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수 이선영
어제의 나를 깨끗이 씻어낸다
오늘의 얼굴에 묻은 어제의 눈곱 어제의 잠
어젯밤 어둠 어젯밤 이부자리 속의
어지러웠던 꿈 어제가 혈기를 거둬간
얼굴의 창백함
을
힘있지는 않지만 느리지는 않은 내 손길로 문질러버린다
늘 같아 보이지만 늘 새것인 물이 얼굴에 흠뻑!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오늘엔 오늘 아침 갓 씻어낸 물방운 숭숭 맺힌 나의 얼굴이 있고
그러나 왠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지 않은가,
어제는 잔주름만 남겨놓았고
오늘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
느낌 이성복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필 때
느낌은 그렇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질 때
느낌은 그렇게 지는가
종이 위의 물방울이
한참을 마르지 않다가
물방울 사라진 자리에
얼룩이 지고 비틀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
石榴나무 곁을 지날 때에는 장석남
지난 봄에는 석류나무나 한 그루
심어 기르자고, 봄을 이겼다
내년이나 보리라 한 꽃이 문득 잎사귀 사이를 스며나오고는 해서
그 앞에 함부로 앉기가 미안하였다.
꽃 아래로는 모두 낭자한 빛으로 흘러 어디 담아둘 수 없는 것이
'아깝기도 했음을,
그 욕심이, 내 숨결에도 지장을 좀 주었을 듯
그중 다섯이 열매가 되었는데ㅐ,
열매는 재 드나드는 쪽으로 가시 달린 가지들을 조금씩 휘어 내
리는 게 아닌가
그래 어느 날부터인가 석류나무 곁을 지날 때는
옷깃을 여미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그중 하나가 깨어진 채 매달려있는 것이었다
....안팎을 다해서 저렇게 깨어진 뒤라야 완성이라는 것이, 위
안인, 아침이었다
그 곁을 지나며 옷깃을 여미는 자세였다는 사실은 다행한 일이ㅏ
었으니
스스로 깨어지는 거룩을 생각해보는 아침이었다.
(아침의 장관 이시영
뱅골만에 아침이 오면 수천의 벵골인들이 밙월형의 바다를 향
해 엉덩이를 까고 실례하고 있느 모습을 기차여행중인 어느 외국
인 카메라가 잡고 말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인도양에서 밀려온
시원한 파도고 막 일을 끝낸 그들의 아랫도리를 깨끗이 닦아주고
있는 모습은 바다에서 갓 솟구쳐오르는 아침애와 더불어 장관이
었다)-----?!!!!?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김기택
방금 딴 사과가 가득한 상자를 들고'
사과들이 데굴데굴 굴러나오는 커다란 웃음을 웃으며
그녀는 서류 뭉치를 나르고 있었다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고층 빌딩 사무실 안에서
저 푸르면서도 발그레한 웃음의 빛깔을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그 많은 사과들을
사과 속에 핏줄처럼 뻗어 있는 하늘과 물과 바람을
스스로 넘치고 무거워져서 떨어지는 웃음을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사과를 나르던 발걸음을
발걸음에서 튀어오르는 공기를
공기에서 터져나오는 햇빛을
햇빛 과즙, 햇빛 향기를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지금 디딘 고층 빌딩이 땅이라는 것을
뿌리처럼 발바닥이 숨 쉬어온 흙이라는 것을
흙을 공기처럼 밀어올린 풀이라는 것을
나 몰래 엿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웃음을
그녀의 내부에서 오랜 세월 홀로 자라다가
노래처럼 저절로 익어 흘러나온 웃음을
책상들 사이에서 안 보는 척 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걸음을
출렁거리매 하늘거리며 홀로 가는 걸음을
걷지 않아도 저절로 나아가는 걸음을
의자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배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ㅛ
주말엔
아버지 산소에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라도 갈고
호박도 똬릴를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얒;ㅣ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겯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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