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크콘서트

본 이야기-

골뫼사니 2017. 10. 30. 13:34


* 메타인지-자신의 인지 과정에서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자각할 수 있는 능력(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자각할 수 있는 능력)



* "니이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를 읽고/ 후일 "즐거운 학문" 중에서 옮김=신과 죽음에 대해

<쇼펜하우에르의 죽음에의 철학, 죄렌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


1.

 “성자여 대체 그대는 숲 속에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나는 노래를 만들어서 부른다. 나는 노래를 만들 때 웃고 울고 신음한다. 그러면서 나는 신을 찬미한다. 노래하고 울며 웃으며 신음하면서 나의 신을 찬미한다. 그런데 당신은 우리에게 어떤 선물을 주려는 것인가?”

이 말에 그는 성자에게 작별을 고했다.

“선물? 대체 내가 그대들에게 무슨 선물을 하겠는가? 제발 나를 이곳에서 빨리 떠나게 해 다오. 내가 그대들의 것을 빼앗기 전에.”

그리고 그 두 사람은 마치 소년처럼 마주 웃으며 헤어졌다.

이윽고 그는 홀로 있게 되자 자신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저 늙은 성자는 숲 속에 있으면서도 ‘신은 죽었다’는 사실에 대해 모르고 있다니!”


2.

“올라가고 내려가고 하는 그런 일이 돼 있을까? 우리는 무한한 무(無)안에서 떠돌아 다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훨씬 더 깊은 밤이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지는 않은가? 아침이 되어도 우리에겐 등불이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는 아직 신의 무덤을 파는 도굴꾼의 삽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신의 육신이 썩어가는 악취를 맡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세상에서 가장 신성하고 가장 힘있는 것이 우리의 칼날 밑에서 피흘리며 죽어갔다. 지금까지 이보다 더 위대한 행위가 행해진 적이 없었으며,이 행위 덕으로 우리 뒤에 누가 오든 그들은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그 어떤 역사에서 살았던 것보다도 성스러운 역사를 살게 될 것이다.


3. 이전에는 신에 대한 모독이 최대의 모독이었다. 그러나 이제 ‘신은 죽었다’. 그리고 그들 모독자도 신과 함께 죽었다. 이제는 대지를 모독하는 것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또한 탐구할 수도 없는 내장을 대지의 뜻 이상으로 받드는 것 역시 가장 무서운 것이다.

영혼은 일찍이 육체를 경멸했다. 그리고 그때는 이런 경멸이 최고의 사상이었다. 영혼은 육체가 쇠약해져서 굶주린 상태에 있기를 바랬다. 영혼은 이렇게 해야만 육체와 대지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아, 그렇지만 그때는 영혼 자체도 몹시 쇠약해져 기아상태에 빠져있었다. 그리하여 잔인성이 그 영혼의 기쁨이었다.


(니체/하이데거 저, 김문성/이윤성 번역, [신은 죽었다], 책향기, 2000)에서 인용.


* 키에르케고르의 생애

 

어느 날 아버지 미카엘은 소년 죄렌에게 다음에 무엇이 되고 싶냐?”라는 물음에 포크가 되고 싶다고 대답, “?”라고 묻는 말에, “무엇이든지 맛있는 것을 접시로부터 찍어올 수 있으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너를 쫓아오면?”이라는 물음엔, “그러면 전부 다 찍겠다.”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그래서 포크라는 별명을 가졌다. 매우 기지 넘치는 아이였다.

그러나 집안에는 오락 시설이 거의 없는데다 외출하는 일도 드물었으므로 자연히 죄렌은 생각에 잠기는 일이 많았다. 아버지는 엄격하였으나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어서, 죄렌이 외출하기를 청하면 선뜻 허용하는 대신 손수 아들의 손을 잡고 방 안을 거닐며 가고 싶은 곳을 묻고, 그곳에 대해 문 앞을 나서는 장면부터 상세히 얘기하기 시작한다. 해안으로 나가고 거리를 거닌다. 아는 사람도 만나 인사를 나눈다. 이렇게 반시간이나 방 안을 거닐면 마치 온종일 외출해서 돌아다닌 것처럼 지쳐 버리는 것이다. ‘방 안의 산책은 죄렌에게 상상의 기쁨을 가르쳤고, 따라서 건전한 상상력이 길러졌다.-43세 졸

 


*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중===청소년기의 삶과 세계 인식에 대해/수레바퀴 아래서/페터 카멘젠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문열)/호밀밭의 파수꾼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 범우사 세계문학전집 "데미안" 중에서

에바 부인이 에밀 싱클레어에게


그러고는 별을 사랑하게 된 젊은이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바닷가에 서서 손을 뻗치고 별을 예배했다. 그는 별의 꿈을 꾸고 자기의 생각을 그것에 쏟았다. 그렇지만 사람이 별을 끌어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거나 또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이루어질 희망도 없는데 별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자기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에서, 체념과 자기를 온화하게 해주고 정화시켜줄 무언의 충실한 고민을 읊은 와벽한 생명의 시 한 편을 썼다. 그러나 그의 꿈은 모두 별에까지 올라갔었다. 어느 날 밤, 그는 다시 바닷가 높은 절벽 위에서 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리움이 절정에 달한 순간 그는 펄쩍 뛰어 별을 향해서 허공으로 날았다. 그러나 그렇게 뛰는 순간에 그는 다시 한 번 번개처럼 생각했다. '이건 정말 되지도 않을 일이 아닌가'라고! 그러자 그는 바닷가에 떨어져 죽었다. 그는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만일 그가 뛰어오른  그 순간에 굳고 확실하게 일이 성취될 것을 믿는 정신력이 있었던들 그는 하늘로 날아올라가 별과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사랑은 부탁해서는 안되는 거예요." 그 여자는 말했다. "요구해서도 안되고요, 사랑는 자기 내부에서 확신에 도달하는 힘을 지녀야 돼요. 그러면 사랑는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끌어당기게 된답니다. 싱클레어, 당신의 사랑은 나에 의해 끌리고 있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나를 끌게 되면 그땐 내가 가겠어요. 나는 선물을 주고 싶은 게 아니라 획득당하고 싶은 겁니다."

어떤 때 그 여자는 다른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 그것은 아무 희망도 없이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그는 자기 영혼 속에 완전히 들어박혀 사랑으로 훨훨 타 없어질 것 같았다. 그에게는 세계도 사라졌고, 푸른 하늘도 푸른 숲도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졸졸거리는 시냇물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하프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고 가난하고 비참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자라났다.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그 아름다운 여자를 단념하근니 보다는 차라리 죽거나 멸망해버리기를 원했다. 그때 그는 자기의 사랑인 자기의 내부에 있던 모든 것을 불태워버렸음을 느꼈다. 그래서 그 사랑은 강해지고 자꾸 끌어당기고 또 끌어당겼다. 그래서 그 아름다운 여자는 따라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여자가 왔다. 그는 여자를 끌어안으려고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러나 그 여자가 그의 앞에 와서 서자 그 여자는 아주 달라져버렸다. 그는 자기가 잃어버렸던 온 세계가 자기에게로 끌어당겨져 있음을 보고 전율을 느꼈다. 그 세계가 그의 앞에 서 있었고 그에게 몸을 내맡겼다. 하늘과 숲과 시냇물, 그 모든 것들이 새로운 생생하고도 화창하게 그를 향해서 왔고, 그의 것이 되고 그의 말을 했다. 그렇게 그는 단지 한 여자를 얻음으로 해서 온 세계를 마음속에 갖게 되었고, 하늘의 모든 별은 그의 내부에서 반짝이고 그의 영혼을 뚫고 환희의 불꽃을 튀겼다. 그는 사랑했고, 그와 동시에 자기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잃기 위해 사랑한다.

.... 때로 나는 확실하게 내 본성이 끌려가고 도달하려고 애쓰는 대상은 그 여자가 아니라 나의 내면의 상징에 불과하며, 그것은 나를 보다 더 깊이 끌고 들어가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셀린저

홀든 콜필드(16세)

<호밀밭의 파수꾼>은 홀든 콜필드라는 한 고등학생이 학교를 퇴학당한 후 집으로 들어가기 전 2박 3일동안의 이야기이다. 홀든 콜필드는 4번째 펜시 프렙 기숙학교를 5과목중 4과목을 낙제받아 퇴학당했다. 사실 퇴학의 사유는 성적불량이지만 그 심층에는 소년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혼란이 자리하고 있다. 콜필드는 고문변호사인 아버지, 돈을 위해 헐리우드에서 시나리오를 쓰는 형과 피비라는 여동생이 있다. 부유층에 속하는 주인공은 학교에서부터 뉴욕을 방황하는 동안 어른들의 위선적인 태도에 회의를 느낀다. 엄격하지만 무관심한 아버지, 예민한 어머니, 학부모를 옷차림으로 판단하는 교장, 믿고 위탁했으나 성추행을 하는 선생. 그가 느낀 어른들의 세계는 거짓과 위선, 불의와 폭력이 난무하는 곳이었다. 이러한 어른들의 위선과 비열함때문에 주인공은 어린아이들에게 애정을 느끼게 되고 그는 호밀밭에서 노는 아이들을 지켜주는 파수꾼이 되고 싶어한다.

 그 결과 그는 서부로 떠날 것을 결심하고 떠나기 전 동생 피비를 보기 위해 피비의 학교로 간다. 자신을 따라 가겠다는 피비로 인해서 그는 피비를 데리고 센트럴 파크로 향한다. 그는 결국 집으로 돌아가게 되고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된다. 이 이야기는 콜필드가 요양원에서 형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 재수하면서 읽었던 참고서 "현대 국어"에 나오는 "이양하"의 수필 중 "프루스트의 산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사랑과 삶의 대해


 야심은 광영보다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이다. 욕망은 꽃을 피우나 소유는 모든 것을 시들게 한다. 인생을 사는 것보다 인생을 꿈꾸는 편이 낫다. 설혹 인생을 산다는 것이 역시 인생을 꿈꾸는 것이라고 하여도, 그것은 직접 인생을 꿈꾸는 데 비하면 훨씬 신비롭지 못한 동시에, 훨씬 명료하지 못하고 반추하는 동물의 희미한 의식 가운데, 산재하는 꿈같이도 취약한, 둔중鈍重한 꿈을 가지고 꿈꾸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의 각본은 극장에서 연출되는 것보다 서재에서 읽는 편이 더 아름답다. 불후의 연인을 그려낸 시인은 흔히 하숙의 평범한 하녀밖에 알지 못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탕자는 또 이와 반대로 그들이 보낸 생활이라고 하느니보다 생활이 그들을 이끌었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편이니 만큼, 생활이란 걸 생각할래야 그 방도를 알지 못 한다—나는 몸이 약하고 상상력이 지극히 조숙한 열 살 되는 소년을 안다.

 그는 자기보다 나이 많은 소녀에게 순진한 사람을 바쳤다. 그는 그 소녀가 지나가는 것을 보려고 언제든지 창가에 서 있곤 하였다. 그는 그 소녀를 보지 못하면 울고, 보면 또 봤대서 울었다. 그가 그 소녀 곁에서 지내는 순간은 지극히 드물고 또 지극히 짧았다. 그런데, 그는 침식을 잊어버린 어떤 날 창에서 몸을 던졌다. 사람들은 처음 그가 죽은 것은 소녀에게 가까이 갈 수 없는 것을 절망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반대로 그가 죽은 것은 그가 그 소녀와 장시간의 담화를 한 뒤에 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소녀는 그에게 지극히 친절히 대해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상상했다. 요컨대, 그는 이러한 도취를 다시 거듭할 기회가 없을 것을 생각하고 삭막한 여생을 버린 것이라고. 그러나 그의 동무의 하나에게 때때로 고백한 바로 미루어보면, 그는 그의 소위 그 꿈의 여왕을 만나 볼 때마다 일종의 기만을 느끼곤 하였다고 생각이 된다. 그러나 그 소녀가 가버리면 곧 그의 풍부한 상상이 옆에 있지 아니하는 소녀 위로 달려, 다시 만나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는 이 의외의 기만의 이유를 언제든지 사정의 결함 가운데 찾으려 하였다. 최후에 만났을 때 그는 이미 성숙한 공상에 이끌려, 그가 아직 회의懷疑하고 있던 그의 연인을 최고의 완전성에까지 높여 놓았었다. 그리고 작별한 후 이 완전치 못한 완전성을 그는 생사를 도賭하던 절대적 완전성과 비교하여 보고는 아주 실망하여 마침내 창에서 몸을 던져 버린 것이다. 그 후 그는 바보가 되어 오랫동안 살았다. 그리고 그 추락에서 얻은 것은 영의 망각, 사고력의 망각, 만나도 알아보지 못하는 연인의 말의 망각이었다. 소녀는 간청도 받고 위협도 받았으나 그와 결혼하여 그에게는 이렇다 할 아무런 보람도 없이 수년 후에 죽고 말았다—

 인생은 이 소년과 방불하다. 우리는 인생을 꿈꾼다. 그리고 그것을 꿈꾸기 때문에 인생을 사랑하는 것이다. 인생을 살려고 하여서는 아니 된다. 인생을 살려고 하면 이 소년과 같이 치둔痴鈍 가운데 몸을 던지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물론 이 소년과 같이 돌연히는 아니라고 하여도, 왜 그러냐 하면, 인생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우리의 알지 못하는 뉘앙스로 차차 하강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열 살쯤 되면 사람은 벌써 꿈을 확인치 아니하거나 꿈을 아주 버리거나 한다. 그리고는 소와 같이 그 때 그 때의 먹을 풀을 위하여 살아간다. 그러나 죽음과의 결혼에서 우리의 의식적 불후성이 탄생할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를 누가 알리요?



[소년이 소녀의 실체를 발견하고 절망한 나머지 창밖으로 몸을 던진 후 바보가 되어 살았다는 것은 애인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고 난 후 일상적인 삶을 실망과 환멸 속에 무감각하게 살아가야하는 생의 슬픈 현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어 주고 있습니다.

 "바다"는 삶을 겁게 살아 본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을 하고 생에 숨겨진 신비스러운 현실에 놀라움을 느낄 것입니다. 아름다운 지난 일은 그것이 상처 입은 것이라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기억 속에서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상처 입은 조개가 바다 속에서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진주가 되듯이 말입니다. 베르그송의 철학에 영향을 입은 프루스트는 “인간은 그의 기억들이 말해준다”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디시 말하면, 그는 존재를 기억으로 전달하려고 했습니다.]-김태길 교수 해설






* "생 떽쥐베리"의 "어린 왕자"-


"안녕."/"안녕, 넌 누구니?"/"난 여우야."/"여우야. 이리 와서 나와 놀지 않을래?"
"미안. 너랑 놀 수 없어. 네게 길들여져 있지 않으니까."/"길들인다는게 무슨 뜻이야?"
"그건 관계를 만든다는 뜻이야."/"관계?"
"그래, 관계. 우린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봐봐. 넌 아직 내게 수많은 다른 소년들과 다르지 않아. 지금 난 널 필요로 하지 않고 너도 날 필요로 하지 않지. 너에겐 난 그냥 평범한 한 마리의 여우일 뿐이지. 하지만 네가 날 길들인다면 난 네게 온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거야. 관계를 맺는거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난 다른 발자국 소리와 너의 발자국 소리를 구별할 줄 알게 될거야. 다른 발자국 소리는 나를 땅 속으로 숨게 만들테지만 너의 발자국 소리는 나를 땅 속에서 나오게 만들거야. 그리고 저기 밀밭이 보이니? 사실 밀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야. 난 빵을 먹지 않거든. 하지만 밀은 금빛이고 넌 금빛머리칼을 가졌으니까 난 밀밭을 볼 때마다 네가 생각날거야. 결국엔 난 밀밭사이를 스쳐가는 바람소리를 사랑하게 되겠지.
언제나 같은 시간에 와줘. 예를 들면 네가 오후4시에 온다고 하면 난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거야. 난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아마 4시가 되면 흥분해서 안절부절못할거야..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 알게 되겠지." 




*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의 "아미엘의 일기"// 고독과 창작에 대해


-인생은 짧다. 우리의 일생을 다 바쳐도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도 부족하다.
-우리의 내면이 기분이나 감정에 치우치지 않도록 날마다 규칙적인 정신 수양이 필요하다.
-정신은 날씨와 같다. 구름이 모이면 비가 되듯 번뇌가 모이면 고통이 따른다.
-나는 나를 이해해 줄 것 같은 사람에게만 우정을 요구해 왔다. 지식을 소중히 여길 것 같은 사람에게만 대화를 신청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나의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상을 나에게 맞출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제삼자가 나의 마음을 이해해 주기 전에 내가 먼저 이웃의 속내를 이해해 줘야 한다.
그것이 성실이다.


-일기는 고독한 인간의 위안이자 치유자이다. 날마다 기록되는 이 독백은 일종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영원과 내면의 대화. 신과의 대화이다. 이것은 나를 고쳐주고, 우리를 혼탁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일기는 자기처럼 우리에게 평형을 되찾게 한다. 일종의 의식적인 수면이고 잠재된 행동이다. 의욕도, 긴장도, 모두 멈추고 우주적인 질서 속에서 평화를 갈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유한의 껍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일기을 쓰는 행위는 펜을 든 명상이다(51세).


-이젠 한 자루의 펜도 무겁다. 평생 나와 함께해준 고무운 펜인데 너마저 이젠 떠나보내야 할 것 같다. 시간은 여전히 흘러가고, 내 생명의 촛불은 이제 꺼질 날만 기다린다. 인생의 수많은 기다림 중에  죽음만큼 더디게 오는 것이 있을까.

나에 대한 동정과 근심은 날이 갈수록 더해진다. 이웃이 꽃과 젤리, 편지와 우정의 증표를 보내왔다. 난 그들의 삶을 어리석다고 비난했는데, 그들은 한 노인의 죽음 앞에서 끝까지 예의를 잃지 않는다. 퍽 먼 곳에 사는 친구도 일부러 찾아와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들도 곧 나와 같은 자리에 눕게 될 것이다.

수양딸이 내가 잠든 사이에 찾아온 사람들을 말해주었다. 그녀는 지금 이 집의 집사이며, 내 비서다.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3개월 전부터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나를 간호하고 있다. 이승에서의 마지막까지 사람의 손길에 의지한다.

왜 좀 더 다정하게 그녀를 대해주지 못했을까.

왜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 따뜻하게 건네지 못했을까.

타인과 함께할 수 없었던 이 생애는 종말에 이르러서도 후회뿐이다.(60세)===60세에 죽음


* 나의 시에 대해

*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 중  마지막 구절


24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거대한 대기는 내 책을 펼쳤다 또 다시 닫는다.

가루가 된 파도는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

 

날아가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숴 버려라

돛단배들이 먹이를 찾아다니는 이 잠잠한 지붕을!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 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삼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앞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뭇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