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쓰기

볼펜

골뫼사니 2019. 9. 20. 09:54

볼펜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볼펜이다. 종이 위를 제 마음대로 굴러가지 못하도록 내 손가락은 볼펜의 몸통을 꽉 잡고 있다. 볼펜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한다. 볼펜 심 안에는 우주에 떠 있는 여느 별처럼 회전 운동을 하는 작은 볼이 있다. 잉크를 온몸에 묻힌 채 볼은 구르고 또 굴러 인간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기여해 오기도 왔다. 그러나 그는 아무데나 굴러갈 수는 없다. 그는 볼을 가둔 철제 감옥 속에 있음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철제 감옥은 누군가의 생각에 의해 움직여지는 손에 의해 자물통이 풀리고 비로소 굴러갈 수 있다.

나는 지금 편지를 쓰려 하고 있다. 한 페이지를 채우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지만 펜을 잡았다. 그러다가 편지에 쓸 내용이 떠오르지 않아 이 볼펜에 대해 쓰고 있다.  같은 물건은 아니었지만 중학교 시절부터 이런 볼펜을 나는 사용했을 것이다. 분명 사용했다. 초등학교 시절에 볼펜을 사용하는 것은 글씨를 바르게 쓰는 습관을 들이지 못한다는 이유였을 것이다. 흰 집에 검은, 파란, 빨간 색 잉크가 담긴 볼펜을 처음에는 신기해 여겼던 시절이 아마 중학교 1학년 때였을 것이다.

이런 저런 볼펜으로 나는 공책을 정리하고 숙제를 하고 책에 밑줄을 그었을 것이다. 그리고 때로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을 적어보기도 하고 내 영혼이 느끼는 떨림을 일기에 옮겨 놓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볼펜이 쉬는 시간이 내 인생의 99%를 차지하면 할 수록 내 영혼은 순간순간의 고통과 쾌락 속에 소진, 핍진해갔을 것이다. 볼펜이 수고로운 노동으로부터 해방되고 그 본질인 쓰임으로부터 소외돼 책상 서랍 속이나 필통 속에서 잠들어 있을 시간이면 나는 정신을 어느 먼 섬으로 유배시키고 그 아름다운 그 소중한 시간들과 이별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릴 적 숙제를 안하거나, 그날 써야 할 일기를 방기하거나, 시를 써보려 노력하지 않거나 하는 실로

정신이 처연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볼펜없이 나는 인간 정신의 단련을 포기한 채로 바람에 낙엽이 이리저리 흩날리듯이 나의 인생을 헤맸을 것이다. 지금 나는 아내에게 편지를 쓰려고 한다. 아내와 있었던 그 많은 일에 대해 정신의 힘으로 정리할 수가 없다. 그래 나는 아내에게 한 줄의 편지도 쓸 수가 없다.

지금 나는 이 볼펜으로 볼펜에 대해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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