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시 모음> 고명의 '촛불의 노래' 외
+ 촛불의 노래
때로 내가
불빛으로 너울너울 흔들릴 때
그것이 감출 수 없는 내 뼈의 노래요
살의 몸부림인 줄을
그대는 아시는가요
하나의 별로 빛나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
밤의 사막을 달려와야 했는지
비 그친 하늘처럼 눈부시게
그대 속의 어둠을 닦아낼 수만 있다면
내가 한나절 들꽃처럼
세월 속에 어린 등불 하나
잠시 비추다 갈지라도
그것이 내 목숨의 향기인 줄을
그대는 아실른지요
(고명·시인, 전남 광주 출생)
+ 촛불
촛불!
심지에 불을 붙이면
그때부터 종말을 향해
출발하는 것이다.
어두움을 밀어내는
그 연약한 저항
누구의 정신을 배운
조용한 희생일까.
존재할 때
이미 마련되어 있는
시간의 국한을
모르고 있어
운명이다.
한정된 시간을
불태워가도
슬퍼하지 않고
순간을 꽃으로 향유하며
춤추는 촛불.
(황금찬·시인, 1918-)
+ 우리 가슴에 촛불 하나를 켜요
나는
당신 앞에
촛불 하나를
이런 마음으로 밝힙니다
기도의 마음으로
감사의 마음으로
사랑의 마음으로
은혜의 마음으로
축복의 마음으로
이 마음
따뜻하게 받아 주옵소서
(채바다·해양 탐험가 시인)
+ 촛불의 기도
하느님을 알게 된
이 놀라운 행복을
온몸으로 태우며 살고 싶어요
그분이 주시는 매일매일을
새해 첫날처럼 새로운 마음으로
언제나 설레이며 살고 싶어요
하늘 향해 타오르는
이 뜨거운 불꽃의 기도가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도록
이웃을 위해서도 조국을 위해서도
닫힌 마음 열겠어요
좁은 마음 넓히겠어요
내 키가 작아 드는 아픔을
내 몸이 녹아드는 아픔을
두려워하지 않겠어요
하얗게 물이 되는
따스한 물이 되는
겸손한 맘으로 살고 싶어요
흔들리는 바람에도
똑바로 눈을 뜨며
떳떳하게 살고 싶어요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기도 - 촛불 연가·16
갈대보다 더 약한 것은 이슬이고
이슬보다 더 여린 것은
콧바람 한줄기에도 곧잘 출렁거리는 촛불 그대라지만
그 불길로 세상의 모든 바다와
우리들의 수미산을 태워 녹이는 비법을 가르쳐주십시오
그대의 가슴으로 이 늙은 가슴을 끌어들여
타오르게 하곤 하는
실같은 바람 한줄기에도
꺼지곤 하지만 결코 제 가슴에선 꺼지지 않고
타오르곤 하는 그 비법을 가르쳐주십시오.
(한승원·시인, 1939-)
+ 촛불
누구나 마음의 빈 공간을 채울
그 무엇이 필요하다
사랑의 아픔과 그리움으로
마음을 채우는 이는 행복하다
나의 마음은
그대 향한 사랑으로
온통 채워졌고
촛불이 제 몸을 녹여
어둠을 밝히듯
나의 몸과 마음을 태워
그대의 아픔에 희망의 불씨를
심어 주고 싶다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대를 위해
그대의 빈 가슴에
꺼지지 않는 촛불로
남고 싶다
(손선희·시인)
+ 촛불 앞에서
온종일
당신 생각에
몸이 까맣게 타버렸습니다
지난밤에도
당신 생각에
온몸이 조금씩 흔들렸습니다
당신이여
오늘은 바람이 불고
저는 남몰래 울고 싶습니다
당신을 기다려야 하는
당신 침묵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나는
새벽이 올 때까지
꺼지지 않는
불빛으로 있어야 했습니다
(권태원·시인, 1950-)
+ 촛불에 관하여
타오르세 타오르세
눈물일랑 어쩔 수 없는 눈물일랑
부디 그대 안에 숨기지 말고
어차피 제 한 몸 태워 메워야 할
저 암담한 혼돈이라면
저 아득한 약속이라면
되도록이면 쓰디쓰게 마시기로 하세
좁은 어둠 내 몸으로 밝히고 나면
그 심연의 암흑은 뿌리 없으리
마지막 한숨까지 태우고 태워
오로지 나의 것은 태워 버리세
한 줌 재로 끝까지 태워 버리세
그 재로 하여 우리 사랑 완결되기를
내 기다림의 끝까지
그 그리움의 섧고 섧은 대평원까지
눈물일랑 그대 안에 숨기지 말고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말없이 나를 태우세
(홍수희·시인)
+ 촛불시위
노오란 눈빛들이
수천 개의 함성을 달고
광장에 나서면
너는 출렁이는 물이 된다
폭포가 된다
소리 없는 분노를 끌고
지구가 닿을 수 있는 행성마다
불을 지피고
문고리 걸어둔 문간마다
노오란 꽃불을 심어놓고
사람 속으로 스며든다
작고 어두운 방에서
몸을 태워
빛이고자 했던 꿈들이
종이컵 안에다 세상을 밝히고
저리 흔들리고 있구나
(정군수·시인, 1945-)
+ 촛불의 율동
나는 섬에 오면 촛불을 켜 놓고 시를 쓴다
오늘밤에도 열한 자루의 촛불을 켜 놓고 시를 썼다
내가 촛불을 좋아하는 것은
노란 불꽃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인다는 것
내 입김에 따라 움직이는 것도 같고
나보다 전에 들어온 바람과 내통하는 것도 같고
어쨌든 누군가에 의해 흔들리고 있는 연약함
그로 인해 움직이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촛불이 살아 있음이다
자율이든 타율이든 율동은 아름다운 생명의 표출이다
아마도 자기가 만든 빛에 미쳐 신바람이 나는지도 모를 일
분명 누군가와 내통하는 춤이기에
내가 시기어린 눈으로 사방을 둘러본다
(이생진·시인, 1929-)
+ 촛불 앞에서
우리 모두
당신 앞에
숙연히 고개 숙입니다.
흰 살 저며 불 밝히는
당신으로 인해
우리들이 존재함을 깨닫고
당신의 소멸로 인해
점점 어두워짐을 깨닫습니다.
당신 몸에서 내리는
하얀 촛농이
우리들의 뜨거운 눈물입니다.
당신이 타는 이 밤
왜 이리 짧기만 합니까.
하나하나 우리의 얼굴을
분별하시는 당신의 불빛
가슴에 와 닿을 때
우리들의 눈앞이 흐려집니다.
마지막 몸을 태우며
당신이 주시는 말씀
가슴에 깊이깊이 새겨 둡니다.
(박덕중·시인, 1942-)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