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께서는 튀밥 장사를 다니셨다. 강냉이 튀밥(옥수수)을 다라에 이고 집집을 방문하면서 돈을 받거나 고물을 받고 튀밥을 파셨다. 이 튀밥을 팔기 위해 낯선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설 때, 입이 특히 무서운 불독을 만나시면 얼마나 무서우셨을까? 어머니께서는 달려드는 불독의 입을 둥근 다라이로 막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렇게 어머니께서 돈을 벌러 나가 밤늦게 돌아오시는 날에 나는 아이들고 별이 뜰 때까지 놀았다. 나이먹기, 자치기, 구슬치기 등 나는 놀기를 밥 먹는 것보다 더 좋아했던 것 같다. 여느 아이들처럼.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오셔서 마을 골목길를 나를 찾아 요섭아, 요섭아 라고 크게 외치고 다니시면 그제서야 어머니의 부르는 소리를 듣고 어머니와 함께 집에 들어갔다. 손을 씻고 얼굴을 씻은 후에 밥상 머리에 앉아 밥을 먹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밥 숟갈을 들고 몇 숟가락 들다가 졸음에 겨워 밥 숟가락을 든 채로 모로 누어 잠들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목에 때꼽짝을 새카맣게 묻힌 채로.
그러면 어머니께서는 새벽녘에 다시 장사를 나가셨다. 나는 놀고 놀고 또 놀았다.
마을 입구 쇠달구지라도 다닐 수 있는 길로 오는 입구에 쌀 다섯 가마를 실은 쇠달구지가 오는 것이 온통 이미지로 내게 남아있따. 가난했던 날이었지만, 어머니께서는 장사해서 버신 돈으로 쌀을 사 오시는 것이었다. 절대적으로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었지만 나는 굶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양림동 선교사들이 사는 집과 기독 병원에 가셔서 낙엽을 쓰셨다. 좀더 영리하셨다면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변변찮은 직업이라도 얻게 되셨을 텐데 워낙 미련한 분이셔서 그날 그날 일하시고 삯을 받아 오셨다. 밀가루, 강냉이 가루를 얻어오셨다. 마을은 가난했으므로 이렇게 동냥해 돈 밀가루죽도 깡냉이 죽도 마을 사람들의 허기를 해소하기도 했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이웃 사람들이 모두 와서 우리집 음식을 먹었다. 먹여살리셨다는 판단을 하게 한다. 어머니는 아주 기억력이 좋으시다. 다만 기억하고 있으신 일들을 때로 과장도 하셨다. 한 편의 팩트가 아니라 한편의 픽션을 듣는 듯한 느낌을 가질 때도 있었다. 더욱이 나이가 많이 드신 후로는 더욱더 소설을 많이 만드셔서 간혹 내게 추억의 터널로 인도하셨다. 나는 기록하고 싶었다. 그리고 어머니께 지나온 날들을 기억하시도록 하고 나는 듣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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