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거리로 나왔다 슬픔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려고
어제는 우산을 가방에 숨긴 채 비를 맞았지 빗속에서도 뭉개지거나 녹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퉁퉁 부은 발이 장화 밖으로 흘러넘쳐도 내게 안부를 묻는 사람은 없다
비밀을 들키기 위해 버스에 노트를 두고 내린 날 초인종이 고장 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자정 넘어 벽에 못을 박던 날에도
시소는 기울어져 있다 혼자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나는 지워진 사람 누군가 썩은 씨앗을 심은 것이 틀림없다 아름다워지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어긋나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
기침할 때마다 흰 가루가 풀풀 날린다 이것 봐요 내 영혼의 색깔과 감촉 만질 수 있어요 여기 있어요
긴 정적만이 다정하다 다 그만둬버릴까? 중얼거리자 젖은 개가 눈앞에서 몸을 턴다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물방울들
저 개는 살아있다고 말하기 위해 제 발로 흙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길 즐긴다 산책자/안희연-
벤치가 노파를 쓸어담는다 노파는 움푹 쏟아진다
5분 전, 노파는 유모차를 밀면서 공원에 들어선다 우는 아이의 입엔 뼈가 물려 있다
15분 전, 노파는 유모차를 밀면서 언덕을 오른다 노파의 몸을 박차고 나온 뼈들이 경쾌한 음을 내며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노파의 발걸음이 거벼워진다 유모차가 가벼워졌기 때문이라고 노파는 생각한다
30분 전, 노파는 유모차를 밀면서 상점 거리를 걷는다 쇼윈도우에 노파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친다 목 없는 마네킹 위로 노파의 얼굴이 붙었다 떨어지고 붙었다 떨어진다 그 시간 악기점 주인은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다 손가락은 몸의 구멍을 막느라고 분주하다
40분 전, 노파는 유모차를 밀면서 집을 나선다 이곳엔 마땅히 벽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사방이 벽이다
45분 전, 테이블 위에는 자궁처럼 부푼 빵이 놓여 있다 벽에는 시계가 걸려 있다 시간은 여전히 창틀을 넘어가고 있다
백색 공간/안희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고 쓰면 눈앞에서 바지에 묻은 흙을 털며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
한참을 서 있다 사라지는 그를 보며 그리다 만 얼굴이 더 많은 표정을 지녔음을 알게 된다
그는 불쑥불쑥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지독한 폭설이었다고 털썩 바닥에 쓰러져 온기를 청하다가도 다시 진흙투성이로 돌아와 유리창을 부수며 소리친다 “왜 당신은 행복한 생각을 할 줄 모릅니까!”
절벽이라는 말 속엔 얼마나 많은 손톱자국이 있는지 물에 잠긴 계단은 얼마나 더 어두워져야 한다는 뜻인지 내가 궁금한 것은 가시권 밖의 안부
그는 나를 대신해 극지로 떠나고 나는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그다음 장면을 상상한다
단 한권의 책이 갖고 싶어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밤 나는 눈 뜨면 끊어질 것 같은 그네를 타고
일초에 하나씩 새로운 옆을 만든다
파트너/안희연-
너의 머리를 잠시 빌리기로 하자 개에게는 개의 머리가 필요하고 물고기에게는 물고기의 머리가 필요하듯이
두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오더라도 놀라지 않기로 하자 정면을 보는 것과 정면으로 보는 것 거울은 파편으로 대항한다
잠에서 깨어나면 어김없이 멀리 와 있어서 나는 종종 나무토막을 곁에 두지만
우리가 필체와 그림자를 공유한다면 절반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겠지
몸을 벗듯이 색색의 모래들이 흘러내리는 벽 그렇게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나의 두 손으로 너의 얼굴을 가려보기도 하는
왼쪽으로 세 번째 사람과 오른쪽으로 세 번째 사람 손목과 우산을 합쳐 하나의 이름을 완성한다 나란히 빗속을 걸어간다 최대한의 열매로 최소한의 벼랑을 떠날 때까지
몽유 산책/안희연-
두 발은 서랍에 넣어두고 멀고 먼 담장 위를 걷고 있어
손을 뻗으면 구름이 만져지고 운이 좋으면 날아가던 새의 목을 쥐어볼 수도 있지
귀퉁이가 찢긴 아침 죽은 척하던 아이들은 깨워도 일어나지 않고
이따금씩 커다란 나무를 생각해
가지 위에 앉아 있던 새들이 불이 되어 일제히 날아오르고 절벽 위에서 동전 같은 아이들이 쏟아져나올 때
불현듯 돌아보면 흩어지는 것이 있다 거의 사라진 사람이 있다
땅속에 박힌 기차들 시간의 벽 너머로 달려가는
귀는 흘러내릴 때 얼마나 투명한 소리를 내는 것일까
나는 물고기들로 가득한 어항을 뒤집어쓴 채 소동/안희연-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거리로 나왔다 슬픔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려고
어제는 우산을 가방에 숨긴 채 비를 맞았지 빗속에서도 뭉개지거나 녹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퉁퉁 부은 발이 장화 밖으로 흘러넘쳐도 내게 안부를 묻는 사람은 없다
초인종이 고장 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자정 넘어 벽에 못을 박던 날에도
혼자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나는 지워진 사람 누군가 썩은 씨앗을 심은 것이 틀림없다 아름다워지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어긋나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
기침할 때마다 흰 가루가 폴폴 날린다 이것 봐요 내 영혼의 색깔과 감촉 만질 수 있어요 여기 있어요
긴 정적만이 다정하다 다 그만둬버릴까? 중얼거리자 젖은 개가 눈앞에서 몸을 턴다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물방울들
저 개는 살아 있다고 말하기 위해 제 발로 흙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길 즐긴다
[ 안희연 시인 약력 ] 안희연 시인 *1986년 경기 성남 출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재학. *2012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신철규 시인의 「술래는 등을 돌리고」 - 퇴고의 좋은 사례(1)
게시글 본문내용
|
'시 > 훌륭한 시인의 훌륭한 시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성복 시인의 그렇게 소중했던가 (0) | 2020.06.11 |
---|---|
김경옥 시인의 우울한 쥐 외 1편 (0) | 2020.05.30 |
도마뱀의 고백-이설야 (0) | 2020.04.12 |
나희덕 엮음 '아침의 노래 저녁의 시'에서 (0) | 2019.08.16 |
땅끝 문학 지에 초대 시들 (0) | 2019.05.30 |
눈물의 중력 / 신철규
십자가는 높은 곳에 있고
밤은 달을 거대한 숟가락으로 파먹는다
한 사람이 엎드려서 울고 있다
눈물이 땅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막으려고
흐르는 눈물을 두 손으로 받고 있다
문득 뒤돌아보는 자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갈 때
바닥 모를 슬픔이 눈부셔서 온몸이 허물어질 때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다
눈을 감으면 물에 불은 나무토막 하나가 눈 속을 떠다닌다
신이 그의 등에 걸터앉아 있기라도 하듯
그의 허리는 펴지지 않는다
못 박힐 손과 발을 몸안으로 말아넣고
그는 돌처럼 단단한 눈물방울이 되어간다
밤은,
달이 뿔이 될 때까지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는다
신철규,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문학동네, 2017, p.25.
[출처] 신철규 시인의 시 '눈물의 중력'|작성자 주영헌
명륜동 성당 / 백은선
단추를 쥐고 횡단보도에 서 있다
흔들리는 건반
알고 있어 너는 목소리에 대해 말하려 했지
목소리에 대해 말할 목소리가 없겠지
나는 접속사처럼 지워지는 물
깜박이는 신호등 아래
모자에 가려진 얼굴
구부러진 숲
바람을 밀어붙이는
너는 하품 그 밖에 물결이나 악보에 대해 말하고 싶겠지
묵상
레이스와 레이스
빳빳한 칼라와 움켜진 두 개의 구멍
단순한 형태 단순한 동작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겠지
뒤집히는 물
무픞을 맞대고 쉬운 말과 어려운 침묵을
두 눈으로
물고기 떼가 향할 때
손바닥의 말밥굽이
차거운 뒷면을 읽어낼 때
너는 끝장내고 싶겠지
단추가 뜯어져 바닥으로 떨어진다
녹색불이 깜박인다
관성이라는 말의 끔찍함에 대해
붉은 것 뾰족한 것
축축하고 차가운 오후
꺼낼 수도 집어넣을 수도 없는
눈빛으로
한 묶음
바닥을 흐르는 목소리
죄는 처음부터 있었지
그걸 취향이라고 했지
소용(所用)/백은선
의자가 있다
의자를 모르는 새가 있다
의자를 모르고 새를 모르는 둥근 거울이 있다
의자를 모르고 새를 모르고 둥근 거울을 모르는 차가운 밤이 있다
밤 속에서 의자와 새와 거울은 모두 어둡다
거울 속에 기쁨을 모르는
얼굴 의자와 새를 아끼는 내가 있다
직전에 멈춘 이별도 있다
잠든 아이의 숨소리
커튼이 흔들리는 소리
물이 쏟아지는 소리
별이 들어와
끝없이 창문에 부딪히며 바깥을 향한다
창문을 열어둘게
의자에 앉아
새를 그린다
소년을 만든 손은 고민에 빠진다
이름을 지어주고 싶어서
골돌해지는 동안
그림자가 기울고
단 한 번도 소리 낸 적 없는 것처럼
입은 굳게 닫혀 있다
의자가 있다
의자에 놓여 있는 파란 모자
모자 속에 노래를 아는 새 책처럼
거울 속 풍경이 펼쳐진다
세계의 공장/백은선
공장에는 두 소년이 있다
두 소년은 서로를 흉내 내는 사이
두 소년은 물소처럼 닮았다
어둠 속에서는 더 크게 눈을 뜬다
공장의 커다란 쇳덩이들이 좋아
나는 네 손을 잡는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는데 몇 번이나 죽었어
처음 소년이 됐을 대는 너무 슬펐다
사람이 되어서
자라야 해서
우리는 마주 본다
물가에 모인 양떼처럼
경계가 흐리다
공장에는 있다
노란 것, 하얀 것, 겹겹 흔들리며 멈춰 있는
예쁘고 끔직한 온도
몇 번이나 태어난다
공장이라는 것 공장의 모든 것 모든 공장에서의 시간과
기억 공장이라는 공간적 심연 돌파할 수 없는 물리적 메타
포 입을 다물게 만드는 공기
우리는 같은 동작을 같이 했다
너의 손끝이 내 어깨를 스친다
아기 오리처럼
딩면한 과제 우리의 현실
어렵고 미친 과제
나는 자라나고
어떤 때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너를 모른다
우리는 서로를 흉내 내는 사이
우리는 수사자처럼 닮았다
워터 미/백은선
왼손은 땅 속에 있다 빗겨 자란 나무
균형을 생각한다 균형을 잃은 공백 균형으로 가득 찬 공백
내가 노래하려 입술을 떼는 순간
공중을 선회하는 새 허물을 벗어내려 온몸을 뒤흔드는 뱀
뒤집힌 풍뎅이
왼손은 땅에 붙들린 빛
호흡 속에 있다
노래가 노래를 벗어나려고 하는 순간 우리가 목격하는 너의 얼굴 태지에 싸인
불투명한 도형들
꿈을 뚫고 들어오는
긴 꼬리 숲의 잔인하고 우아한 동작
사랑에 빠진 순간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수첩을 열어 이렇게 적었다
균형은 공기에 둘러싸여 균형 이후를 예비한다 눈을 감은
두근대는 빗방울 두근대는 땅속의 왼손 두근대는 철창 안의 날개
노래를 멈춘 네가 입을 마무는 순간
음은 무너진 균형의 증거일 뿐
흔들리는 어깨 흔들리는 머리카락 흔들리는 찻잔 흔들리는 꽃잎 흔들리는
숫자 8 흔들리는 낱장
의 종이 흔들리는 행성 흔들리는 매듭 흔들리는 화면 속 강물 흔들리는 봉제인형
흔들리는 눈빛
흔들리는 가지 위의 열매 흔들리는 커튼 흔들리는 목소리 흔들리는
어떤 노래는 너를 울린다 왼손처럼
땅속에 있다
주홍 글씨/백은선
서로의 코밑에 손가락을 갖다대며
들숨과 날숨
넌 몰라 넌 죽어도 몰라
구름의 비밀 가로등 아래 파묻힌 빛의 결
흘러내리는 옷 어깨의 손톱자국
첫 줄과 둘째 줄을 반복해서 읽어 내리는
빗줄기들
수취인 불명으로 돌아온 편지를 손에 쥐고
구름 구름 구름
검은 구름 낮은 구름 부서진 구름
가로등 아래 켜켜이 쌓인 속삭임
훔쳐듣는다
가장 낮은 음계를 딛고 돋아나는 비의 호흡
구름 그리고 구름의 짧고 두꺼운 소매 밑에서
쏟아지는 주홍빛
억눌린 몸뚱이 팔딱이는 붉은 심장
구름 혹은 구름뿐인 서랍을 닫으며
너무 단순한 수식뿐이구나
들숨과 날숨 떨리는 손가락들의 시간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
반듯하게 개켜진 얇은 옷
수취인 불명의 숨은
밤을 흔드는 가로등 낮은 허밍소리
넌 몰라 넌 죽어서 몰라
[ 백은선 시인의 약력 ]
백은성 시인
* 1987년 서울 출생
*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 등단 : 2012년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
* 시집 : 가능세계
* 수상 : 김준성 문학상
막판이 된다는 것
후박나무 가지의 이파리는 막판까지 매달린다 그늘을 막다른
골목까지
끌고 갔다 막판 직전까지 그 직전의 직전까지 밑천이 다 드러난
그늘을
보고서야 기어이
후박나무는 그늘을 털어 놓는다 막판의 세계에는 짬만 나면 밤이
나타나고
짬만 나면 낭떠러지가 다가와서 막판까지 추억하다 잎사귀를
떨어뜨렸다
추억하느라 파산한 모든 것
붙잡을 무언가가 필요해 손이 생겼다 손아귀의 힘을 기르다가
이파리가
되었다 가지 끝에서 종일 손아귀의 힘을 기르고 있다 그러나
양손이 모두
익숙지 않은 것들은 양손잡이일까 무손잡이일까 그늘을 탈탈
털어도
가벼워지지 않는
애면글면 매달려 있는, 한 잎의 막판이 떨어지면 한 잎의
막판이 자라고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어서 손이 손바닥을 말아 쥐었다
손을 꽉 쥐면 막
판까지 끌고 갔던 것들이 떠오른다 막판들이 닥지닥지 매달려 있다
막판 뒤에 막판을 숨긴다
* 2017년 김수영문학상을 받은 문보영 시인의 2016 중앙신인문학상 수상작.
누워서 나는 내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내 옆의 새벽2시는 회색 담요를 말고 먼저 잠들었다
이불 밖으로 살짝 나온 내 발이
다른 이의 발이었으면 좋겠다
애인은 내 죽음 앞에서도 참 건강했는데
나는 내 옆얼굴에 기대서 잠을 청한다
옆얼굴을 베고 잠을 잔다 꿈속에서도 수년에 걸쳐 감기에 걸렸지만
나는 여전히 내 발바닥 위에 서 있었다 발바닥을 꾹 누르며
그만큼의 바닥 위에서 가로등처럼 휘어지며
이불을 덮어도 집요하게 밝아 오는 아침이 있어서
잠이 오면
부탄가스를 흡입하듯
옆모습이 누군가의 옆모습을 빨아들이다가
여전히
누군가 죽었다
잘 깎아 놓은 사과처럼 정갈했다
비모의 연애 외 1편
문보영
나는 그것의 뒷모습만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나를 본다
그들이 바라봐야 할 무엇이 있고 내가 그것의 뒤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의 뒤에 있으므로 놈의 표정을 알 수 없다
그것은 두 발로 서 있으며 오른손으로 인사를 건넨다 왼손은
스케이트보드를 들고 있다 놈은 바닥에 설 줄 안다 바닥에서
걸을 줄도 알고 뛰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바닥에 서 있는
사실이 징그러울 때 새로운 바닥을 꺼낸다 놈은 보드에 올라가
흔들린다 놈은 흔들리는 게 좋다 흔들려야 안심이 되는 건
견고한 바닥은 뒤통수를 잘 치기 때문이다 세상이 흔들리는군,
넘어지겠어 그는 안심한다 흔들리는 바닥은 사랑에 관한
은유인가? 놈은 이상한 말을 지껄여본다 나는 뒤에서 놈의
사랑을 지켜본다 사랑이 뭐야? 놈이 허공에 묻는다 철학이
개소리가 되는 순간, 이라고 허공이 답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게 뒷모습만을 보였으므로 놈이 얼마나 사랑을 이해하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약속
찰리의 팔에는 문신이 있다 life is good with your eyes closed 삶은
견딜 만하다 두 눈만 감는다면 눈만 감으면 인생도 근사해질
거야 지껄이며 나는 찰리를 본다 팔에 적힌 글귀 때문에 찰리는
입체적이다 찰리는 어젯밤 죽었다 찰리의 죽음을 예언한 놈은
데즈먼드다 데즈먼드 떄문에 찰리는 죽는다 나는 눈물을
흘려본다 베개에도 묻혀 본다 꿈에서 나는 데즈먼드가 된다
찰리는 아직 살아 있다 왜 안 죽을까 하루살이는 하루만 살아서
입이 없다 어떤 하루살이는 이틀하고도 열 일곱 시간을 산다
닷새를 사는 놈도 있다 말을 안 지키는 것이다 왜 안 죽을까
찰리는 살아 있다 죽기로 해놓고 죽지 않다니, 김빠지는군,
데즈먼드가 혼잣말을 한다 무언가 죽지 않아서 김빠진다니
그런 말을 데즈먼드인 내가 하다니, 놀라며 나는 찰리를 본다
너는 눈을 감는다 우리는 놀이기구를 타고 있다 눈을 감으니
정말로 인생이 근사해지는걸! 데즈먼드는 웃는다 왜 안 끝날까
너는 그 정도로 강한가? 신난다! 너는 우겨본다 기쁘다! 나는
소리쳐본다 우리는 놀이기구를 탄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너무
충분해서 당분간은 내가 아닐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데즈먼드
가 된 내가 지껄이고 찰리와 나는 물 튀기는 슬픔을 잊기 위해 눈을 감아본다
(제20회 박인환문학상)
알고리듬 (외)
김건영
이 죄는 나도 알아요 눈을 감으면 끝난다는 것을 설사 끝나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여러 번 감으면 끝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앓고 있고 몸속에
시간이 쌓이는 것으로 먼별에서 순교자와 배교자의 자식들을 불태우며
항성보다 빛나는 별이 있음을 이해한 후 단지, 약속했던 손가락을 자를
뿐인데 웃자란 가지가 뿌리로부터 멀어지려 제 머리를 찢고 온몸에 눈을
틔울 때 한밤중은 몸을 뒤집으며 떨기 위한 구실임을 잊지 마라 이르니 제
손바닥으로 허공을 문지르고 잎은 자라 시간을 흐리면서 흐르지 않고 주름만
깊어질지니 화형된 자들이 쌓인 행성은 백색의 외골격으로 추위를
형용하고서 마냥 떠올라만 있어 그 빛을 받아 붉어진 이마를 눌러 주며
이 별에 있는 모든 돌아오는 것들의 이름을 되뇌어 주던 사람이 있더라
했었는데 토마토 기러기 일요일 같은 것들은 돌아오고도 그는 돌아오지
않고 이 별의 사육사는 지구의 적극적 기울기에 대해 침묵하고 우주에 늘어진
검은 현을 연주하던 꿈속에서 껌을 씹거나 꿈속에서 꿈꾸지 않는 꿈을 꾸며
긴 잠이 들었었다 이르니 문을 활짝 열어 두고 보는데 바람이 그것을 닫아
버린 것을 듣고서 놀라 꿈에서 깨어나 누구든 나타나서 내 창문 너머로
적의라도 보여 주기를 바라고는 다시 문을 열고 몸을 식히려 꿈속의 육신으로
기어들어 갔으니
기이
가지의 갈라짐은 입을 부른다 잎은 가을을 바라고
눈의 예감이 잎의 색을 물들일 것이다 하여 나무의 시간을
아는 자들이 인간의 백 세를 期頤(기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였다
물이든 북 같았습니다
터지지 않는
채를 견디는 먹먹한 소리
왜, 찬, 숲에서, 타고, 있습니까
너의 의자는 숯을 태우고 있습니까
한 잔의 차를 마시고
이것을 진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가당한 나무에서는 겨울에도 잎은 내기
먼저 지는 사람이 눈[雪] 내리기
재와 눈을 섞기
바다를 건너갈 것처럼 망연히
스푼을 저으면
설탕은 단호하게 가라앉고
비명을 지르는 그믐은 검은 물에 녹아 버리고
의문문이 열립니다
흰 것과 검은 것을 섞었을 때
하얘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너의 외국어는 탁자처럼
단단합니까
한 문장도 밑줄을 치지 않은 책을
덮는 것처럼 이제 가십니까
남아 있던 각설탕의 모서리는 날카로워지고
의문문은 누가 닫습니까 돌아는 오십니까
손목시계 속에서 침엽수들이 잎을 떨구고 있습니까
나머지 수명에 기대
나의 의자는 높이 자라고 마는 것입니까
탁자 위의 손이 겁에 질린 새처럼 도망칠 때
숲에 불이 옮겨 붙었습니까
바다로 피신하려 합니까
술래잡기처럼
뒤에 나올 사람이 저 문의 열기
왜, 숲은, 타고, 있습니까
왜 이 페이지만 젖어 있습니까
파롤의 크리스마스
―蛇傳 8
놓을 때가 된 노을이 있다 여기는 신이 버린 주말농장 우리는 가난을
서로에게 떠넘기며 놀았다 목마른 자가 음울을 판다 우리 매달리지는
않기로 했잖아요 너무 익어 무른 도원 바닥에 붉은 감이 떨어졌다 마침표가
발밑에 번져 밤이 왔다 언어의 정원 초과였다 말에 너무 많은 것이 타고
있었다 말 위에서 세상이 불타고 있었다 우리는 유리를 접고 밖으로 나가
구름을 만들며 그것을 구경했다 유리한 위치다 우리는 진실만을 말하면서
헤어진다 거짓말을 하면서 사랑했고 본드를 부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유대뿐인데 그것만을 주지 않았다
다다른 말들
인도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소똥의 부재가 두려웠다 길에 소가 없다니 침묵
에도 청자가 필요하다니 이상합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모두 같은
말입니다 같은 말을 했는데 우리는 왜 다른 곳을 보고 있습니까 그저
발화만 보고 있지 지금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요 말은 노래가 아닌데 노래는
말이 되고 마는 것입니까 음울한 개구리는 바닥에서 노래를 부른다 무거운
어둠에 눈을 뜰 수 없는 것을 子正作用이라고 부릅니까 이것은 Sorry 없는
아우성 절반이 사라지는 시간을 半死作用이라고 이릅니까 말이 씨가
될 때까지 개구리가 올챙이가 될 때까지 말이 시가 될 때까지 더듬어야
한다
다 다른 말들
메멘토 모리[森] 숲을 기억해 등 푸른 선생은 무덤이지 우리는 모두 수포로
돌아갈 거야 닫힌 유리창에 찔리기도 할 것야 금 간 鏡이 단단하게 흩뿌려져
있다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왜 다 끝나고 나서만 미안하다고
말하는 건가요 그 말에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가지처럼 오직
빈손으로만 얼굴을 만질 수 있다 이리 오너라 업보 놀자 습속에도 바람이
있습니까 習의 끝에 어른거리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濕한 말을 하는
귀신들에게만 들려주었던 산책과 죽은 책들의 갈피를 생각하면서 아침에
도착해야 한다 마지막 장은 雨期기로 했습니다 발자국이 언어가 될 수
있습니까 책은 숯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다 닳은 말들
* 수상작으로 선정된 10편의 제목. 1) 알고리듬 2)덜 떨어진 눈물 3) 기이 4) 부르튼 숲 5) 내생의 폭력 6) R 7) 주사위 전문점 팔아다이스 8) 나의 크샤트리아 9) 파롤의 크리스마스 10) 미미크리
-----------
김건영 / 1982년 전남 광주 출생. 서울예술대학 미디어창작학부 졸업. 2016년 하반기 《현대시》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 ‘다시다’ 동인. 시집 『파이』.
.........................................................................................................................................................
|심사평| 폐허 플레이, 알리바이의 시쓰기
기 수상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그동안 박인환문학상은, 서정성보다는 실험성이 강한 시들에, 그리고 때로는 아주 과격하고 파격적이며 개성이 강한 시들에 주목하면서 다른 문학상과 차별을 유지해 왔다. 그런 박인환문학상이 올해로 20회째를 맞이한다. 어떤 문학상이든 10년을 지속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20년을 지속해왔다는 것은 그 상의 권위나 위상을 떠나 적지 않은 찬사와 감사가 덧붙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인환문학상은 지난해부터 응모제로 바뀌면서, 응모 시인들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작품만으로 본심을 진행하였다. 특히 올해는 기한 내에 응모한 시인이 많지 않아 예심 위원들이 지난 1년간에 출간된 시집을 중심으로 최종 후보작을 선정했다고 한다. 응모기간이 지나서 응모한 시인들의 작품이 제법 있었지만 그 작품들은 예심에서 제외했다는 후문이 있었다.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 중에서 심사위원들은 마지막까지 「알고리듬」 외 9편과 「이브」 외 9편을 가지고 논쟁을 벌였다. 논의의 과정에서, 대상이 되었던 시인이 ‘김건영’과 ‘양안다’였음을 알게 되었고, 수차례 논의 끝에 2차 투표를 통해 김건영 시인의 「알고리듬」 외 9편을 제20회 박인환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였다. 사실 누구를 선정하더라도 박인환문학상의 취지나 의의에 부합하는 작품들이었기에 심사위원들의 고민은 그만큼 더 깊었다. 양안다 시인은 이미 2권의 시집을 통해 문단에서 자신만의 미학적 성채를 구축하고 있는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고, 김건영은 2016년에 등단하여 올 6월에 첫 시집 ?파이?를 출간하면서 새롭게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시인이다. 둘 다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개성이 강한 젊은 시인들이다. 심사위원들은 ‘문단의 평가’와 ‘새로운 스타일’ 사이에서 무게 추를 어디에 둘 것이냐 고민을 하였다. 논의 끝에, 언어에 대한 방법론적 자각과 시적 규범에 대한 부정성 면에서 김건영 시인이 좀 더 돋보인다고 판단하여 그를 수장자로 선정하였다.
데리다에 의하면, 문학의 역사는 폐허의 역사이다. 모든 문학적 글쓰기가 폐허의 놀이이겠지만, 김건영 시인의 시는 세계 구성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폐허의 상상력이 바탕이 된다. 폐허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이 없다.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자면, ‘빔(die Leere)’이다. 그런 점에서 폐허는 없는 것이 ‘있는’ 세계이며, 부재의 세계이다. 그러니까 폐허는 없으면서도 있는 이상한 세계이다. 폐허처럼 인과성이 탈락된 황폐한 현실에서, 김건영 시인은 ‘지금 여기’를 바라보기 위해 ‘다른 곳’을 본다. ‘다른 곳’, 즉 김건영은 알리바이를 꿈꾼다. 흔히 재판과정에서 ‘부재 증명’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알리바이’(alibi)는 라틴어 ‘알리우비(aliubi)’에서 왔다. ‘ali(다른)’와 ‘ubi(장소)’를 합쳐 만든 말이다. 그러니까 알리바이는 어원상 ‘다른 곳’을 의미한다. ‘지금 여기’를 강조할 때 알리바이는 공간적으로만 여기와 다르다는 특성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알리바이는 ‘지금’이라는 시간이 강조된다. 다른 곳에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곳의 삶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는 ‘이곳/다른 곳’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부재’, ‘긍정/부정’, ‘자아/타자’, ‘진리/허위’ 등의 관점들을 파기한다. 김건영 시인이 알리바이를 꿈꾼다는 것은 왜곡되고 뒤틀린 언어와 문장들이 ‘지금 여기’의 참담한 현실을 오히려 적확하게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김건영 시인의 시 곳곳에 드러나는 ‘언어유희’와 ‘패러디’, ‘시니피앙의 놀이’ 등 언어를 다루는 그의 솜씨는, 단순히 언어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 현실의 허구와 허위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우리들을 탄복시킨다. 폐허의 상상력이 빚어내는 해학과 포기적 반어성은 없는 현실을 반영하고, 왜곡하고, 부정하고 파괴하고, 노는 일과 통한다. 김건영의 시쓰기는 여기저기 존재하는 ’폐허‘를 보면서 ’다른 곳‘으로 보면서 미적 형식 역시 또 하나의 허위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중요한 것은 그의 시에서는 ‘없는 현실’, ‘다른 현실을 다루지만, 그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 ’지금 여기‘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시를 쓴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김건영의 시가 보여주는 시적 모험은 한물간 문학에 대한 비판적 시 쓰기이다. 그의 시적 모험이 더욱 즐거운 혹은 아픈 놀이가 되기를 기원하며,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심사위원 : 유성호(문학평론가), 장석원(시인), 강동우(문학평론가)
혜화
이소호
나는 나 같은 너에 대해 말한다 당신이 파놓은 구멍마다 들어가보는 고양이처럼
너라는 나에 대해 말한다 모자란 2월의 날들을 걸어놓은 옷걸이 푹 삶은 하얀 양말을
신고 건너간 수화기 너머에는 내가 버려놓은 말들이 떨고 있다 먼지 위에 쌓아올린
일기처럼 문턱을 넘지 못한 발가락처럼 나는 나보다 멀리 가 떨고 있다
나는 당신으로부터 있다
동그라미를 닮은 정오, 정오와 정오가 붙은 무한한 궤도 조금씩 어긋난 시침과
초침이 동그라미를 자꾸 그린다 동그라미가 무한히 반복되는 하루, 하루 한 번 당신은
동그라미의 갈비뼈다
침묵은 손톱처럼 길다 네 침대에 놓인 긴 머리카락보다 나는 말이 없다 말을 뒤집어
우리는 뒷면을 응시한다 하루의 뒷면, 칫솔의 뒷면, 크랜베리빵의 뒷면, 미키마우스
티셔츠의 뒷면, 그리고 섬의 뒷면 당신은 잘린 손톱처럼 외롭다 섬, 섬 나는 스위치를
내리고 불 꺼진 등대를 생각한다
얼굴 (외 2편)
이소호
주름을 더듬었다. 멍든 눈동자에서 내가 쏟아졌다.
차곡차곡. 나는 눈동자에 빗방울을 매달아 떠나보냈다.
전속력으로 사라졌다. 인중을 따라 베개 위에 하얗게
깎인 입술. 누워있다. 벼랑 끝으로 내몰려졌다.
낼름 목소리를 높여 읽어본다.
낼름 밑줄을 쳐본다.
낼름 배고픈 혀가 말의 눈을 감겨버린다.
말이 밖으로 나갔다. 말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지 않았다. 의문부호만큼 많은 시침을 가진 밤이
아직도 오고 있었다. 뒤뜰에서 떨어진 별들은 쓸데없이
목숨이 많았다. 몸부림 한번 치지 않던 전화기가
아가미를 열었다. 얼굴을 핥았다.
일곱 살
아직 숲을 통과하지 못했다 사막 한가운데 모서리들이
모여 빈 방을 다발로 낳았다 크레파스로 그린 창살에 갇히기
위해, 빨강 파랑 노랑 채집된 지문은 둥글게 앉았다 오후
다섯 시부터 나는 바람으로 빚은 짐승. 지는 해를 먹고
나날이 자라온 나는 방으로 들어가 스케치북 위에 가지런히
놓인 코끼리를 기린을 하마를 사냥했다 이마에 새겨진
서로의 꼭짓점을 맹렬히 공격하며 등줄기를 횡단하던 식은땀
한줄기 햇볕에 볼록렌즈를 갖다 대고 숲을 몽땅 태워버렸다
어떠한 소문도 박수갈채도 참석하지 않았지만 동물들은
방 안에서 뜨겁게 소화되고 있었다 코를 흔들어대며 이름
대신 가죽 같은 재를 남기고 흙먼지를 뒤집어 쓴 손바닥 위로
뒤축을 구긴 신발이 달리고.
연습
밥 한 끼 먹자던 가벼운 약속처럼, 시간이 자리를
내어주면 우리는 비로소 체온을 잃지. 울창한 육체 사이로
마지막 잎새 같은 당신의 손바닥. 깍지를 끼고 날마다 빗금을
그으며 남겨진 날들. 접시 위에 살갗을 거슬러 절반의 옆모습
절반의 뒷모습을 포개어 두고 재회한 우리. 매 순간 감사하는
마음으로 식전에 명복을 빌어. 우리가 즐겨했던 거룩하신 뜻에
따라 수포로 돌아가야만 하는 일들에 대해서. 반복되고
반복되는 오늘과 같이 벌거벗은 우리는 멀미를 하고 여전히
귓가엔 고백들이 방을 나서는 소리. 당신과 온 생애를 거슬러
마지막 음표를 마치고, 처음으로 되돌아오는 길. 당신이
끝끝내 가지고 돌아온 나는 이미 오래전 잊혀진 걸 알게
되더라도 놀라지 않는 연습을 할 테니, 당신은 오늘의
거짓말을 영영 들키지 말길
—————
▲ 이소호 / 1988년 전북 무주 출생.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재학중. Poetsoho@naver.com
................................................................................................................................................................................
엉덩이가 보이는 첼리스트 잭슨의 정원 (외 2편)
정선율
어제는 잭슨이 오기로 한 시간 나는 컵을 깨고 있다 향나무를 태운 정원사는
컵을 깨지 않기 위해 남편을 만들고 친구를 만들고 마녀를 만들었다지
(‘아 목동아‘ 에는 몇 개의 프레이즈가 있습니까) 접시의 윤곽을 지우자 오늘 밤이
선명해진다 통조림은 틀린 것 같아 우린 같은 라면을 먹고 있다니까? 남은 변명이
없어서 여름이 지나지 않는다 나의 팔은 자꾸만 흘러내린다
그것은 아주 여리게, p보다
더 여리게 연주하라는 뜻입니다
우산은 내가 몇 번이나 떨어트린 컵을 받아주었다 너는 두 명이고 나는 한 명이다
나는 세 명이고 너는 한 명이다 지금부터 나는 엄마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죽어가기로
한다 복부에서 펀치, 둔부에서 펀치, 정원사는 자꾸만 나의 자두를 숨겨놓는다
근음은 하행합니다 3음이 중복될 시엔 5음을
중복시킵니다
주3화음과 부3화음을
연결시켜줍니다
기쁘지 않다고 말해야 자라는 새, 정원사는 거품을 모았다가 거실에서 운다
새의 발톱으로 나는 미녀가 되는데 부모가 되기 위해 고아가 됐구나 정원사는
냄새를 흥얼거린다. 속이 생기고 손이 생긴다 나초 젤리, 푸딩, 크린베리, 스프링,
우리는 서로를 들키기 위해 엄마를 만지기로 한다 변색되기 위해 길어지는 해
세 번 동작, 두 번의 달리기
세 사람이
끼어든다 변장에 성공하는데
다음날에 나를 데리러 오겠다는
레가토란 부드럽게 소리 내라는 활줄 활줄 활줄의 표시
하행진행을 유도합니다
엄마는 다리를 꼬지 않아도 팔을 잃을 수 있다니까?
스타카티시모는 스타카토보다 더욱 짧게
잃은 팔을 제거하면 몸이 불어난다 내가 들은 것은 너에게서 나왔다고, 결말이
드러난다 절반이 되기 위해 자라나는 팔, 나는 가려야 한다 흔들림 없이 일정하게,
미녀의 코끝을 가리키며 정원사는 두 번 세수를 한다
가볍게 팔을 교차합니다 상 하행 교차합니다
한 손이 다른 손을 따라갑니다
앞니가 자란 정원사, 두 개의 팔이 자란 나의 속엔 가려운 곳이 많아진다.
내동댕이쳐진 자두, 우린 위로 올라간다 목이 젖도록 눈이 내린다
어딘가에 화를 내고 있는 것처럼
내가 창문을 열면 나와 헤어진 연인들이 다시 창문을 닫아준다
형은 접시 위의 자두로
신은 지우개의 모양으로
허리를 보이고
형은 삼킨다
터지려는 듯
열쇠는 죄가 많아 문을 열었대
나는 내 열두 번째 애인을 형에게 준다
형이 나에게 오고
나의 애인이 형에게 가면
형은 나에게 오고
첼로케이스를 가지고 오고
나의 애인은 접시 위에서 반쯤 깐 귤이나 되라지
신이 붓펜으로 변하듯이 형은 나에게 허리를 보이고
자두를 벗기고
처음 만지는 것처럼
창문이 열리고
형이 나에게 오고
그럼 나는 애인에게 갈텐데
코트를 꺼내서 주었다
어색하게 들려
커튼은 형을 보고 있다
주화음
형이 커튼을 보고 있다
5음의 생략
나는 애인을 보고 있다
구성요소
우리는 코트를 벗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창문을 닫아야 할까
본래의 이끔음
형은 자두를 지우고
상행
나는 형을 지우고
새들은 볼륨을 줄이고 있다
새들을 쪼아 먹는 형
애인은 자두를 삼킨다
반음계적 반음계적
형은 등이 가렵다고 한다
약속을 했어야지
단조는 모두가 같은 성질
창문은 열두 번째 나의 애인이 가져온 거래
코를 쥐어뜯으며 내가 형에게 입을 맞추자
애인이 나에게로 온다
콜라를 흔들 거고
형은 나를 잊었다
나는 아무것도 약속한 적이 없는데요
나는 아무도 믿지 않았는데도 떠내려갔다
나는 둘이었다
내가 형이었을 때와 형이 여자였을 때
먹어서 먹어서 불어나는 형은 하이힐의 뒷굽이 자주 닳았다.
늙은 주인집 여자는 ‘요즘 젊은 년들은 자극적인 것만 좋아해’
하며 흑갈색의 젖가슴을 드러냈다 집세는 올리지 않았다
창가에 묻은 꽃은 긁어서만 나왔다 형이 여자였을 때 눈썹을 자르는 칼은 흉부보다
날카로웠고 루벤스의 사냥그림보다 폭이 넓었다 우린 늘 칼에만 기댔다 칼로
우릴 가를 수 있었다 꽃은 형보다 한 살이 많았는데 꽃을 마구 헝클어트리자 형은
진심을 드러냈다
빨리 졌다
나는 주인집 딸 쥬디에게 덧셈과 뺄셈 곱셈 문제풀이법을 알려주었고 이십 프랑을
받았는데 그때마다 쥬디는 콘돔에서 토마토 향이 난다며 나에게 맡아보라 했다 다음
날 나는 늙은 주인집 여자의 주름진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형이 여자였을 때 형은 자주 고개를 숙였다 시야에 자신의 몸이 가슴부터 닿는
이유는 가슴 아래부터 연약해지기 때문이라 했다 발가락의 방향은 가슴이 닿지
못한 부위로만 향했다
공기에 부딪혀 상한 어금니는 까닭 없이 가능하다고만 말했다
가슴보다 발바닥이 가까웠다 가려웠다 입술은 이를 감추지 못해서 같은 말만 반복
했다
늙은 주인집 여자가 내 눈을 벌려 후 ~ 하고 입김을 불 때마다 싱크대 하수구
냄새가 났다 형이 여자였을 때 버렸던 장조림, 달걀 껍질, 상한 마늘 껍데기 같은
것들이 내 혀 안에 척척 달라붙었다
어제는 쥬디가 형의 구두를 신었다 나는 쥬디가 자란 높이만큼 꽃을 숨겼다
가짜 꽃은 형이 숨겼다 쥬디가 건넨 콘돔 박스엔 산양이 걸어가고 있었다 산양은
형의 눈썹 칼로 날개를 잘랐으므로 날 수 있었다
—————
▲ 정선율 / 1985년 서울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