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불교의 이해

삼귀의에 대한 나의 생각

골뫼사니 2026. 6. 9. 14:19

삼귀의에 대한 나의 생각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三歸依를 읽고 불자들은 암송한다. 읽고 또 듣고 하는 중에 나는 하나의 의문을 갖게 되었다. 세 번째 항이다. 부처님의 제자 됨이 자랑스럽습니다. 이 땅의 고통받는 모든 중생을 구원하는 보살이 되겠습니다.

이 땅의 고통받는 모든 중생을 구원하는 보살이 되겠습니다.’라는 말에서 나는 계속되는 의문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데, 나의 의문은 이렇다.

모든 중생이 고통받고 있는데 이 말을 암송하고 있는 불자들이 구원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나의 이 생각에 대해서 탐진치(貪瞋痴) 三毒으로 분석해야겠다는 생각을 지금, 이 순간에 하게 되었다>-뒤로 미루자.

불자들은 마음으로나 말로는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나, 실제 몸으로나 경제적으로 구원하려는 노력은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계속 이 말을 암송하다 보면 불자들은 실제적 행위를 못 하는 것에 무감각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이 말은 말로 행해지나 실제로는 행함이 없는 공중에 뜬 공염불이 될 것이다. 그러나 불자들은 자신들이 이 땅의 고통받는 모든 중생을 구원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자기 성찰의 거울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제 뒤로 미뤄뒀던 것을 생각해보자.

이렇게 문제를 말하는 나는 구원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나를 도덕의 거울 밖으로 꺼내두고 관람석에 앉아서 불자들의 행위를 분별심을 일으켜 자신의 상으로 힐난하고 있다.-이것은 진의 영역에서 보면 분노의 마음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나의 근본적 생각에는 무엇이 똬리 틀고 있을까? 그것은 탐이다. 당신들은 어리석어 모르지만 나는 이런 것을 알고 있다는 지적 허세로서의 탐심이다.

이제 치의 관점에서 내 생각을 보자. 고통받는 모든 중생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누구도 가능하지 않다. 전륜성왕은 가능한 일일까? 그것은 신화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 뜻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능한 선에서 보살행을 실천하여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에 빠진 중생을 수영도 하지 못하면서 뛰어들면 둘 다 빠져 죽는다. 그러니 주위를 살펴 수영 잘하는 이를 찾고, 긴 막대나 밧줄을 찾아서 살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살행이지 않을까? 애당초 가능하지도 않은 보살행의 틀을 만드는 것이 어리석음인 것이다.

이제 나는 이렇게 내 생각을 정정한다.

이 땅에서 중생은 어떻게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실상을 화두로 삼고 그 해결의 방법도 화두로 삼아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실상을 행하며 살아간다면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극단의 곡예사가 걷는 외줄 타기는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중생의 고통을 창가에 서서 바라보고만 있는 행위는 올바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