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쓰기

장길동전

골뫼사니 2019. 11. 21. 11:51

장길동전


그와 나는 공통점이 몇 가지 있다.

나이가 같고 태어난 곳이 같고 초등학교를 함께 다녔고 아침반 오후 반으로 학급이 갈려 수업을 할 때 같은 ㅇ오후 반이었거나 오전 반이었기 때문에 마을의 다른 친구들보다 그가 나와 동무했던 생각이 많다. 그리고 그는 훗날 나와 같은 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교사였고 어머니 두 분께서 신앙공동체인 동광원 운동에 참여하셨으며 훗날에 구원파에 속하는 교파에 교인이셨다.

그와 나는 다른점이 또한 몇 가지 있다.

그는 교회 목사이고 나는 여전히 교사이다. 그는 교사일 때 삶의 변화를 꾀했고 목사가 되었다. 그는 신앙 생활을 했고 나는 신앙 생활이 아니라 진보 운동 곁에 있었다. 그는 정신을 꾀하고 나는 정신과 물질을 통합하여 사고하려고 한다.

그의 가정은 넓진 않았지만 마당이 있었고 집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나는 소유하고 있는 정원도 집도 없었다. 집은 큰집 마당 앞 대문 옆에 큰집 땅과 공유지를 침법한 곳에 조그만 오두막집이 우리 집이었고 공유지 우물가가 우리 집 마당이었다. 그곳에 나무를 해다가 쌓아두었고 우물 옆에는 담을 쌓아 장독대를 만들었다. 그는 떠벌이고 나는 까불이였다.

그의 어머니께서는 매우 결단지셨다. 어린 자녀들을 집에 두고 혼자서 종교 단체에 들어가 봉사 활동을 하셨다. 집안 살림은 시어머니께 맡기고서. 그의 할머님께서는 찐빵을 만들어 머리에 이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시면서 장사를 하셨다. 나는 그 진빵의 맛을 떠올릴 수는 없지만 언젠가 한번은 할머니께서 주신 빵을 먹었을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의 아버지는 고등학교 다닐 무렵 영화 닥터지바고를 보고 난 뒤에 나는 나오는 영화 주인공 오마 샤리프를 닮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커 보이던 키와 들어간 눈, 뾰죡한 코 등이 닮았다고 느꼈다. 그의 부친은 들은 바에 의하면 노름을 좋아했다고 한다. 술을 잘 마셨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초등학교 몇 학년인가 그 어느 때에 돌아가셨다. 꽤 이른 나이에 돌아가신 듯 싶다. 우리 아버지와 함경도 쪽으로 징용을 가셨을 때 우리 아버지는 철도에 철길을 베개로 삼아 잠이 들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를 깨워서 살렸다는 말을 어머니께 들었던 적이 있다.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의 부친과 우리 아버지는 아마도 한 열 살쯤은 차이가 날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 어머니와 나이 차이가 20살이었고 우리 어머니와 그의 모친은 우리 어머니가 한, 두살 더 먹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의 모친이 집을 나가 수도원의 폐결핵 환자들을 보호하는 일을 하러 갔을 때 그의 집에 자주 갔던 것 같다. 방이 두 칸 부엌이 한 칸 작은 방에 군불 때는 아궁이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토방. 집은 마당 보다는 1미터 정도 높았다. 집은 7,8평 정도로 뒤안에는 감나무가 있었을 것이다. 작은 방 뒤 벽에 붙어 있는 닭장에는 닭을 키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 닭장을 기억하고 그 닭장에 있는 닭이 어떻게 삵에게 잡혀 먹는지를 어린 시절에 알게 되었다. 어둠이 내리면 삵은 조심스레 이 마을 뒤편 대나무 숲으로 숨어 들어와 이 집 뒤란에 벽에 붙은 닭장을 벼라별 수를 내어 들어가 잠든 닭의 똥구멍을 간지럽히고 그러면 닭은 기이한 꿈 속에 들어 깨어있어도 깨어 있지 못하는 몽유의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삵은 점차 똥구멍으로부터 창자를 자츰차츰 꺼내어 먹고 이윽고 닭이 쓰러지면 닭이 우는 소리도 못 낸 상태로 물어간다는 이 마을 전설을 떠올리는 것이다.

집 앞 마당에는 놀 수 있는 공간의 여유는 거의 없었던 같다. 20평 남짓한 밭에 채소가 심겨 있고 뜰 남동 끝에는 푸새식 화장실이 있었다.

그는 무인가 중학교-그때는 말간중학교라고 알려진 학교인데 중학교 3년을 마친다 해도 다시 검정고시를 봐서 합격해야 중학교 졸업장이 주어지는-에 입학했고, 나는 동네 아이들 -여학생들은 몇 사람 제외하고 거의 진학했지만, 남자 아이들은 세 사람 만이 중학교에 진학했다-은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타지로 떠나거나 거리를 전전했지만 나는 어머니의 높은 교육열로 인해 뺑뺑이 두 해째 보통 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녀석은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고등학교는 그나 나나 야간학교을 택하게 되었다. 그는 근처의 실업계 상업과에 진학했고 나는 공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 당시에는 공업계 고등학교가 꽤 인기있는 곳이었다.

그와 나는 야간학교에 다녔다.

그때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셨다 하는 선생님께서 중풍으로 치료차 수도원이 운영하는 요양원 시설에 요양하고 계셨다. 아마 그의 모친의 소개였을 것이다. 그와 나는 그의 친구 두명 합하여 4명이 선생님께 낮에 한 20분 걸으면 도착하는 요양원으로 가서 영어 수업을 들었다. 나는 끈기있게 견디는 성격은 아니어서 곧 그만 두었지만 그는 아마 오래도록 영어 수업을 들었을 것이다. 그 결과로 인해 훗날에 대학 입시에서 좋은 점수를 맞았을 것이고 대학에서 장학금도 수령할 수 있었을 것이다. 평생 장학금 한 번 받지 못하는 나와는 그는 달랐다.

그는 군대를 다녀와서 직장에 취직했고 그리고 나에게 용돈을 주었다. 그것을 나는 잊지 못한다

광주민주항쟁이 일어나고 1년을 학교에 나가지 않은-죄책감이었는지 정신적 충격으로 벗어나지 못했는지 나는 학교를 휴학했고 그 이듬해 나는 복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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