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에 대한 나의 첫 생각은 단순하였다. 지워질 수 있는 것, 아니 지워질 수밖에 없는 것, 지워져야 하는 것이었다. 모래 위에 쌓은 성이란 개념은 의미도 모른 채 받아들여졌다. 모래밭을 본 것은 바닷가에 가서였다. 그 모래밭에 발자국은 단 한 번의 밀물로 지워졌다. 이름도, 그림도, 모두 지워졌다. 지금 생각하면 마치 긴 우주의 호흡에 의해 내 인생도 그처럼 지워질 것이다. 당연한 것이다. 그 모래밭에 절망, 관념, 추측, 우정, 고뇌, 이런 모든 것이 파 묻히는 것이 아니라 지워지는 것이다. 묻히는 것과 지워지는 것은 다르다. 그 사람의 기억 속에 있다가 어느 순간 나는 지워지는 것이다. 잊히는 것과 지워지는 것은 다르다. 잊히는 것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먼 지평선으로 사라지는 사람의 그림자처럼 천천히 사라지는 것이다. 지워지는 것은 일순간이다. 사자가 사슴의 목줄을 끊듯이 찰라적이다. 그러나 잊히는 것보다 지워지는 것이 더 낫다. 눈물도 찔끔찔끔 오래오래 흘리다 보면 마음에 큰 병이 생긴다. 잊힘도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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