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옥 시인의
영석이와 나와
2교시가 끝난 시간
푸른 하늘이 소리를 내며 쏟아진다
유리 조각에 튓 햇살이 함부로
난반사하는 교실, 영석이다!
어찌 해볼 수 없다
특수교사도 보조교사도 방법이 없다
속수무책이 해결책으로 불려오고
기다림은 최상책으로 말없이 서성인다
쌓이고 쌓이고 쌓인 것의 아래
나뭇잎 실핏줄까지 검게 부서진
부엽의 세월 그 맨 아래
영석이 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몰아닥친 것들 모두 몰려가서
만만한 그 집에 자리를 잡았던 거다
형체도 남지 않은 것들이 폭발하다니, 이제는
아부데나 날아가고 쿨쿨쿨 쏟아진다
뚱뚱한 몸 영석이 속에 영석이는 별로 없고
영석이 아닌 것만 남아 있다
내 속에도 많지만 폭발은 없다
민감한 제어장치 심호흡, 걷기,
술마시기, 운동장달리기, 정신승리법을 펼치지만
목젖 밑으로는 칼춤의 지옥도가 여러 장이다
흰 가운 입은 의사들은 발견할 수 없다.
찾을 수도 없으니 영석이와 나는 누가 더 중한 것인가
위험 표지판 옆에 붙어 있는 안전제일 표지판
위험에 기식되는 게 안전한가
안전에 포장되는 게 위험한가
병명에 올리지도 못하는, 그래
문제 삼지도 못하는 분출장애
나는 자주 영석이가 부럽다
우울한 쥐
물 채운 욕조에 쥐를 넣는다
부르르 모터 도는 소리도 없이
너는 허우적이며 손발을 젓는다
하얀 털이 젖고, 앙다문 이빨 사이로 물은 들어오고
벌컥벌컥 목을 넘어간다
분홍 손가락이 다급하게 몸기계를 돌린다
사각 벼랑
한 뼘인데
몇 바퀴를 돌아도
힘 모아 뒷발 디딜 데 없네
목숨이 잡고 오를 스크레치 하난도
곁을 내주지 않네
나아가도 돌아가도
희망 없는 망망대해
올라갈 수 없네
솟을 수 없네
실험 엿새째
허우적임을 멈춘다
속 단풍 벌겋게 타던 쏘시개 불 그만 끈다
하얀 연기 한 올 피어올랐던가
앨법 사진들 한 장 한 장 삭제한다
기억들 뭉텅이로 사라진다
달력이 시계가 잡동사니들이 더미로 쓸려간다
멈춘다 지운다 피한다
돌아보지 않아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방식'
물에 잠긴 시간만이 흘러가는
이것이 내 삶이다
눈물은 없다
마침내 우울한 쥐가 완성되었다
여기저기서 우울한 쥐들이
하얀 약을 갉아 먹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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