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크콘서트

나에 대하여

골뫼사니 2018. 6. 7. 16:06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공동체)의 구성원이다. 나는 이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생물로서의 욕구를 필요한 만큼 적절(적당)하게 충족시실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이 공동체가 평화롭고 자유로우며 평등하고 갈등없이 지속가능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이런 세상에 살면서 내 힘(정신적, 육체적, 경제적)이 가능한 일을 찾아 참되고 건실하게 삶을 살아가고 싶다

그렇다면 세상보다 나를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어느 지점에 한정되어 살고 있는가

나, 가족, 친족, 이웃과, 벗들, 동료들, 운동 공동체, 마을 이러허게 영역을 확장해 보면 난, 나를 닦는 것이 예순이 넘엇는데도 아직 부족하다 생각하니 뜻을 세웠던 마음이 위축된다. 그럼 이 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

나늘 닦는다는 것-세상을 알고 이해하는 것인데 그리고 사람과 만나가면서 예법에 맞게 산다는 것인데 -------------------




2010년대 나주에 김충복이란 자가 살았다. 막내였고 늦둥인지라 어려서부터 어머니 치맛자락 속에 숨어 살다시피 하였다. 남들은 1살 또는 두 살 길어야 세살 때가 되면 젖을 끊는데  김충복은 겨우 여섯 살에야 젖을 끊을 수 있었다.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 했는지란 김충복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생각하였다. 어머니가 부엌에 있으면 충복은 부엌에 있으려 했고 어머니가 밖에 마실 나가면 함께 마실 나갔다. 행여 귀엽다고 어머니 친구들이 머리를 쓰다듬을랴치면 어머니 치마 속으로 숨어들었다. 충복은 어머니 부엌에 함께 있기를 좋아했지만 어머닌 늘 "사내 자식이" 하고 부엌에 있는 것을 쫒아냈지만  이내 충복은 어머니 곁에 붙어 있다시피 했다. 충복은 어머니 곁에 있으면서 여자들에 대해 가엾은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어릴 때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충복네 가족은 어머니로 치면 아들 삼 형제에 맨 위가 농아자이고 둘째는 지능이 조금 모자란 형편이었다. 아버지는 천하가 다 아는 지능이 부족한 사람으로 걸인처럼 보였다. 그러니 어머니가 갖는 아픔과 고통은 나름 어머니를 괴롭혔을 것이다. 이 마음이 고스란히 막내 충복에게 전염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충복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부엌에서 있었기때문에 요리는 낯설지 않았다. -----------------------------------------




나는 요리하는 것을 좋아한 것 같다. 일로 느끼지 않은 요리 정도일 것이다. 어렸을 때는 생각하니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물 끓이는 법은 자취했던 대학 때 1년 후배들의 집에 가서 알았다. 되장국은 대충 여러가지 섞어 넣으면 됐고, 김치찌개는 너무 쉽다. 서양 요리 중에 비프스테이크, 함박스테이크는 요리 책을 보고 아내와 아들 딸에게 요리해 주었다. 함박슽ㅔ이크는 진도에서 문희경 부부를 우리 집에 초청해서 요리했는데 너무 짰던 기억이 난다. 고등어 김치 조림, 가을 붕어 무 조림을 했는데 나는 내가 우리 집에서 요리를 많이 했던 것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기억을 왜곡하는 것이다.

요리란 원 재료에 부재료를 넣고 석거나 열을 가해 사람들로 하여금 먹기에 편리하도록 해 놓은 것이다. 기실 위 속에 넘어가면 원재료를 그대로 먹는 것과 요리한 것과는 진다면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이 경우 요리란 소금과 고추가루를 넣은 기본적인 요리를 뛰어넘는 우리 입과 눈과 코를 즐겁게하는 요리의 개념으로서 요리이다.

요리란 원 재료에 보조 재료 즉 양념을 넣어서 원 재료의 맛을 그대로 살리든가 원 재료가 갖는 쓴 맛, 독한 맛, 비린 맛 등을 제거하는 활동이다. 때로 요리는 원 재료의 맛을 변형시켜 양념의 맛으로 변질되는 경우도 있다.

나의 말은 원래 하고자 하는 말보다 재밌게 말하고자 하는 방법이 지나쳐 다소간 재밌지만 그 행위들이 아첨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마친 원 재료의 맛을 상실할 요리처럼, 나의 말은 나를 왜소하게 만들고 상대를 추어올려 무엇인가를 획득하기 위한 방법이며 비겁한 행위가 되고 만다. 무미건조할 필요는 없지만 말을 꾸미고 얼굴색을 고쳐 아첨하는 자의 모습이 된다. 이가 갈리는 일이다. 이가 갈리는 일이다.


아첨의 본질은 무엇인가 힘이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빌붙어 자신의 안위를 지키려는 것 아닌가, 아첨이란 말에 혐오감이 든다. 이 결과로 인해 오는 모멸감의 고통이 있다. 이렇게 느끼는 감정 역시 다시 생각해봐야 할 길인데, 자아 성철이 필요한 것인데 감정이 일다니. 참 그렇구나

힘이 없다면, 지식이 부족하다면, 견해가 없다면 없는대로 부족한대로 그 자체의 나로 타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꾸미지 않아야 한다. 나를 현 상태보다 더 좋게 보이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

상대가 타인이 나를 바로 보아야 제대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과장은 심하고, 자신에 취해 심해보더 더 깊은 속인 이웃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그리고 나를 왜곡시켜 전달한다. 그 왜곡은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가진 능력보다 낫게 보임으로써 나에게 사람들은 그의 눈에 비친대로 역할을 요구한다. 그것은 내 죄인 것이다.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보일 수 있을까?


과거는 들출 필요는 없을 것이다.


현재 나는 영어를 못한다. 국어 토론 수업도 할 줄 모른다. 과학적 지식이 적고 얕다. 인문학 소양이 부족하고 구체적으로 누군가에게 토론하고 설득할 실력이 못된다. 색의 구별을 못하고 음정과 박자와 음에 따라 몸은 움직이지를 않는다. 사람의 가치를 평가할 능력이 부족하다. 술을 못하고 의지력이 박약하고 현실을 뚫고 나갈 새로운 동력이 없다. 단숨에 목숨을 끊어버릴 용기도 없다. 세상의 변화를 읽지를 못한다. 가족을 ....?


투명 유리관 속으로 들어가 타인들에게 나를 들여다 보게 할 수ㅡㄴ 없는 일이다.

나는 적당히 숨겨지도록 해야한다.

'나'의 미와 추, 동물과 인간 사이, 결핍과 만족, 고통과 즐거움, 슬픔과 기쁨, 추억과 쓰라린 기억,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이력과 내가 말하기 싫은 슬픔과 기억, 기억하여 현재를 힘들게 할 것들을 말하지 않고 사라지게 할 권리가 내게 있다.

그리고 현재 나, 이 '나'가 현재에서 1초, 1분, 1시간, 1일, 1달, 1년 , 10년 ....살아갈 일들에 대해 나는 ...


자기 안의 감옥, 그곳에서 행해지는 가혹한 고문과 형벌, 자백과 상처와 자살이 있다. 내버려두자.

그리고 지금   

나를 닦고 어차피 만나는 사람들과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고, 이 민족, 국가 공동체, 전교조 조합원으로서 토직조합원, 조금이라도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하고, 세상을 바꾼다고 하는 일에 머릿수를 합해주고그러다 보면 나는 나를 남에게 잘 보여지고 마는데 ? 괴롭구먼,

가족, 친족, 친구들, 같은 취미의 모임, 진보적 공부 모임, 전교조 함께한 사람들, 민족, 국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참여하고---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