던 사람들 원담에 붉은 핏물 그득한 그날 이후 이제 슬픈 옛날이 되었네 말방이집 있던 자리에는 말발자국 보일 것도 같은데 억새밭 흔드는 바람소리만 세월 속을 흘러 들려오네 귀 기울이면 들릴 것만 같은 소리 원담 너머 테우에서 멜 후리는 소리 어허어야 뒤야로다 풀숲을 헤치면서 아이들 뛰어나올 것만 같은데 산 속에 숨었다가 돌아오지 못하는지 허물어진 돌담을 다시 쌓으면 돌아올까 송악은 여전히 푸르게 당집이 있던 곳으로 손을 뻗는데 목마른 계절은 바뀔 줄 모르고 이제 그 물마저 마르려고 하네 저녁밥 안칠 한 바..

벌레- 조영옥

벌레 까맣고 긴 벌레 한 마리 방바닥에 죽은 듯이 있다 기척을 내니 벽을 타고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인다 겨우 종이에 올려 죽이지 않고 바깥에 내 보내니 마음이 편하다 돌아와 앉으니 구석에 또 한 마리 물끄러미 보다가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그냥 같이 지내자 고개 돌리니 더 마음이 편하다 하찮게 생각할 수 있는 벌레의 생명도 중하게 여기는 시인의 마음이 내 마음에 와 닿는다. 생명평화결사 운영위원장을 역임하신 분의 따뜻한 마음이 내 마음으로 전깃줄을 타고 오는 전류처럼 찌르르 들어온다. 적어보기로 했다. 적어가는 순간 어? 혹시 두 벌레가 부부 아닐까? 그러면 이산 가족 만들어버린거네. 나는 마음이 불편해지네. 생명을 노래하는 단아한 시가 좋다. 생명평화등불지 2021년 2호에 실린 시이다. 귓등 거울을..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교통 트레일러 달린 장거리 화물 자동차가 안개 속을 기어간다 호수 바닥 진흙탕 속을 기어가는 잠자리 애벌레의 거대한 실루엣.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헤드라이트들이 만난다. 서로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 불빛의 홍수가 솔잎 사이로 돌진한다. 우리들, 어둠의 차량들은 황혼 속 사방에서 달려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둔탁한 굉음 속을 미끄러져 간다 탁 트인 평원에 공장들이 둥지 틀고 있다 해마다 공장 건물들이 2밀리미터씩 가라앉는다 땅이 천천히 집어삼키고 있다 알 수 없는 짐승들이 이곳에 세워진 가장 화사한 꿈의 산물 위에 발자국을 남긴다 씨앗들이 아스팔트에서 살려고 힘겨워한다 다음엔 밤나무가 먼저 나타나고, 하얀 꽃송이 대신 강철 장갑 꽃피울 준비를 하는 듯 우울한..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서곡 깨어남은 꿈으로부터의 낙하산 강하. 숨막히는 소요돌이에서 자유를 얻은 여행자는 아침의 녹색 지도 쪽으로 하강한다. 사물들이 확 불붙는다. 퍼덕이는 종달새의 시점에서 여행자는 나무들의 거대한 뿌리 체계를, 지하의 샹들리에 가지들을 본다. 그러나 땅 위엔 녹음, 열대성 홍수를 이룬 초목들이 팔을 치켜들고 보이지 않는 펌프의 박자에 귀 기울인다. 여행자는 여름 쪽으로 하강하고, 여름의 눈부신 분화구 속으로 낙하하고, 태양의 터빈 아래 떨고 있는 습기 찬 녹색 시대들의 수갱 속으로 낙하한다. 시간의 눈 깜박임을 관통하는 수직 낙하 여행이 이제 멈추고, 날개가 펼쳐져 밀려드는 파도 위 물수리의 미끄러짐이 된다. 청동기 시대 트럼펫의 무법이 선율이 바닥 없는 심연 위에 부동으로 걸려 있다..

이성복 시인의 그렇게 소중했던가

버스가 지리산 휴게소에서 십 분 간 쉴때, 흘러간 뽕짝 들으며 가판대 도색잡지나 뒤적이다가, 자판기 커피 뽑아 한 모금 마시는데 버스가 떠나고 있었다. 종이컵 커피가 출렁거려 불에 데인 듯 뜨거워도, 한사코 버스를 세워야 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가뿐 숨 물아 쉬며 자리에 앉으니, 회청색 여름 양복은 온통 커피 얼룩, 화끈 거리는 손등 손바닥으로 쓸며, 바닥에 남은 커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소중했던가, 그냥 두고 올 생각 왜 못했던가,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는 삶은 꿈이다. 이성복님의 "그렇게 소중했던가 [출처] 그렇게 소중했던가 / 이성복|작성자 아침햇살

김경옥 시인의 우울한 쥐 외 1편

김경옥 시인의 영석이와 나와 2교시가 끝난 시간 푸른 하늘이 소리를 내며 쏟아진다 유리 조각에 튓 햇살이 함부로 난반사하는 교실, 영석이다! 어찌 해볼 수 없다 특수교사도 보조교사도 방법이 없다 속수무책이 해결책으로 불려오고 기다림은 최상책으로 말없이 서성인다 쌓이고 쌓이고 쌓인 것의 아래 나뭇잎 실핏줄까지 검게 부서진 부엽의 세월 그 맨 아래 영석이 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몰아닥친 것들 모두 몰려가서 만만한 그 집에 자리를 잡았던 거다 형체도 남지 않은 것들이 폭발하다니, 이제는 아부데나 날아가고 쿨쿨쿨 쏟아진다 뚱뚱한 몸 영석이 속에 영석이는 별로 없고 영석이 아닌 것만 남아 있다 내 속에도 많지만 폭발은 없다 민감한 제어장치 심호흡, 걷기, 술마시기, 운동장달리기, 정신승리법을 펼치지만 목젖 밑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