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은 양심을 일깨우는 죽비 소리/좋은 생각 나누기

일본 문학인들의 죽음-모든 자료는 인터넷에서 퍼온 글입니다.

골뫼사니 2016. 11. 28. 16:43

기타무라 도코쿠(1868~1894), 가와카미 비잔(1869~1908), 아리시마 타케오(1878~1923),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 다자이 오사무((1909~1948), 다나카 히데미쓰(1913~1949), 미시마 유키오(1925~1970),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072), 에토 준(1933~1999)

 

가와바다 야스나리

“지방의 경계에 있는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나라(雪國)였다. 밤의 밑바닥까지 하얀 색이었다.”

일본의 서정주의 작가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대표 중편소설 <설국>은 도입부분부터 허무주의적 서정이 물씬 묻어난다.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소품은 눈이다. 눈으로 뒤덮인 니가타의 한 온천마을을 무대로 한 이 작품이 주제가 무엇인지도 뚜렷하지 않은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은 바로 눈 때문이다. 상황마다 변화하는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삼각관계의 감정이 마치 살아 움직이듯 꿈틀거리며 쓸쓸한 사랑과 삶이 가지는 슬픈 숙명을 전달해 준다.

가와바다는 이 소설을 10년에 걸쳐 썼다. 그는 1968년 이 소설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동양인으로서는 인도의 타고르에 이어 두번째였다.

1899년 오사카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와 누나, 조부모를 모두 어린 시절에 잃은 불행한 개인사를 갖고 있다. 그가 유년시절 겪었던 슬픔과 고독, 허무감이 그의 성격은 물론 작품에도 커다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가 죽기 전까지 발표한 100여편의 작품들은 모두 사물에 대한 비관과 고독으로 점철돼 있다. 그러나 그는 생명체가 가진 숙명과도 같은 슬픔을 치열한 서정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피폐해진 전후(戰後) 일본의 사회 분위기도 그의 세계관과 비슷했다. 태평양전쟁에서 참혹하게 패한 군국주의 국가 일본은 모든 것이 파괴되고 민족적 자존심마저 미 군정에 의해 무너졌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 같은 고단한 현실에서 벗어나 탐닉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 헤맨다. 그가 묘사한 ‘지방의 경계에 있는 긴 터널’은 그를 비롯해 삶의 지향점을 잃은 일본인들의 일상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그 터널 밖에 있는 순백의 눈세계를 탐닉하길 열망했다.

근대 일본 문학사에 불멸의 족적을 남긴 그는 1972년 4월16일 작업실에서 가스관을 입에 문 채 의문의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제자인 극우적 성향의 탐미주의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가 자위대 동부방면 총감부에서 할복자살을 한 것이 그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하지만 그가 돌연 스스로 생을 저버린 행위는 긴 터널 끝에 있는 극단적 미학의 실체를 작가로서 최상의 영예를 누린 뒤 비로소 발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기타무라 도코쿠(1868~1894),

1894년 5월 16일 25세의 젊은 메이지시대의 문학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낭만주의 문학운동의 선구자였던 ‘기타무라 도코쿠’였다. 1868년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거쳐 근대로 접어들었고 그 20년 후 청일전쟁의 전운이 감도는 시기였다. 변화하던 시기, 순수하게 이상적인 현실을 추구했던 이 낭만주의자 ‘기타무라 도코쿠’는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끈을 놓아 버렸다. 낭만주의 문학 뿐 아니라 사회주의 계통에까지 많은 영향을 끼친 ‘기타무라 도코쿠’, 그가 남긴 낭만주의 문학의 흔적에 대해 찾아보고자 한다.

본론
1. 낭만주의 문학의 시작
해방과 자유의 정신이 전근대적 전통과 타협하여 생긴 의고전주의에 대항해 관념적으로 개인의 자아를 해방하려 한 것이 낭만주의이다.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걸쳐 유럽중심으로 나타난 이 문예사조가 일본에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1890년대이다. 일본의 낭만주의는 전기·후기·신낭만주의로 나눌 수 있다. 메이지기의 낭만주의는 자유주의와 기독교적 정신 등이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기독교를 두고 새로운 문예세계를 주도한 것이 기타무라 도코쿠이다. 독일 유학파 모리 오가이에 의해 낭만주의가 최초로 시작된 것은 사실이나, 실질적으로 낭만주의 운동을 앞장 선 것은 기타무라 도코쿠라 할 수 있다. 봉건적인 겐유사가 문단을 지배하던 시기에 기타무라 도코쿠가 시마자키 도손 등과 함께 동인지 문학계(文?界)가 창간된다. 이 문하계의 동인은 기독교를 품은 낭만주의 작가들로서 자아해방, 통일적 삶의 실현, 초현실적인 것에의 동경으로 낭만주의 운동의 전개가 시작되었다.

 

 가와카미 비잔(1869~1908),

 

죽음에 대한 단상 –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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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단상 —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죽음이야말로 가장 궁극적인 이별이다.
죽음이란 사전적으로는 생물의 생명이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생명의 탄생과 죽음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생명의 기원이 언제부터인가는 아직도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지만 죽음의 기원은 명백하다. 죽음은 생명과 함께 시작된 것이다.
문학적으로는 죽음이란 모든 것이 무너지거나 사라지는 고통과 허무함을 상징한다.
1768년에 발행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초판에서는 죽음에 대해 (영혼의 존재와 그 불멸성을 전제로) ‘영혼과 육신의 분리’로 정의했지만 2007년 판에서는 ‘모든 생물이 종국에 경험하게 되는 생명이 완전히 중단되는 현상’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면 언제 생명이 완전히 중단되는가? 이 문제는 죽음의 본질과 관련해서 죽음이란 신체적 기능이 완전히 정지되었을 때인가 아니면 인지적 (또는 인격적) 기능이 완전히 정지되어 있을 때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에는 양자는 일치하지만 양자의 시간이 어긋났을 때 쟁점이 되는 것이다. 정통파 유대인이나 독실한 기독교 근본주의자 등은 생명을 연장하는 보조 장치의 이용 여부와 상관없이 심장이 멈춰야만 죽음을 인정하는데 반해서, 오늘날은 뇌사 상태, 즉 재생이 불가능한 혼수상태를 사망의 새로운 기준으로 삼고 있다.

죽음과 자살.
자발적 죽음. 자기 살해. 자신을 없애는 행위. 자신을 살인하는 행위. 자살보다 인간에게 고유한 것은 없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행위는 시련에 대해 굴복한 때문인가, 아니면 자신의 인생에 대한 인간의 궁극적 지배 또는 자유의 가장 지고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자살은 존엄한 죽음의 상징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가끔 자살을 생각한다. 우리가 종종 마음에 품었던 자살의 충동이란 게 사실은 삶을 더욱 충만하게, 더욱 잘 살고 싶다는 필사적인 희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복수심 때문에 화가 나서 자살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자살은 자신의 분노와 복수심을 보여주는 하나의 방식이다. 누군가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고. 그러나 그 자살은 어리석은 짓이다. 누군가는 죄책감은커녕 내심 얼마나 고소해할 것인가.)
자살은 타살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죽음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에 관한 그들의 성찰을 살펴보자.
고대 그리스의 비극작가인 소포클레스는 말했다. “이 세상에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최선이다. 만약 태어났다면 하루라도 빨리 원래의 장소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좋다.”
로마의 작가 리바니오스는 자살에 대해 노골적으로 권유했다. “더 이상 생을 지속하고 싶지 않은 자는 원로원에 사유를 고지하고 허가를 받은 후 생을 저버릴 수 있다. 자신의 존재가 저주스러운 자여, 운명과 술, 독이 당신을 압도한다면, 죽음을 택하라. 비탄에 빠진 자여, 생을 포기하라. 불행한 자는 그의 불운을 털어놓아도 재판관은 구제책을 내놓지 못할 것이니 그의 비참한 삶은 종말을 맞이하리라.”
개인의 지고한 가치를 인정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는 스스로 생사를 결정할 수 있다고 본 스토아학파, 삶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지겨워지면 조용히 자살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한 에피쿠로스학파, 기타 키레네학파, 키니코스학파는 자기 살해에 동의하였다. 그리고 스토학파의 강한 영향력 아래 있던 고대 로마사회는 개인의 반사회적 행동을 엄격하게 금기시하면서도 개인의 자유표현을 찬양했기 때문에 자살에 아주 호의적이었다.
반면에 피타고라스학파는 영혼은 원죄의 결과 육신에 갇혔기 때문에 끝까지 살아서 속죄를 하여야만 한다고 주장하며 자살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플라톤 역시 그걸 부정하였다. 그가 말했다. “사람은 자신이 갇힌 감옥의 문을 열고 달아날 권리가 없는 죄수다. 그는 신이 부를 때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도 자살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했다. “어려움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은 아주 비겁한 짓이다. 자살이 죽음을 무릅쓰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려움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일 뿐이다.” 의사인 히포크라테스는 말했다. “의사는 환자가 요청하더라도 치사 약물을 처방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그러한 약물을 권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그리스나 로마의 의사들은 이에 개의치 않았으니 자살과 안락사가 그 시절 널리 유행하였다.
자살이나 안락사는 4세기경에서야 기독교 시대가 도래하면서 신성 모독으로 간주되었다. 신약이건 구약이건 어디에도 자살을 금지하는 규정은 없다. 로마법도 자살을 단죄하지 않았다. 그런데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은 ‘살인하지 말라’는 제 5계명은 신성 불가침한 것으로 자기 살해에도 적용된다고 규정하고 절대적 자살 금지를 엄격한 교리로 만들어 기독교 사상의 근본 구조 속에 통합 시켰다. 그 후 1,000여년이 지난 중세 중기 스콜라 학자들도 자살은 극악무도한 살인 행위로 간주하였다. 그러므로 자살은 가톨릭이나 루터교, 영국 국교, 칼뱅교, 동방 정교회 모두에게 악마의 소행에 다름 아니었고, 그들은 심각한 종교적 갈등의 와중에도 그 점에서는 완전히 의견 일치를 보았다.
자살은 동성애와 근친상간과 함께 인류의 가장 오래 지속된 금기 사항이었다. 그랬으니 자살 탄압법 또는 자살 처벌법은 그토록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하고 프랑스 대혁명 이후 20세기에 이르러서야 폐지되었다. 비로소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재량권이라는 기본권을, 자신의 생명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라는 기본권을 회복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문명국가에서도 여전히 자살 교사 또는 방조는 형법으로 처벌 받는다. (우리 형법 제252조 제2항)
하지만 자살을 죄악시하는 이 오랜 전통은 중세를 거쳐 현대까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현대 사회는 여전히 자살을 혐오스럽고 무서운 행동으로 여기고 있다. 자살은 비도덕적인 행동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살은 도덕적으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단테는 자살을 인간에 대한 폭력으로, 스스로의 몸을 해치는, 자신의 육신에게 포악을 저지르는 폭력으로 보았다. 그것은 옳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자살한 영혼들은 지옥 중에서도 푸른 잎이 아니라 불길 같은 색깔의 잎이 매달려 있고 가지들은 구부러져 온통 매듭 투성이이며 열매는 맺지 않고 독성이 있는 가시들만 박혀 있는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숲 속에서 이상한 몰골을 하고 나무 가지들에 매달린 채 괴상한 통곡 소리만 지르고 있다. 이 영혼들은 최후의 심판이 오더라도 그 나무들은 자살자의 육신으로 싹이 돋았기 때문에 육신을 다시 취하지 못하므로 그곳에 그대로 남아있어야 하는 저주스러운 망령들이었다.
역시 우토푸스의 유토피아에서는 안락사는 명예로운 죽음으로 여겨졌지만 자살한 사람은 화장도 매장도 할 수 없었고, 그들의 시신은 아무런 예식 절차 없이 강물에 그대로 던져 고기밥이 되게 하였다.
안락사의 경우에도 그렇다. 과연 안락사는 자비로운 행위인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안락사 시킨다면 그 행위는 그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당신의 고통을 덜기 위한 것인가? 안락사는 불치병을 앓는 이에게 자살을 방조한 행위가 아닌가. 또는 촉탁이나 승낙에 의한 살인행위가 아닐까. 우리 형법 제252조는 이러한 행위를 처벌한다. (의사는 당초 약속했던 대로 그에게 고통을 종결시켜줄 고농도 모르핀을 가져다주었다. 그토록 강력한 의지를 가진, 그러나 운명은 결코 극복 될 수 없다고 믿은 염세주의자,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를 쓰고 삶의 충동과 죽음의 충동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인간, 종교란 결국 강박관념에 의한 신경증의 결과물이라고 단정하고 무신론을 공공연하게 주장하고, 죽음의 순간을 맞이할 때에도 자신은 태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자신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암이 악화되었을 때 안락사를 선택했다.)
그래서 반대론자들은 그 누구도, 그 무슨 이유에서도 무고한 사람, 배아 또는 태아, 노인, 치유 불가능한 환자, 이미 죽어가는 환자의 주검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러한 행위는 신과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생명 존중에 반하고, 인류에 대한 테러 행위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암흑의 세기인 중세 1,000여 년 동안 자살에 대해 교회법과 세속법은, 자살을 인간의 생명은 신에게 속하므로 인간이 자유롭게 처분할 수 없다는 신법과 생존본능이라는 인간의 본성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자연법을 거역한 중대한 범죄로 간주하고, 자살자의 그리스도식 장례를 금했을 뿐만 아니라 사탄의 순교자들은 지옥에 떨어져 영벌을 받는다고 선언하고 또한 실제 끔찍한 시체모독형과 재산몰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누구인들 인생의 어느 고비에서 그것을 한번쯤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너무나 오랫동안, 무려 400년 동안이나 인류가 우려먹었기 때문에 너무 진부하지만, 햄릿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혹은 있음이냐 없음이냐, 존재하느냐 마느냐, 삶이냐 죽음이냐, 살아 부지할 것인가 죽어 없어질 것인가, 과연 인생이란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인간 실존의 근원적 물음을 던지지 않았던가.
우리는 그들의 자살 혹은 미묘한 죽음을 역사적으로 성찰해 보아야 하리라.
스토아학파의 창시자였던 제논, 유물론자 에피쿠로스, 디오게네스의 철학적 자살. 자살을 극력 반대했던 피타고라스학파의 피타고라스가 삶에 염증을 느끼고 단행한 단식 자살. 엠페도클레스는 불을 찬양했고 스스로 신으로 자처하였으니 에트나 화산의 불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져서 영원히 신으로 남으려 했다. 마지막 영혼의 정화.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나 (자살인지 아닌지) 재판 과정에서 의식적으로 도발하고 제자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도주를 거부하며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의 죽음.
독배를 마시고나자 그의 다리에서 죽음의 장미가 파랗게 피어났다.
테르모필레에서 스파르타 전사들의 죽음.
공화국에 대한 절망, 자유의 상실에 상심한 위대한 시민 카토의 자살. 카시우스 브루투스의 자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자살. 종교는 미신과 미망의 원천이라고 한 고독한 시인, 철학자 루크레티우스의 자살. 카토의 자살을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의지적 죽음이라고 찬양했던 스토아학파 철학자, 세네카의 강요된 자살. 스스로 위대한 시인으로 자처했던, 그래서 ‘아아, 위대한 예술가가 이렇게 사라지는구나!’라고 외치고 자살했던 네로 황제.
단테가 지옥에서 만났을 때 그가 이 세상 끝에 있는 바다에서 죽었다고 고백한 오디세우스의 죽음.
삼손의 자기 살해. 사울 왕의 자결. 아비멜렉의 자살.
예수는 종말론적 예언자이었기에 유월절 행사를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면서 이미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으니, “나는 내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리라. 그러므로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고 말을 한다면 예수께서 거룩하게 자살하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예수를 죽인 악마라고 보는 신실한 기독교도들이 지어낸 것으로 보이는, 출처가 미심쩍은) 빌라도의 자살. 마테오가 스스로 무화과 나무에 목을 맸다고 기록한 저주 받을 자의 원형 가롯 유다의 자살. 악의 표상이었던 폭군 헤롯왕의 자살. 그리고 이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순교자들.
서기 67년 로마 장군 베스파시아누스의 갈릴리 점령과 유대인의 집단 자살, 그때 요세푸스의 자살 거부. 서기 73년의 유대인의 마사다 항전과 집단 자살, 그 당시 유대인들의 우두머리였던 엘레아잘의 죽음. 십자군 원정시기인 1065년과 1069년에 일어난 유대인의 집단 자살. 12세기 영국에서, 그 후 1320년과 1321년의 집단 자살. 제2차 세계대전 중 아우슈비츠에서 집단 죽음.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연인들의 자살. (매우 우유부단하며, 그 당시 자살금지 법칙에 얽매어 결코 자살할 수 없었던 중세적 인물인) 햄릿이 느꼈던 자살의 유혹. 비극적 인물들인 맥베스와 오셀로의 자살. 질풍노도 시대, 낭만주의 시대 젊은 베르테르의 자살.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쿠오 바디스의 페트로니우스와 그의 연인 에우니케의 자살. 합리주의자이고 이성주의자이고 자신의 철학을 완성시키는 최종 단계로 자살을 선택한 페르난두 페소아의 테이브 남작.
그가 19세 때 앞으로 10년 만 더 살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나서 29세 때 자신의 약속을 충실하게 지키기 위해 정해진 날 권총으로 자살을 한 프랑스의 무명 허무주의자 시인이었던 자크 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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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려보자. 그는 삶을 사랑했으므로 정말로 죽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햇빛이 찬란했다.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인간들은, 그들은 대체 뭘 원하는 걸까? 그러나 버지니아 울프의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는 1925년 5월 그 찬란한 계절에 창문을 뛰어내렸다.

현대 세계에서 빈센트 반 고흐, 프리디히 니체, 기 드 모파상, 제라르 드 네르발, 슈테판 츠파이크의 자살. 자신이 남들에게 무익하고, 자신에게도 위험하기 때문에 자살을 기도했던 보들레르. (‘나는 정말로 다시 미쳐가는 것이지요……. 다시는 그 끔찍한 시련을 이겨내지 못할 거에요……. 환청이 들리기 시작해서 집중할 수 없지요. 그래서 나는 지금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길을 선택하려고 해요. 당신은 제게 다시 얻을 수 없는 가장 큰 행복을 가져다 주었지요……. 나는 당신의 삶을 더 이상 망칠 수 없어요.’라는 마지막 편지를 남기고) 암울한 시기였던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외투 주머니에 돌맹이를 가득 집어넣고 우즈 강에 들어가 자살한 버지니아 울프. 나치에 쫓겨 스페인으로 향하던 중 피레네 산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발터 벤야민. 1950년 그의 문학의 절정기에 자살한 세자르 파베세. 1951년 7월 채 서른이 안 된 나이에 홀로코스트의 악몽을 극복하지 못하고, 또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환멸 때문에 갑작스레 가스 자살한 타레우쉬 보로프스키. 현대 컴퓨터의 아버지라고 불렸던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 그는 1953년 자신의 남자 친구를 사랑하는 동성애자임을 고백하고 ‘중대 외설행위’라는 죄목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그는 징역형 대신 화학적 거세를 선택했으나 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일 년 뒤 청산가리가 묻은 사과를 한 조각 베어 먹고 자살하였다. 그 시대의 한계와 폭력성이란. 2009년 그 당시 영국 총리는 튜링의 재판에 대해 사과문을 발표하였고 2013년 여왕은 특별 사면을 선포하였으나, 멀쩡한 인간을 살해해놓고 뒤늦게 이게 무슨 짓이람. 러시아의 세르게이 예세닌, 미국 여류 시인 실비아 플레스의 자살. 아나바시스의 시인 파울 첼란의 자살. 마릴린 먼로, 헤밍웨이, 진 세버그, 로맹 가리 (또는 에밀 아자르)의 자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았지만, 그러나 살아남았다는 그 사실만으로 평생 수치심과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다가 40년이 지나서 결국 토리노의 아파트 건물 4층에서 투신하여 자살한 이탈리아의 유대계 작가 프리모 레비. 그는 자살이란 우리 모두가 지닌 일종의 권리라고 하였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자살이 널리 용인 되고 죽음의 미학으로까지 승화 되었던 일본에서, 자신의 생존 자체를 부담스러워 했던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명제와 함께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명제에 집착하여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일군의 일본 작가들, 기타무라 도코쿠, 가와카미 비잔, 아리시마 다케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마키노 신이치, 다자이 오사무, 다나카 히데미쓰, 하라 다미키, 구사카 요코, 미시마 유키오, 가와바타 야스나리, 에토 준. ‘인간 실격’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다섯 번 자살을 시도하여 마침내 정부와 함께 동반 자살에 성공하였으니.
12월 18일 독일 군함 그라프 슈페호가 몬테비데오를 떠나 죽음의 바다로 출항한 사건과 그 선장 한스 랑스도르프의 죽음. 10월 14일 나치 영웅 롬멜의 자살. (1945년 4월 30일의 총소리와 함께)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의 자살. 5월 1일 여섯 아이와 함께 요제프 괴벨스 부부의 자살 (그러나 여섯 아이에 대한 마그디 괴벨스의 행위는 살인이었으니 12살 미만의 어린아이들이 죽음의 의미를 알 수 있었고, 무슨 의지의 힘이 작용했으며, 무슨 의사 결정을 할 수 있었겠는가). 1945년 2월에서 5월 사이 지속된 베를린의 자살 전염병.
독일의 적군파 혁명가 울리케 마인호프의 감옥에서 자살.
가미가제 특공대. 체첸에서, 중동에서 자폭 테러.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일제 암울한 시절에 천재 시인 이상은 27세 때 유명을 달리했고 윤동주 시인은 28세 때 세상을 떠났지만) 진달래꽃의 시인 김소월은 32세 때 아편을 마시고 음독자살했다. 그리고 우리는 1990년대의 봄을 생생히 기억해야 한다. 5월 정국의 수많은 분신과 투신을, (최근 조작된 것으로 판명된) 강기훈의 유서 대필 사건을. 또한 그 이전 전태일의 분신자살을, 그 이후 노무현의 자살을.
그런데 수천억 원을 갈취해서 염치도 없이 떵떵거리고 사는 파렴치한 전직 대통령들 보다는 훨씬 양심적이고 그 이상의 의미를 가졌던 그의 죽음을 우리는 가슴 깊이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말했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항상 더 사랑을 받는다. 왜냐하면 서로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길게 지루하게 싸우는 모습을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들, 갖가지 사유로 일찌감치 삶을 포기한 사람들은 공감을 얻을 수 있고 인간적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더 선호한다.’
그리고 공권력의 폭력에 희생당한 것인지, 자살인지, 알 수 없는 억울한 죽음의 의문사 희생자들, 생활고에 못이긴 수많은 필부, 필부들의 자살을. 그 암울한 시대의 한계와 폭력성이란.

그러나, 데카르트는 ‘어떤 여행자도 돌아오지 못하는 수수께끼의 고장에 가는 게 마땅한 일인가.’ 또한 ‘…… 나는 우리가 진정으로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지만 죽음을 추구해서도 안 된다.’고 하였고, 몽테뉴는 약간 애매한 입장에서 망설였지만 파스칼은 그러한 태도에 경악하며 이교도적인 생각은 용납될 수 없다고 하였으며, 디드로는 ‘백과전서’에서 자살에 대해 적대적으로 설명했고, 몽테스키외는 자살을 옹호하지는 않았지만 자살에 대한 법적 탄압만은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볼테르는 ‘자살은 상냥한 사람들이 할 짓이 아니다’라고 했고, 칼 야스퍼스는 ‘자살은 생을 위반하는 적대적 행위’라고 했으며, 장 폴 사르트르는 자살은 자유의 포기로 보았으며, 알베르 카뮈는 ‘난 죽고 싶지 않아요.’라고 했다.
그랬으니 그들과 거의 모든 염세주의 철학자들과 자살을 미화하고 찬미한 작가들, 시인들, 신비주의자들, 냉소주의자들, 극단주의자들, 세속주의자들, 햄릿과 파우스트, 스탈린과 모택동을 열렬히 숭배했던 파리 센 강 좌안의 지식인들은 결코 자살하지 않았다.

‘배반의 장미’에서 박△△은 산악반 반장으로 명예를 중시했기 때문에 고대 로마인들의 명예로운 자살처럼 손쉽게 강물에 투신하거나 목을 매지 않고 칼로 그어 자살했고 (이 사실은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김규현이 잘 알고 있다.), ‘사랑’에서 비체는 역시 자살을 하려고 했지만 육체와 정신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그는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에 자력으로 죽지 못하고 (성명불상의) 그가 자살 교사나 방조죄, 또는 촉탁이나 승낙 살인죄의 처벌을 각오하고 그 죽음을 도와주었다. (그런데 성명불상자는 그때 스스로에게 증오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그 순간에 비체와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였고, 그를 죽게 함으로서 그 자신을 처벌하길 원했던 것인가.)
그러나 비체는 알고 있었다. 삶의 전부를 잃었을 때, 희망이 더는 없을 때, 삶은 무의미하고 죽음은 의무가 된다는 것을.
‘젊은 날의 초상에서’ 김△△ 병장은 동성애자였고, 그는 스스로 그걸 중대한 정신병으로 간주 하였으며, 그 정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인육을 먹어야 했으니 끝내 자살을 선택했고, 진정한 휴머니스트로 결코 인간을 향해 총을 쏠 수 없었으나 자신을 향해 총을 쏠 수는 있었던, 그러나 사랑을 위해 탈영했던 김○○은 영원히 행방불명되었다.
그리고 ‘사하라’에서 김규현의 죽음을 어떻게 보아야만 할까? 진실은 무엇인가? 건축 설계사로서 그의 강박관념은? 그의 꿈은 실현 가능성이 있었던가? 그는 좌절하여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던 것인가? 다만 그는 마지막 죽는 순간 마침내 자신의 신을 찾았던 것이 아닐까?
그들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자살은 불가사의하다. 죽음은 신성한 것일까? 이보게 신성한 건 삶이야. 내가 지금 더 이상 무엇을 덧붙이겠는가. 배반의 장미에서 이미 ‘배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영혼의 불멸성.
물질주의자 (또는 물리주의자)는 육체만 인정한다. 그러나 이원론자는 육체의 존재는 물론이고 영혼의 존재도 인정한다. 그들은 영혼이란 단지 몸의 배출물이거나 몸의 분비물 정도로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물질주의자는 영혼의 존재를 인정할 만한 타당한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현대의 심리학과 정신의학, 생물물리학은 인간의 내면세계를 가리켜 생각, 마음, 의식, 정신 mind이라고 한다. 그들은 영혼 soul이란 과학적으로 증명이 불가능해서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라고 주장하며 영혼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적극 기피한다.
현대의 뇌신경학이 인간의 뇌 속에는 1,000억 개의 신경세포(뉴런)가 들어있고 이를 연결하는 네트워크의 회선 수만 150조 개를 넘을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는데, 1,000억 개의 뉴런 개수는 우리 은하계의 별의 숫자와 일치한다. 결국 인간의 뇌는 소우주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나 우주에 미만해 있는 암흑물질 중에서 대략 4%정도만 현대 과학으로 규명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 소우주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영혼의 부존재를 증명하기는 한 것인가. 그들은 오로지 과학 만능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이란 측정과 증명이 가능한 것만 다룬다. 하지만 이 광활한 우주, 이 복잡한 인간 세계를 과학으로만 이해와 설명이 가능하겠는가. 과학이 전부가 아니다. 그래서 철학과 종교가 존재하는 것이다. 철학과 종교는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생각과 영혼, 가치를 다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히 누가 영혼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겠는가. 살과 뼈를 가진 인간의 육체 속에는 이 육체가 소멸 된 후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심령적이고 활동적인 어떤 미묘한 요소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실체인 진아 眞我이고 영혼인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영혼이 육체를 벗는 것이고 탄생은 육체를 입는 것이다.
영혼은 형체도 없고 소리도 없고 만질 수도 없으며 사라지지도 않으며 냄새도 없고 맛도 없으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영혼은 위대한 광명의 본체와 떨어질 수 없으며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불변하고 무한한 빛이다. (티베트 사자의 서)
……‘영혼은 밝은 빛’이라고 우리는 말하지만 그것은 모든 언어와 상징 너머에 있네. 영혼은 원래 비어있지만 모든 것을 수용하고 포함하네. (마하무드라의 노래)

나는 바로 나다. 내가 태초의 시작이고 끝이다. 영혼은 자아의 본질이다. 영혼은 나를 대체 불가능한 실재로 만든다. 신을 믿건 아니건 영혼이란 인간에 내재하는 불멸의 존재이다. 나는 항상 내 영혼이 나와 함께 존재하고 나와 함께 삶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음을 믿는다. (그런데 내 영혼은 언제부터 내 육체 속에 깃들었을까? 창세기에 의하면 야훼 신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빗어 만드시고 입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신은 먼저 육체를 만들고 이후 거기에 영혼을 불어 넣었던 것이니, 즉 먼저 육체가 있어야 영혼이 깃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경우에도 기독교적 영혼창조론이나 영혼유전설을 도외시하기로 하고 나의 영혼은 내가 성체가 된 후에, 그것도 인간으로서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었을 때부터 내 몸에 깃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유일신 종교들이 말하는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는다. 터무니없는 소리 아닌가. 그러므로 내가 죽으면 천국이나 지옥 중 한 곳에 가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죽으면 육체는 무덤 속에서 썩어갈 것이지만, 그 전에, 프랑스의 물리학자이자 심리학자인 바라뒤크의 주장처럼 또는 할리우드의 영화 ‘사랑과 영혼’에서처럼, 죽는 순간 영혼은 몸 밖으로 빠져나와 육체에서 분리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육체에 깃들었다가 육체가 죽을 때 함께 죽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영혼은 유령이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단지 시적 표현으로 영혼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영혼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멸의 본질이다.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는 ‘영혼은 영원히 변함없으며 다만 옮겨 다니는 가운데 끊임없이 변화하는 형상을 취할 따름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내 영혼이 그때 유체이탈하면서 공중 부양하는 중에 죽어있는 내 초라한 육체를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을 할지는, 지금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 영혼은 내 육신을 떠난 후 나비처럼 날개를 펄럭이며 여기저기 훨훨 날아다닐 것이다. 그리고 하늘 높이 올라갈 것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이 ‘파이돈’에서, 그 후 데카르트가 ‘성찰’에서 영혼의 존재와 그 불멸성에 대해 논리적 증명을 시도했으나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해서, 그래서 영혼의 존재를 확실하게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영혼은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외적 감각으로 인식할 수 없지만 내적 감각, 즉 마음의 눈으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일원론적 견해는 일종의 인과관계와 결정론에 근거하고 있지만, 이 세상만사가 결정론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건 독자적인 이론에 불과한 것이다. 데카르트는 육체와 정신 곧 육체와 영혼은 이론적인 차원에서 서로 다른 존재라고 주장하면서 영혼은 육체와는 다른 것으로 육체를 초월한 존재로 보았다. 유토피아에서도 모두가 받아들이는 두 가지 엄숙한 신조가 있었으니, 인간의 영혼은 육신처럼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과 이 우주는 목적 없이 표류하는 피조물이 아니라 이를 다스리는 섭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영혼의 불멸성은 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당연히 영혼의 불멸성 여부가 문제가 되겠지만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영혼의 존재는 인정했지만 자연의 다른 모든 존재들처럼 소멸하는 존재, 즉 일시적으로만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영혼이 필멸한다면 영혼의 존재가 왜 필요하겠는가. 영혼은 반드시 불멸의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적 죽음 후에도 살아남아 영혼이 불멸의 존재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독자들이여, 그 입증을 요구하지는 말라. 그건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그렇게 궁금하거든 스스로 자신에게 물어보길. 영혼은 그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 (배화교, 힌두교, 불교, 자니교, 유대교, 그리스도교, 마호메트교 등은 물론이고 심지어 그게 종교인지 의심받고 있는 유교, 아프리카 원시 부족의 애니미즘 신앙까지 모두)는 영혼의 존재와 그 불멸성을 신앙의 기초로 삼고 있다. 그러면 세계의 종교 인구를 고려해보라. 영혼불멸설은 틀림없이 세계적으로 다수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의 오르페우스파와 피타고라스학파는 영혼의 불멸을 믿었고 영혼윤회설을 주장했다. 이 영혼불멸설은 그 후 소크라테스를 거쳐 플라톤으로 계승되었고 플라톤의 관념론과 신비주의는 기독교의 탄생과 더불어 하늘로의 도피를 주장하는 그 교리 속으로 깊이 스며들었다. 파스칼은 말했다. “기독교를 준비하기 위한 플라톤.”
그러나 기독교는 윤회설을 부정한다. 제2차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는 선언하였다. “영혼이 전생에도 존재한다는 미신적인 교리나 영혼이 환생한다는 이상야릇한 의견을 지지하는 자는 누구든지 파문당할 것이다.” 하지만 유대교 금욕주의 에세네파와 바울이 이끌었던 정통 기독교가 이단으로 몰아붙였던 초기 기독교의 그노시스파는 틀림없이 윤회론자들이었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도 윤회 철학을 받아들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영혼이 윤회한다면 사람들이 이전의 삶을 기억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플라톤이 말했다. “인간이 죽으면 지하세계의 왕국인 하데스로 가서 심판을 받고 윤회하는데, 그전에 망각의 강인 레테 강을 건너면서 망각의 물을 마시기 때문에 기억을 잃는다.”
그러나 나는 깨달음이 부족해서인지 영혼불멸설을 확고하게 믿고 있기는 하지만 환생의 개념이나 원리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건 영혼 또는 영혼의 불멸성과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기는 하다. 다만 북방 불교의 심원한 원리는, 만일 우리가 삶과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고 있다면 우리는 이 무한한 우주의 모든 구석을 지배하는 ‘완전한 법칙’이 존재함을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완전한 법칙을 켈트 족의 드루이드 사제들은 ‘존재의 순환’이라고 불렀고, 또 다른 윤회론자들은 ‘필연적인 순환’이나 ‘생과 사의 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내가 선택의 순간을 맞는다면 그때 윤회를 운명으로 받아들일지 아니면 영면을 선택할 수 있을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카르마(업)란 결국 인과응보의 법칙 아니겠는가. 나는 이승에서 좋은 업을 쌓아서 지렁이, 벌레 같은 하등 동물로 환생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어느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서 장차 건축가가 될 남자 아이로 태어나길 바랄 뿐이다. 정녕 그럴 수만 있다면 말이다. (나는 건축설계사가 되지 못하는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기고 있으니까.)

분별력이 없는 사람, 마음이 불안정하고 가슴이 순결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고 다시 또다시 생과 사의 수레바퀴인 이 끝없는 고통의 세계에 태어날 것이다. 그러나 분별력을 가진 사람, 마음이 안정되고 가슴이 순결한 사람은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며 다시 태어남이 없는 세계에 도달할 것이다.
― 카타 우파니샤드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죽음이 찾아와 마음과 몸이 분리될 때 순수해진 영혼은 육체적 욕망의 속박에서 벗어나 천국을 향해 자유롭게 날아갈 것이라고 확신했을까.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 독약과 불의가 마지막 숨결을 앗아갈 때 의연할 수 있었을까. 그는 자진해서 죽었던 것일까. 자신의 고결한 영혼이 불멸하다는 사실에서 얼마나 큰 위안을 받았겠는가.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놀라운 평정심으로 독약을 마시고 태연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는 인류 역사상 위대한 죽음의 장면 중 하나다.
몽테스키외는 말했다. “나는 불멸을 구한다. 그 불멸은 내 안에 있다. 내 영혼아, 드넓어지라. 광대한 영역으로 뛰어들어라. 위대한 존재로 돌아가라.”
김규현의 영혼은 지금도 광대한 사하라에서 떠돌고 있다.

죽음과 운명.
기원전 44년 3월 15일. 음모자들은 재빨리 행동하기로 모의하였다. 그날 카스카가 단검을 꺼내 제일 먼저 카이사르를 찔렀다. 하지만 긴장한 때문인지 카이사르의 목 또는 어깨를 스치는데 그쳤다. 그러자 다른 암살자들이 달려들어 카이사르를 무참히 찔렀다. 그들은 광란 상태에서 마구 칼을 휘두르고 찔러댔기 때문에 암살자가 혼란한 와중에서 다른 암살자의 팔을 찌르기도 했다. 독재관의 몸에는 칼에 찔려 스물세 군데의 상처가 났다.
카이사르는 그가 사랑했던 정부 세르빌리아의 아들이자 그의 양아들이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보자 절망한 나머지 마지막 저항을 포기하고 말했다.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 그리고 독재관은 토가로 머리를 감싸고 쓰러졌다.
그러므로 카이사르의 아내 칼푸르니아가 꾼 악몽, 3월 15일을 조심하라는 점쟁이 푸리나의 예언, 그날 새벽에 로마를 덮친 폭풍우, 수많은 새떼의 비상과 같은 전조도 그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의 죽음은 운명에 의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는 브루투스가 면피용으로 “카이사르에 대한 나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내가 로마를 한층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라고 변명했으리라고 추측했다.

서기 30년 4월 5일 (수요일) 밤. 가롯 유다는 바리세파 제사장들을 만나자 곧바로 말했다. “내가 그를 넘겨주면 얼마를?” 대제사장이 대답했다. “은화 30개” 유다와 대제사장 가야바는 거래를 성사시켰고 유다는 즉시 예수를 넘길 장소를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예수와 제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베다니로 돌아갔다. 4월 7일 (목요일) 예수는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그날 밤 최후의 만찬을 마련했다.
한창 만찬이 진행하던 중에 예수가 말했다.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너희들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예수는 만찬이 끝나고 밤이 깊어지자 다시 제자들을 이끌고 키드론 계곡 건너편 올리브 산 아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갔다. 밤이 더욱 깊어졌다. 굳어버린 고체처럼 짙은 어둠이 온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때 배신자 유다가 성전 경비대를 이끌고 그 동산으로 올라왔다. 그들은 횃불과 등불을 흔들어서 어둠을 해치고 올라왔고 곤봉과 칼로 무장하고 있었다.
유다가 냉담하게 말했다. “나사렛 예수는 안녕하신가?” 그리고 예수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것은 일종의 (역사상 가장 극적인) 신호였다. 내가 입을 맞추는 자가 예수이니 그를 체포하라고 경비대원들과 사전 약속이 되어있던 것이다.
4월 7일 (금요일) 예수는 해골 (라틴어로 칼바리아 또는 갈보리, 아람어로 굴갈타, 그리스어로 골고다, 세 단어 모두 해골 또는 두개골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언덕에서, 2천년 동안이나 인류에게 회자되었으니 우리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바라바 (바라빠)라는 이름의 살인범과 그 공범과 함께 십자가형에 처해졌던 것이다.

이건 아르헨티나 맹인 작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19세기의 시간이 지난 후, 부에노스아이레스 지방의 남부에서, 한 늙은 가우초(목동)가 다른 가우초 일당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되고 그는 쓰러지면서 그 암살자들 중에서 자신의 양아들을 발견한다. 그는 은근한 경외심과 아련한 놀라움 속에서 그에게 말한다. “그렇지만 이 녀석아!”

샤를 드 푸코는 시토회 중에서도 엄격한 계율과 청빈, 영원한 침묵을 유난히 강조하는 트라피스트 수도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수도회의 수사들은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한다.
그는 복음을 알지 못하는 가장 버림받은 사막 부족민들에게 기독교를 열심히 전파하여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고자 열망하였다. 그 자신은 척박한 사막에서 예수의 삶을 사는 유일한 증거자가 되고자 하였다.
1916년 12월 1일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그는, 그날 아침 드 봉디 부인에게 ‘우리들의 무화, 자기 부정은 우리를 예수님과 결합시키고 영혼에 선을 행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방법입니다.’라고 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리고 오후 7시경 그는 침입한 투아레그족 일당에게 은둔소 바깥 자갈밭으로 강제로 끌려 나갔다. 거기에서 무릎 꿇리고 등 뒤로 묶인 손은 끈으로 발목뼈에 비끄러 매어졌다. 그는 그러한 상태에서 움직이지 않고 계속 기도만 하고 있었다. 암살자들은 그를 심문했으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 일순간 그를 지키고 있던 애송이가 발작적으로 그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의 몸은 조용히 기울어져 옆으로 쓰러졌다.
그 순간 그는 애송이의 애처로운 얼굴을 쳐다보면서 기도하였다. “저의 목숨을 바칩니다. 당신께서 제일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저를 살리시거나 죽이시거나 뜻대로 하시옵소서. 당신 안에서, 당신을 위해서, 당신을 통해서, 성모 마리아, 성요셉, 성마리아 막달레나, 저를 구해주소서. 저의 하느님, 저의 적을 용서해주십시오. 그들에게 구원을 주소서. 아멘.”
그는 죽었다. 세누시스트의 투아레그인들은 그의 소지품을 빼앗고, 은둔소 둘레에 있던 개천 속에 그를 던져버렸다.
암살자들은 배신자였다. 배신자. 샤를이 신앙이 없는 사막의 무뢰한이었던 그들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서 그 자신을 잊어버리고 역사했는데도 말이다.

오오! 신이여! 간디가 암살자로부터 세 발의 총알을 맞고 쓰러지며 중얼거렸다. 그게 신에게 살려달라고 기도하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적을 용서해달라고 신께 비는 말이었는지는 지금까지도 수수께끼이지만 말이다.

(……. 단테는 배신자를 가장 중죄인으로 취급하였다. 인류 최초의 배신자는 카인이었다. 그러나 단테는 배신자의 전형으로 카이사르를 배반한 브루투스와 예수를 배반한 유다를 들었다. 그래서 배신자들의 영혼은 어둠과 증오와 영원한 저주의 지하 세계인 지옥에서도 가장 낮고 깊숙한 곳인 ‘주테카’에서 지옥의 마왕인 루시페르에게 가장 엄중한 벌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루시페르 역시 하나님을 배반했다가 천국에서 쫓겨난 천사들의 우두머리로 지옥의 상징이다.)

보르헤스는 말한다. 죽음은 운명이고, 운명은 반복되고, 변형되고, 병립되기도 하면서 계속 확장된다고. 늙은 가우초도, 샤를 신부도 2,000년 전의 하나의 장면이 되풀이되도록 하기 위해 자신이 죽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죽었다.
그리고 가장 최근의 일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도 1979년 10월 19일 밤 그 장면은 또다시 재현되었다. 그날 밤 궁정동 안가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장군은 쓰러지면서 “재규야, 너마저(et tu Jekuya)”라고 중얼거렸을까?
(나의 장편소설 ‘사하라’의 주인공인) (주)공간의 김규현 상무는 누구보다 더 많이 사막을 사랑했고, 투아레그인 이브라함은 뼛속까지 사막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2000년 여름 운명이 그들을 사막의 시커먼 구멍 속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가혹한 운명에 맞서 싸웠던가 아니면 굴복해버렸던가. 김규현은 자기 살해를 하였던 것일까.

죽음의 필연성, 예측불가능성.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인간의 죽음은 필연적이어서 누구도 그 사실을 피할 수 없다.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조상이 지혜의 나무에 열린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하면서부터 죄악이 이 세상을 덮쳤고, 완벽했던 세계에 질병과 죽음이 생겨났다. 우리가 죽는 이유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는 그렇게 죽음의 필연성을 설명했다.) 그리고 인간은 언제 죽을지,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도무지 예측이 불가능하다. 결국 그 모든 것은 운명이 결정한다. 그래서 이것은 수학적 문제가 아니라 철학적 사색의 대상이 되고 종교의 문제가 된다.
그들은 죽음의 본질적 특성인 죽음의 불가피성, 예측불가능성, 편재성을 전제로 말했다. 그리스 정치가였던 크리티아스는 말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죽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살고 있는 이상 불행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사람에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인 것을 냉철하게 간파했다. 그래서 무지한 인간들을 설득하고 위로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삶은 죽음의 시작이다. 삶은 죽음을 위해 존재한다. 죽음은 끝이면서 시작이고, 분리이면서 한층 견고한 자기 자신과의 결합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에 의해 환원이 이루어진다.” 그는 에서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도 말했다. “가장 두려운 악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산 사람에게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은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의 심리학자, 비평가인 H.엘리스는 “고통과 죽음은 삶의 일부이다. 고통과 죽음을 거부하는 것은 삶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라고 말했고, 인도의 위대한 지도자 간디는 “삶은 죽음으로부터 태어난다. 보리가 싹을 틔우기 위해 그 씨앗이 죽어야 하듯이 말이다.”라고 말했으며, 독일의 시인 안겔루스는 시집

 

유중원의 죽음에 대한 단상을 복사해 왔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읽고 싶은 충동 외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리시마 타케오(1878~1923),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

‘인생은 지옥보다 더 지옥적이다’ 라는 말로 일생을 마감한 작가이다. ‘일본 최고의 지성’ ‘일본 최고의 천재 작가’ ‘정교한 문체를 구사한 당대 최고의 장인’이라는 수식어가 쫓아다니는 작가는 그러나 35세의 젊은 나이에 수면제를 다량 복용하고 자살하여 당시 문단계에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작가의 죽음
타이쇼 말부터 쇼와 초기에 걸쳐 두 명의 문학자가 잇달아 자결했다. 1923년에 아리시마 타케오가, 1927년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이 두 사건에서 변화하는 시대의 반영을 읽는 것이 문학사의 설정이다. 분명히 역사라는 커다란 흐름 속에 놓고 본다면 그들의 죽음은 모두 전형기를 살았던 작가 개성의 비극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아쿠타가와의 죽음을 보고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아리시마의 죽음과 연결 지어 논하고자 했던 것도 결코 이유가 없지 않다. 아쿠타가와의 죽음을 보도한 『오오사카아사히신문』은 그 평단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크게 보면 모든 일이 다 시대의 그림자다. 산정이 맨 먼저 서광을 맞이하듯이 문학자의 첨예한 신경은 언제나 가장 빨리 시대의 고뇌를 감지한다. 키타무라씨의 죽음, 아리시마씨의 죽음, 아쿠타가와씨의 죽음, 우리들은 이들의 죽음에서 역시 커다란 시대의 그림자를 느낀다.

*두 작가의 죽음의 영향
이노우에가 예시한 바에 따르면, 카타오카 텟페이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론을 강연하고서 급격히 좌경화했으며, 요코미쓰 리이치에게 있어서도 아쿠타가와의 죽음은 거의 생애의 한 획을 그을 정도의 사건이었다

 

 

천재들의 광기 혹은 우울
시골친구 (caa2203) 08.03.08 16:38

 

미칠 수 있는 기운, 에너지가 광기다.


한번 생각해 본다.

바이런이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기 위해 정신나간 사람처럼 장미 한다발을 들고 시내를 돌아다니지 않았다면, 니체가 "나는 작은 통 속에 들어가서 나의 루(살로메)와 살고 싶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소원이다"며 말년에 광인의 기질을 나타낼 그쯤에, 자신의 철학적 위업을 기억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미쳐가지 않았다면, 내 겨드랑이가 간지러워진다. 날개가 돋아 나오려나 보다며 작은 골방에서 조울증에 시달리던 이상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그들이 미치지 않았다면 우리의 뇌에 각인되는 그 강렬한 시와 철학이 나올 수 있었을까, 생각해본다.

천재와 광기는 불가분의 관계인 듯 싶다.

에드워드 토마스가 "나처럼 우울할 때 정신이 가장 잘 집중되는 사람에게 우울증을 치료한다는 것은 그러한 집중력을 없애는 결과가 될 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그것은 마지막으로 동원해야 할 방법이 아닐까?" 라고 말했듯이 예술적, 천재적 기량을 가진 이들에겐 조울증을 동반한 광기는 그들의 예술적 작업에 일종의 기폭제 역할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몸이 나른하고 업무의 능률이 떨어질 때 일반인들도 박카스나 커피를 마심으로 뇌를 각성시키는데, 이들 천재적 예술가들은 태생에서부터 이미 그들 몸 어딘가에 천부적 예술을 발휘할 각성제와 에너지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정신병리학적인 측면에서 조울증, 우울증, 미약한 정신분열이라는 병으로 판명되는 것이겠지만.

조울증과 우울증은 엇비슷하게 쓰이고 있는 말이지만 다소 다른 증상을 보이는 질환이다. 우울증의 증세는 무관심, 권태, 무력감, 수면장애, 집중력의 장애, 감성의 둔화 등이지만 조울증은 단순한 우울병 환자와는 달리 까닭 없는 흥분상태가 지속되면서 기분이 들뜨고 활동력이 커지며 수면 욕구가 감소하고 말이 빨라지거나 격해지고 주제넘게 되고 이 주제에서 저 주제로 사고가 빨라진다. 조병 환자는 대체로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 생각의 중요성에 대해 확신을 갖는다. 따라서 조병증세가 가벼울 때는 활력의 증대, 과감성, 거침없는 사고 등에 의해 일정기간 동안 매우 생산적일 수 있다.

이런 근거에서 볼 때, 완전히 미치지 않는 가벼운 조울증 증세의 예술가들은 남들이 가질 수 없는 창작 에너지를 늘 품고 있는 행운아들이고 할 수도 있겠다. 애드거 A.포우는 그의 지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당신이 불만을 갖는 '체질적 게으름'을 나 스스로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몹시 게으르기도 하고 아주 부지런 하기도 합니다. 모든 정신 활동이 고문인 때도 있고, 자연과 詩와의 교감이 더할나위 없는 쾌감을 느끼게 할 때도 있습니다. 나는 이런 식을 몇 달 내내 산책하며 몽상에 잠겨 있다가 마침내 깨어나 일종의 창작광이 됩니다. 이때 나는 병이 견뎌내는 한 하루종일 글을 쓰고 밤새도록 글을 읽게 됩니다."

아주 먼 선조 때부터 조울증의 병력을 가지고 있는 시인 바이런의 집안 내력이 바이런의 예술적 기질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바이런의 한 친구는 이렇게 썼다.

"바이런의 마음은 불길이 가득한 화산과도 같았다. 이 화산은 여느 때는 잠잠하다가 갑자기 눈부실 정도로 번쩍였으며 장난기가 서릴 때도 있었지만 늘 위협적이었다. 그의 마음은 번갯불과 같이 한 문제에서 또 다른 문제로 옮겨갔다. 그러면서 격렬한 지성의 진통을 일으킬 때를 보면 실성한 사람 같았다"

바이런의 정부 테레사 귀치올리도 이렇게 말했다

"그분에게서 새로운 비범한 생각이 흘러나올 때는 그의 천재적 불길이 들불에 접한 것같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이처럼 조병이 일으키는 기분, 사고 및 이해의 변화는 창조적인 사고의 특징과 많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연구가들에 의하면 조병 환자들은 보통 사람들이나 정신분열증 환자들과는 달리 사물을 서로 연관시켜 생각하는 데 유난히 뛰어난 재주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서로 상이한 주제의 사상과 사고의 카테고리의 상징성과 유사성을 발견해내고 그것들을 융통성 있게 연결, 새로운 주제를 발견하는 데에 조병 환자들의 불안과 격렬한 감정, 활달한 마음, 생동감 넘치는 감수성, 강렬한 정서적 체험들이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즉, 고도로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의 사고 과정이 약간의 조병기가 있는 증상에 의래 빨라졌다, 늦춰졌다 할 때에는 창조적 과정에 괄목할 만한 질적 향상이 초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조병 환자에게서 보여지는 특성 중의 하나는 마음이 갑자기 관대해지고 사물을 보는 시각이 크게 확대되는 경향인데 이러한 경향이 정열과 결합되는 경우 활달하고 대담한 작품이 나올 가능성이 커진다고 한다. 이렇게 상상력과 모험심이 재빠르고 풍부한 연상력과 결합될 때 위대한 작품이 나올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아무튼, 예술가들을 우울하게 하고 그들의 인생을 지치게 하고 고독하게 하고 가난하게 하는 이런 질병이 오히려 위대한 예술작품을 탄생시키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주장은 아이러니하다.

위대한 예술작품을 탄생시킨 그들만의 질병이 예술을 접하는 우리들에게는 고마운 일일 수도 있겠지만 한 생을 그렇게 버겁게 살다간 천재 예술가들에겐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 신이 내린 가혹한 형벌일 지도 모른다.

일본의 근대 문학의 대표 작가들 중에 아쿠다가와 류노스께가 있다. 나쯔메 소세끼, 아리시마 타케오, 카와바티 야스나리 등과 함께 일본 근대 문학을 주도한 천재 작가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근대 작가 이상과 삶과 예술이 많이 닮아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의 예술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아쿠다가와 문학상은 <유희>라는 작품을 쓰고 일찍 타계한 이양지, 유미리, 이회성 등 재일 한인작가를 배출한 권위 있는 상이다.

아쿠다가와 류노스께는 1892년 태어나 1927년에 자살로서 스스로의 삶을 마감했다. 35년의 짧은 삶을 사는 동안 그는 죽기 전 단, 10년동안 창작활동을 하였는데, 10년 간에 걸쳐 150편 정도의 소설과 그것과 양을 같이 하는 수필, 시, 기행문 등을 발표했다. 창작한 양에서 뿐만 아니라 작품의 질적인 부분에서도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저질러놓고 그는 사라진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아쿠다가와의 집안에도 광증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그를 낳아준 어머니였다. 아쿠다다가와를 출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의 광증이 발병하고 어린 아쿠다가와는 외가댁으로 보내져서 양육되었다. 어린 아쿠다가와는 집안의 이런 내력에 대해선 잘 모르고 성장하였고, 성인이 되어서야 자신의 어머니의 발광과 죽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진실을 알게 된 아쿠다가와는 어머니로부터 유전 받은 광증이 자신의 몸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발광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점―생의 어두운 부분―이 아쿠다가와의 예술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의 일부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평범한 작품과는 구별되는 그만의 독특한 작품관과 세계관을 심어준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병을 거름 삼아 영감 가득한 천재적인 작품을 쏟아내 놓았지만, 결국 그는 그가 운명적으로 짊어지고 가야 할, 두려운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함으로써 스스로의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의 우울과 광증은 그의 삶에 있어서는 독버섯처럼 있어서는 안될 것이었지만 그의 예술을 창조해 내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발효제였을 지도 모른다. 하나의 나약한 인간인 예술가들을 잡아먹고 그들의 삶을 파멸로 끝나게 하지만 그것을 영양분 삼아 위대한 예술작품을 탄생시키게 하는 광기, 혹은 우울, 조울증은 예술가들과 그들이 만들어 내는 창작물 사이를 오가며 생명을 빨아 먹기도, 혹은 나눠주기도 하는 일종의 유기체 같은 것일 게다.

아쿠다가와는 죽음에 관한 생각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죽음 - 실제로 우리는 어쩌다가 죽음의 매력을 느끼기만 하면 그때부터 그 권외(圈外)로 빠져나갈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동심원을 빙빙 돌 듯이 조금씩 조금씩 죽음 앞으로 다가서는 것이다.

삶 속에서 죽음을 극명하게 늘 인식하고 살아가는 점은 천재적인 예술가들에게 공통적으로 찾아 볼 수 있는 점이다. 삶의 평행선에 죽음을 놓고 그것을 끊임없이 주시함으로써 실존적인 삶을 확연히, 뚜렷하게 볼 줄 아는 그런 특이한 비교와 대조법이 체질화된 사람들이 있다. 시간의 한계를 늘 촉박하게 두고 사는 이들은 가능한한 짧은 시간 안에 가능한한 많은 것을 사고하고 많은 작품들을 내어놓고는 스스로는 소멸해 간다. 이런 극도의 긴장과 팽창이 그들에게 우울을, 조증을, 광증을 어떻게 일으키지 않겠는가.

고뇌와 고통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진리라는 것은 늘 고뇌의 그림자를 지니고 있는 것이기에 진리를 이야기 하고자 하는 자는 이 고뇌의 무거움도 기꺼이 끌어안는다.

1830에 태어나서 1886년에 타계한 미국의 여류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생전엔 빛을 보지 못하다가 그의 사후에 난해한 그의 시가 하나씩 해독되면서 세상의 빛을 보기 시작한 작가다. 좁은 자신의 집에 55세동안 독신으로 기거하면서 외부와의 소통은 일절 끊고 살았다. 몸져 누운 병약한 어머니를 오랫동안 간호하면서 그는 자연과 신앙, 사랑, 사람, 그리고 분열된 또 다른 자신의 자아에 대한 견해를 시에 담아 내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평생 흰옷만을 입었으며 죽었을 때도 그 차림새였다. 이 여류시인을 해석하는 시선이 가지가지이지만 좀 다른 시각으로 에밀리 디킨슨을 보고 싶다.

이 감수성이 예민한 여류시인의 주변엔 유달리 죽음이 많았다. 아버지의 죽음을 비롯해, 가까운 친지들의 죽음, 마을을 휩쓸고 간 전염병으로 인해 이웃들의 죽음을 목격해야 했다. 그녀는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운명을 목격했으며 그 존재함-죽음의 존재함-을 삶 속에서 굳이 떨쳐내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또렷이 보였을 것이다. 산다는 것의 한계가. 시집을 가고 아이를 낳고 남자의 사랑을 받고 하는 따위가 이 영특한, 천재성이 있는 여자의 눈에는 다 부질없는 짓으로 보여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녀의 집, 오래된 그녀의 아버지, 어머니의 집에 평생 숨어살면서 시라는 환풍구를 통해 조금씩 아껴가며 호흡했을 것이다. 공간에 갇혀 있는 생활은 그녀에게 우울과 고독을 늘 안겨 주었을 것이고 그럴 때마다 그는 시를 통해서 신의 존재를, 자연의 친화를, 사랑의 고독을 혼자서 나직이 읊은 것이다.

마음 깊은 곳으로의 침잠과 인간 본연의 우울은 그녀로 하여금 삶을 바라보는 눈높이와 거리를 적당하게 조절해 주었고 그녀는 그 원근의 거리감을 통하여 삶의 진리를 예리하게 간파했다. 그녀가 날카로울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예민할 수 있었던 것은 세상과 단절된 것에서부터 얻은 인간 본태의 신선한 우울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방금 낚아 올린,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퍼득이며, 살아 있는 우울, 때묻지 않은 순수한 우울이었을 것이다. 처음엔 그녀도 그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겠지만, 그녀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 그 우울과 일체가 되는 방법을 발견했을 것이고, 자신 삶의 일부분, 운명의 핵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만약, 그녀가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흰색 옷이 아닌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뭇남성들과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그리고 남은 시간에 심심풀이로 시를 썼다면 오늘날의 에밀리 디킨슨이 있을 수 있었을까.

차갑고 서늘한 그녀의 우울은 드디어 진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I LIKE A LOOK OF AGONY

I like a look of Agony
Bcause I know it's true
Men do not sham convulsion, Nor simulate, a Throe -

The Eyes glaze once
and that is Death
Impossible to feign
The Beads upon the Forehead
By homely Anguish strung.

.......에밀리 디킨슨

"나는 고뇌의 표정이 좋다."

나는 고뇌의 표정이 좋다.
그것이 진실임을 알기에
사람은 경련을 피하거나
격통을 흉내내지 못한다.

눈빛이 일단 흐려지면
그것이 죽음이다.
꾸밈없는 고뇌가 이마 위에 구슬땀을
꿰는 척할 수는 없는 법이다.

진실된 삶만큼이나 거짓 없는 죽음의 진실을 사랑했던 디킨슨의 한 면을 잘 보여 주는 시이다. 만약 디킨슨과 바이런이 만났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 생각해본다. 상식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탕하기 그지없는 생활을 하였던 바이런과 수도원의 사제처럼 한정된 공간 속에 자신을 가두며 평생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던 이 두 사람...

조울증으로 인한 흥분과 열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 바이런과 바닥으로 가라앉아 얼어 버리기 직전의 차가운 우울을 간직한 디킨슨, 두 사람의 삶과 예술은 극과 극으로 너무나도 상이하게 보이지만, 결국 그들이 바라보고자 했던 것은 '진리' 라는 방향표였다.

불 속에 얼음을 간직할 수도 얼음 속에 불을 간직할 수도 있다. 불은 산화하고 얼음은 액체에서 기체로 종내는 승화한다. 두 예술인의 삶의 외양이 다를 지라도 그들은 그들 자신의 삶을 소멸하면서 철저하게 창작을 했다는 점에서 엄연히 공통점이 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범인들의 땅을 씨줄과 날줄로 비상하면서 그들은 그 모든 것들을 보았고 모든 것들을 이해했으며 모든 것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 바이런이 죽기 전 1824년 1월 자신의 생일에 마지막으로 남긴 시를 읽어 보자. 고뇌에 찬 진리의 모습이 좋다는 디킨슨의 시와 다를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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