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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에 대한 이순신의 생각=퍼옴 원균에 대한 평가=퍼옴

골뫼사니 2018. 11. 12. 21:37

난중일기에 나온 원균에 대한 기록

http://freerein.egloos.com/1025933

<<임진년(1592) 4월 13일<임인> 임진왜란 발발>>

임진년(1592) 5월 2일 [양력 6월 11일]<신유>
맑음. 삼도순변사 이일과 우수사 원균의 공문이 왔다. 군관 송한련이 남해로부터 돌아와서 하는 말이 "남해 수령 기효근, 미조항 첨사 김승룡, 상주포, 곡포, 평산포 만호 김축 등이 왜적의 소문을 한번 듣고는 벌써 도망쳐 버렸고, 온갖 군기 등 쓰던 물건도 모두 버려서 남은 것이 없다"라고 했다. 참으로 경악할 일이다.(...)

임진년(1592) 5월 3일 [양력 6월 12일]<임술>
(...) 방답의 판옥선이 첩입군을 싣고 오는 것을 보고 우수사 원균이 온다고 좋아 했으나 군관을 보내어 알아보니 방답의 배였다. 크게 실망했다.(...)

임진년(1592) 5월 29일 [양력 7월 8일]<무자> - (노량, 사천해전)
(...) 맑음. 전라 우수사 이억기가 오지 않아 혼자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새벽에 떠나서 곧장 노량에 도착했다. 미리 만나기로 약속한 곳에서 경상 우수사(원균)와 만났다. (...) 군관 나대용이 탄환에 맞았으며, 나도 또한 왼편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으로 뚫고 나갔지만 중상은 아니었다. 활을 쏘는 군인과 육탄전을 벌인 군인 중에서도 총알 맞은 자가 많았다. 적의 배 13척을 불태우고 물러 나왔다.


계사년(1593) 2월 초8일 [양력 3월 10일]<계사>
맑음. 아침에 영남 우수사 원균이 내 배로 와서, 전라 우수사 이억기의 약속 시간에 늦은 잘못을 크게 말하며, 지금 곧 먼저 떠나겠다고 했다. 내가 애써 말려 기다리게 하고, "오늘 안으로는 도착할 것이다." 라고 약속했더니 과연 정오에 돛을 나부끼면서 들어왔다. (...)

계사년(1593) 2월 22일 [양력 3월 24일]<정미> - (웅천해전: 2월 15 ~ 22일)
(...)바람이 조금 멎는 듯하기에 다시 재촉하여 웅천에 이르러 두 명의 승장(삼혜,의능)과 의병(성웅지)을 제포로 보내서 상륙할 것처럼 하였다. 그리고 우도의 여러 장수의 배 중에서 변변치 못한 것을 골라 동쪽으로 보내어 역시 상륙할 것처럼 꾸미게 하였다. 이러한 전략에 왜적들은 갈팡질팡하였다. 이 때를 타서 전선을 모두 모아 무찌르니 적들은 세력이 나뉘고 약해져서 거의 섬멸 당하였다. 발포 2호선과 가리포 2호선이 명령도 안 했는데 돌입했다가, 얕은 곳에 걸려서 적들에게 습격을 당하였다. 마음이 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얼마 뒤에 진도 지휘선 역시 적에게 포위되어 구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는데,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원해냈다. 경상도의 좌위장과 우부장은 못 본 체하며 끝내 구원해 내지 않았으니, 그 괘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참으로 통분, 통분했다. 이 때문에 원균에게 질문도 했는데 실로 한심한 일이었다. 오늘의 억울함을 무슨 말로 다 하랴. 이 모두가 원균 때문이다.(...)

계사년(1593) 2월 28일 [양력 3월 30일]<계축>
(...) 우리 배가 김해강(낙동강) 아래쪽 독사리목으로 향했는데, 우부장이 변고를 알리므로 여러 배들이 돛을 달고 급히 가서 작은 섬을 둘러쌌다. 경상 수사의 군관과 가덕 참사의 사후선 등 2척이 섬에 출몰하여 들락날락하면서 태도가 엉뚱하기에 2대를 묶어서 원균에게 보냈다. 고기 잡는 어부들의 머리를 베어 오자고 군관을 보낸 것인데 화를 냈다한다. (...)
(어부라면 조선인 어부를 말하는 것 같음)

계사년(1593) 2월 23일 [양력 3월 25일]<무신>
(...) 아침 식사 후에는 원균이 왔으며, 순천, 광양, 가덕, 방답 등도 왔다. 이른 아침에는 소비포, 와량 등이 방문했는데, 원균의 음험하고 흉악한 품은 이를 데가 없었다.(...)

계사년(1593) 3월 초2일 [양력 4월 3일]<정사>
(...) 이영남과 이여념이 왔다. 그들에게서 원균의 비리를 들으니 마음의 한탄이 되었다.(...)

계사년(1593) 5월 초8일 [양력 6월 6일]<신유>
(...) 새벽에 떠나 사량 앞바다에 이르렀다. 만호 이여념이 나오기에 우수사(원균) 있는 곳을 물었다. 창신도에 있다고 하며, 군사들이 모이지 않아 미처 배를 타지 못했다고 한다. 이어서 당포에 이르니, 이영남이 방문해서 수사 원균의 잘못이 많다고 자세히 말하는 것이었다.

계사년(1593) 5월 14일 [양력 6월 12일]<정묘>
맑음. 선전관 박진종과 선전과 영산령 예윤이 임금의 명령서를 가지고 왔다. 그들에게서 피란 중인 임금의 사정과 명나라 장수들의 하는 짓을 들었다. 참으로 통탄스러웠다. 나는 우수사 이억기의 배에 타고 선전관과 이야기하며 술을 두어 잔 나누었다. 영남 수사원 평중(원균)이 와서 술주정을 부리므로, 배안의 모든 장병들이 놀라고 분개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 고약스러움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

계사년(1593) 5월 15일 [양력 6월 13일]<무진>
(...) 윤동구가 그의 대장 원균이 임금께 올리려는 문서 초본을 가지고 왔는데, 내용의 고약함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계사년(1593) 5월 21일 [양력 6월 19일]<갑술>
(...) 이영남이 다녀갔다. 원 수사(원균)가 거짓 내용으로 공문을 돌려 부대를 크게 동요시켰다. 진중에서도 이렇게 속이니 그 음흉하고 고약한 것을 이루 말할 수 없다.(...)

계사년(1593) 5월 27일 [양력 6월 25일]<경진>
(...) 경상도 우병사 최경회의 답장이 왔다. 내용을 보면, 원 수사(원균)는 송경략(송응창)이 보낸 불화살을 혼자서 쓰려고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습다.(...)

계사년(1593) 5월 30일 [양력 6월 28일]<계미>
(...) 이홍명이 방문했다. 원 수사(원균)가 송 경략이 보낸 화전을 혼자서 쓰려고 꾀하던 중 병사의 공문에 따라서 나누어 보내라고 하였을 때, 공문서도 내려고 하지 않고 무리한 말만 자꾸 지껄이더라고 한다. 가소롭다. 명나라 고관이 보낸, 화전 1530개를 나눠 보내지 않고 독차지하려고 하다니 그것은 말로 할 수 없는 일이다. (...) 남해 기효근의 배가 내 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 속에 어린 색시를 싣고서 남이 알까봐 두려워했다. 가소롭다. 이처럼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도 예쁜 여인을 태우고 놀기까지 하니, 그 사람됨은 말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대장이라는 원균부터 그러하니 어찌하랴.(...)

계사년(1593) 6월 5일 [양력 7월 3일]<무자>
(...) 원균이 "웅천의 적이 감동포로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들어가 공격하자고 공문을 보냈다. 그 흉계가 가소롭다.

계사년(1593) 6월 10일 [양력 7월 8일]<계사>
(...) 새벽 2시 경 원균의 공문이 왔는데, '내일 새벽에 나아가 적을 치자'는 것이었다. 그의 흉계와 시기심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이날 밤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계사년(1593) 6월 11일 [양력 7월 9일]<갑오>
비가 오다 개다 했다. 아침에 왜적을 토벌할 공문을 만들어 영남 수사 원균에게 보냈다. 그러나 술에 취해 정신이 없다고 핑계를 대면서 대답이 없었다.(...)

계사년(1593) 7월 21일 [양력 8월 17일]<계유>
맑음. 경상 우수사(원균)와 충청수사 정걸이 한꺼번에 와서 적을 토벌할 일을 의논하는데, 원균이 하는 말은 극히 흉측하고도 거짓스러워 말할 수 없다. 이러고서도 일을 같이 한다면 어찌 뒷걱정이 없을까? (...)

계사년(1593) 7월 25일 [양력 8월 21일]<정축>
(...) 조붕이 와서, "제찰사의 공문 중에 원균을 문책하는 말이 많았다"고 한다.

계사년(1593) 7월 28일 [양력 8월 24일]<경진>
맑음. 아침에 체찰사에게 가는 편지를 썼다. (...) 원균의 음흉하고 간흉함이 대단했다. 정여흥이 공문과 편지를 가지고 체찰사에게 갔다. (...) 사도 첨사 김완이 복병했을 때 잡은 포작 10명이 왜복을 바꿔 입는 등 하는 짓이 이상해서 추궁했다. 어떤 근거가 있는 듯하더니, 원균이 시킨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족장을 10여 대씩 때린 후 놓아주었다. (전공에 눈이 먼 XX)

<<계사년(1593) 8월 1일: 이순신 장군 삼도수군 통제사 임명됨>>

계사년(1593) 8월 초2일 [양력 8월 27일]<계미>
(...) 해질녘에 우수사 이억기가 내 배로 와서 (...) 원 수사(원균)가 망령된 말을 하며 내게 대해서 좋지 않은 말을 많이 하더라고 전했다. 모두 망령된 짓이라 상관할 필요가 없다. (...)

계사년(1593) 8월 초6일 [양력 8월 31일]<정해>
(...) 저녁에 원균이 오고, 이경수, 영공 이억기, 정 수사도 와서 일을 의논하였다. 원균의 말에 번번이 모순이 있다. 어처구니가 없다. (...)

계사년(1593) 8월 7일 [양력 9월 1일]<무자>
(...) 저녁에 경상 수사 원균의 군관 박치공이 와서 "적선이 물러갔다"고 전했지만, 원균과 그 군관은 평소에 거짓말을 잘하니 믿을 수가 없다.

계사년(1593) 8월 9일 [양력 9월 3일]<경인>
(...) 오후에 우수사 이억기의 배에 갔더니 충청 영공도 왔다. 원균은 복병을 일제히 보내기로 약속해 놓고, 혼자서 먼저 보냈다고 한다. 해괴한 일이다.

계사년(1593) 8월 18일 [양력 9월 12일]<기해>
(...) 조붕이와서 말하기를 "원균의 군관 박치공이 장계를 가지고 서울로 올라 갔다"고 했다.
(이순신장군의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에 원균의 노골적 반발)

계사년(1593) 8월 19일 [양력 9월 13일]<경자>
맑음. 아침 식사 후 원균에게 가서 내 배로 옮아 타자고 청했다. 우수사와 정수사도 왔다. 원연도 함께 이야기했다. 말 가운데 원균의 음흉하고 고약한 일이 많으니, 허무 맹랑한 꼴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

계사년(1593) 8월 26일 [양력 9월 20일]<정미>
(...) 흥양 배홍립이 와서 명절 제사 음식을 대접하는데, 원균이 술을 청하기에 약간 주었다. 잔뜩 취해서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함부로 했다. 가소로웠다.(...)

계사년(1593) 8월 28일 [양력 9월 22일]<기유>
맑음. 원균이 와서, 음흉하고 간휼한 말을 많이 했다. 심히 해괴하다.

계사년(1593) 8월 30일 [양력 9월 24일]<신해>
맑음. 원균이 또 와서 영등으로 가기를 독촉한다. 참으로 음흉하다. 그가 거느린 배 25척은 모두 내보내고, 겨우 7, 8 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한다. 그의 마음 쓰고 행사함이 이 따위다.

계사년(1593) 9월 초6일 [양력 9월 30일]<정사>
(...) 이억기의 배에 가서 하루 종일 이야기했다. 거기서 원균의 음흉한 일을 듣고, 정담수가 근거 없는 거짓말을 만들어 내는 꼴을 들었다.(...)


갑오년(1594) 2월 11일 [양력 4월 1일]<경신>
(...) 아침 식사 후에 사정에 올라갔는데, 원균이 왔다. 술이 몇 잔 들어가자 미친 말이 많으니 우스운 일이었다. (...)

갑오년(1594) 3월 초3일 [양력 4월 22일]<신사>
(...) 경상 우후 이의득이 와서 말하되, "수군을 많이 잡아오지 못했다고 원균에게 매 맞고, 또 발바닥까지 치려 하더라"고 하니, 참으로 놀랄 일이었다.(...)

갑오년(1594) 3월 13일 [양력 5월 2일]<신묘>
(...) 오후에 원균이 와서 자기의 잘못된 일을 고백하므로 장계를 도로 가져다가 원사진과 이응원 등이 왜군 복장을 한 자를 목 잘라 바친 일은 고쳐 보냈다.
(전과를 높이기 위해 조선인의 시체에 왜군의 옷을 입혀 목을 잘라 거짓 보고한 짓)

갑오년(1594) 4월 12일 [양력 5월 31일]<경신>
맑음. 순무 어사(임금의 특사) 서성이 내 배에 와서 이야기했다. 우수사와 경상 수사 원균, 충청 수사도 함께 와서 술을 세 순배했다. 원균은 짐짓 취한 체하며 함부로 무리한 말을 했다. 순무 어사도 괴이함을 이기지 못했다. 하는 짓이 극히 흉악했다. (...)

갑오년(1594) 5월 13일 [양력 6월 30일]<경인>
맑음. 이날 금모포 만호의 보고에 "경상 우수사 관할의 바다에 들어가 포작(천민 신분의 어부)들이 격군을 싣고 도망가다가 현지에서 붙들렸는데, 보자기(천민 신분의 어부)들은 원균이 있는 곳에 숨어 있다고 하므로 사복들을 보내어 붙들어 오려는데, 원균이 크게 성내면서 도리어 사복들을 결박했다"고 한다.(...)

갑오년(1594) 6월 4일 [양력 7월 21일]<신해>
(...) 저녁에 겸사복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수군 여러 장수들 및 경주의 여러 장수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고 하니, 앞으로는 그런 습관을 모두 버리라' 는 내용이었다. 송구하고도 통탄스럽기 그지없었다. 이것은 원균이 술 취해서 망발을 부린 때문이었다.

갑오년(1594) 6월 14일 [양력 7월 31일]<신유>
(...) 충청 영공 이순신과 사도, 여도, 녹도와 함께 활 20순(1순:화살 다섯 발 쏘는 것)을 연습했는데, 충청이 아주 잘 맞혔다. 이날 경상 수사 원균이 활을 잘 쏘는 부하를 거느리고 우수사 이억기의 처소에 왔다가 크게 지고 돌아갔다.

갑오년(1594) 7월 21일 [양력 9월 5일]<정유>
(...) 늦게 소비포가 방문해서 말하기를 "기한에 대지 못했다고 해서 원균에게 곤장 30대를 맞았다"고 한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

갑오년(1594) 8월 17일 [양력 9월 30일]<임술>
(...) 원수 권율이 정오에 사천으로 와서 군관을 보내어 이야기하자고 해서 곤양 말을 빌려 타고 원수가 머무르는 사천 수령의 처소로 갔다. 교서에 숙배한 뒤 공사간 인사를 마쳤다. 함께 이야기하다 보니, 오해가 많이 풀리는 빛이었다. 원균을 몹시 책망하니 원균은 차마 머리를 들지 못했다. 가소로웠다.(...)

갑오년(1594) 8월 30일 [양력 10월 13일]<을해>
(...) 김걍간이 서울로부터 영의정과 병조판서 심충겸의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분개한 내용이 많이 있었다. 원균의 일은 참으로 해괴하다. 날더러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니, 이는 천고에 탄식할 일이다. (...)

갑오년(1594) 9월 초4일 [양력 10월 17일]<기묘>
(...) 늦게 원균이 이야기할 것이 있다고 하기에 사정에 나가 앉았다. 활을 쏘았는데 원균이 9분을 지고, 술이 취해서 갔다.

갑오년(1594) 9월 11일 [양력 10월 24일]<병술>
(...) 소비포는 원균이 모함하려고 하는 까닭에 달밤을 이용해서 본포로 돌아갔다.

갑오년(1594) 10월 17일 [양력 11월 28일]<신유>
(...) 늦게 우수사와 어사가 와서 조용히 이야기하던 중에 원균의 속이고 무고하는 짓이 많이 논의되었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나중에 원균도 왔다. 그 흉패한 꼴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을미년(1595) 2월 20일 [양력 3월 30일]<계해>
맑음. 우수사, 장흥, 조방장 신호가 와서 이야기하는데, 원균의 고약한 짓을 많이 전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을미년(1595) 2월 27일 [양력 4월 6일]<경오>
맑음. 한식. 원균이 포구에 있는 수사 배설과 교대하려고 이르렀다. 교서에 숙배하게 했더니, 불평하는 기색이 많았다. 두세 번 거듭 타일러 억지로 행하게 했다. 너무도 무식한 것이 가소로웠다.

(이순신장군의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데 반발하다 1954년 12월 충청병사로 전출되었다, 얼마 뒤에 전라좌병사로 전속되었다.)


병신년(1596) 윤8월 24일 [양력 10월 15일]<무자>
부사와 함께 가리포(완도읍)로 갔더니 우우후 이정충이 먼저 와 있었다. (...) 병영으로 돌아왔다. 원균의 흉악한 행동은 기록하지 않는다.


<<정유년(1597) 1월 14일 - 정유재란>>
<<정유년(1597) 2월 25일 - 이순신 장군 해임>>
<<정유년(1597) 3월 4일 - 이순신 장군 하옥>>
<<정유년(1597) 4월 1일 - 이순신 장군 사면>>
<<정유년(1597) 4월 13일 - 이순신 장군 모친상>>

정유년(1597) 4월 27일 [양력 6월 11일]<정해>
맑음. 일찍 떠나 송치(순천 서면 학구리) 밑에 이르니, 구례 수령이 점심을 지어 보냈다. 순천 송원에 이르자 이득종 등이 문안했다. 저녁 때 정원명의 집에 이르니, 원수가 내가 온 것을 알고, 군관 권승경을 보내어 조상하고 또 안부를 물었는데, 위문하는 말이 자못 간곡했다. 정사준도 방문해서 원균의 망령되고 패악한 짓을 말했다.

정유년(1597) 4월 30일 [양력 6월 14일]<경인>
(...) 병사 이복남이 식사 전에 방문해서 원균의 일을 많이 말했다.(...)

정유년(1597) 5월 5일 [양력 6월 19일]<을미>
(...) 늦게 충청 우후 원유남이 한산으로부터 와서 원균의 못된 짓을 많이 전하고, 또 진중의 장졸들이 모두 배반하므로 장차 일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정유년(1597) 5월 7일 [양력 6월 21일]<정유>
(...) 서산 군수 안괄이 한산으로부터 와서 음흉한 자(원균)의 일을 많이 말했다.

정유년(1597) 5월 8일 [양력 6월 22일]<무술>
(...) 음흉한 원균이 편지를 보내어 조상하니, 이것은 원수의 명령이었다.(어머니의 상을 당한 후 원균이 문상을 보낸 일조차, 권율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원균을 신뢰하지 않았다.) 이경신이 한산에서 온 뒤 음흉한 원균의 말을 많이 했는데, 원가가 데리고 온 서리를 곡식을 사라는 구실로 육지로 보내 놓고, 그 처를 사통(私通)하려고 하였는데, 순순히 말을 듣지 않고 밖으로 나와 악을 쓴 일이 있었다고 한다. 원균이 온갖 계략을 꾸며 나를 모함하려 드니, 이 또한 운수로다. 뇌물로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 길에 잇닿았으며, 그렇게 해서 날이 갈수록 심히 나를 헐뜯으니, 그저 때를 못 만난 것만 한탄할 따름이다.

정유년(1597) 5월 11일 [양력 6월 25일]<신축>
(...) 광양의 전 현감 김성이 체찰사의 군관이 되어서 화살대를 구하러 순천에 왔다가 방문해서 근래의 소문을 많이 전하였다. 그 소문이란 모두 흉인(원균)의 일이었다.(...)

정유년(1597) 5월 20일 [양력 7월 4일]<경술>
(...) 체찰사는 소복을 입고 기다렸다. 조용히 일을 이야기하는 중에 체찰사가 개탄해 마지않았다.(...)
또 말하되, "음흉한 사람(원균)의 무고하는 행동이 심했건마는 임금이 굽어 살피지 못하니, 장차 나라 일을 어찌할고"하는 것이었다. (...)

정유년(1597) 5월 23일 [양력 7월 7일]<계축>
아침에 정사룡, 이사순이 방문해서 원균의 말을 많이 전했다. (...)

정유년(1597) 5월 28일 [양력 7월 12일]<무오>
(...) 하동현에 이르니, 그 고을의 수령 신진이 만나 보기를 반갑게 여기며, 성안 별사로 맞아들여 간곡한 정을 베풀었다. 그리고 원균의 미친 짓을 많이 말했다. (...)

정유년(1597) 6월 12일 [양력 7월 25일]<신미>
(...) 늦게 승장 처영이 방문해서 부채와 짚신을 바치므로 다른 물건으로 갚아 보냈다. 그는 적의 정세도 잉야기하고, 원균의 일도 이야기했다.(...)

정유년(1597) 6월 17일 [양력 7월 30일]<병자>
(...) 아침 식사 후에 원수에게로 갔더니, 원균의 정직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많이 말하고 비변사에서 내려온 공문을 보이는데, '원균의 장계에 수군과 육군이 함께 나가서 안골의 적을 무찌른 후에 수군이 부산 등지로 진군하겠으니, 안골의 적을 먼저 칠 수 없겠습니까' 하였고, 원수의 장계에는 '통제사 원균이 전진하지 않고, 오직 안골의 적을 먼저 쳐야 한다고만 말하며, 수군 여러 장수들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을뿐더러, 원균은 안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을 것이니 절대로 다른 여러 장수들과 합의하지 못할 것이라, 일을 그르칠 것이 뻔합니다'라고 했다.(...)
(1월에 조정에 올린 원균의 장계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나라의 위무(威武)는 오로지 수군에 달려 있습니다. ....수군으로 무위를 떨치고, .....위세를 떨치면, 청정(淸正)은 평소 수전(水戰)이 불리한 것에 겁을 먹고 있었으니,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것이라 생각됩니다....이는 신이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바다를 지키고 있어서 이런 일을 잘 알기 때문에 이제 감히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 우러러 아룁니다.”)

정유년(1597) 6월 25일 [양력 8월 7일]<갑신>
(...) 저녁에 종 경이 한산에서 돌아왔는데, 보성 군수 안홍국이 탄환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너무 놀라서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적 한 놈도 잡지 못하고 먼저 두 장수를 잃어버리다니 통탄함을 어찌 말하랴.(...)

정유년(1597) 7월 14일 [양력 8월 26일]<계사>
(...) 오후 10시경 황 종사관이 정인서를 보내어 문안하고, 또 김해 사람으로 왜적에게 붙었던 김억의 고목을 보여 주었다. 이에 의하면 '초7에 왜선 500여 척이 부산으로 나오고, 초9일에 왜선 1000척이 합세하여 우리 수군과 절영도 앞바다에서 싸웠는데, 우리 전선 5척이 두모포에 표류해 대었고, 또 7척은 간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를 듣고 분함을 이기지 못해 곧 황 종사관이 군대 점호하는 곳으로 달려가 일을 의논하고 (...)

정유년(1597) 7월 15일 [양력 8월 27일]<갑오>
아주 늦게 중군 이덕필이 왔다가 저물어서 돌아갔다. 그 편에 들이니, 수군 20여 척이 적에게 패했다는 것이었다. 그저 통분하고 통분할 뿐이다. 막을 방책이 없음에 한스럽다.(...)
(원균은 한산도 본영에 앉아서 경상우수사 배설에게 웅천을 급습하도록 하였다. 배설이 전투선 수십 척을 잃고 패하자, 권율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원균을 곤장형에 처한 뒤 다시 출전을 명한다)

정유년(1597) 7월 16일 [양력 8월 28일]<을미> - (칠천량 해전)
(...) 아침 식사 후에 손응남을 중군 이덕필에게 보내어 수군 소식을 알아보게 했다. 돌아와 중군의 말을 전하는데 경상 좌병사의 긴급 보고로 보아 불리한 일이 많다고 하면서 대강대강 말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한탄스런 일이다. (...) 저녁때 영암 송진면 사는 노비 세남이 서생포로부터 발가벗은 알몸으로 왔기에 그 까닭을 물으니, "7월 초4일 전 병사의 우후가 타고 있던 배의 격군이 되어 초5일의 칠천량에 이르러 자고, 초6일 옥포로 들어갔다가 초7일 새벽에 말곶을 거쳐서 다대포에 이르러 왜선 8척이 정박해 있음을 보고 여러 배들이 바로 돌격했더니, 왜인들은 남김 없이 육지로 올라가고 빈 배만 걸려 있었다. 우리 수군들은 그것을 끌어내어 불 지르고, 그 길로 부산 절영도 바깥 바다로 향하였다. 그때 적선 1000여 척이 대마도로부터 건너오는데, 싸우려고 했더니 왜선들은 흩어져 회피하므로 끝내 잡아 초멸할 수도 없었다. 세남이 탄 배와 다른 배 6척은 배를 제어하지 못하고 서생포 앞바다까지 표류하여 뭍으로 오르려고 하자 거의 다 살육을 당하고, 세남만 혼자서 수풀 속으로 들어가 목숨을 건져 간신히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듣고 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나라가 믿을 힘은 오직 수군뿐인데, 수군이 이러하니 다시 더 바라볼 것이 없다. 거듭거듭 생각할수록 분한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또 선장 이엽이 적에게 포박되었다고 하니 더욱 통분하고 탄식할 뿐이다.(...)

정유년(1597) 7월 18일 [양력 8월 30일]<정유>
맑음. 새벽에 이덕필이 변홍달과 함께 와서 전하는 말이, "16일 새벽에 수군이 밤 기습으로 통제사 원균이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및 여러 장수들과 함께 해를 입고 수군이 크게 패했다"는 것이었다. 듣자니 통곡이 터짐을 이길 수 없다. 이윽고 이 원수가 와서 말하기를, "일이 이미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오후 10시경까지 이야기했으나, 어떻게 뜻을 정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직접 해안 지방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정하겠다"고 말했더니, 곧 원수는 그 이상 더 좋아할 수 없었다.(...)

정유년(1597) 7월 21일 [양력 9월 2일]<경자>
(...) 점심 식사 후 노량에 이르니, 거제 수령 안위와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 10여 명이 와서 통곡하고, 피해 나온 군사와 백성들도 울부짖지 않은 이가 없었다. 경상 수사 배설은 도망가고 보이지 않았다. 우후 이의득이 방문했기에, 패하던 정황을 물었다. 모든 사람이 울며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그와 같이 뭍으로 달아나,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대장의 잘못을 말하는 것은 차마 입으로 옮길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 먹고 싶다고들 했다. 거제의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 수령과 새벽 2시경까지 이야기했다.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해 눈병을 얻었다.

정유년(1597)7월 22일 [양력 9월 3일]<신축>
맑음. 아침에 경상 우수사 배설이 방문해서 원균이 패망한 일을 많이 말했다.(...)

정유년(1597) 8월 3일 [양력 9월 13일]<신해> - (이순신 장군 재임명)
맑음.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들어와 교서와 유서를 가져왔는데, 내용인즉 겸삼도통제사의 명령이었다(....)

출처 : http://cafe3.daum.net/_c21_/home?grpid=2BAR


원균에 대한 평가
유성룡의 경우 『징비록』에서는 원균을 음험하고 간사한 인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유성룡은 선조 29년에 전쟁 중 선조 앞에서 원균이 몸을 돌보지 않고 싸우며, 수전과 육전 모두에 능하다고 말합니다. 이를 근거로 삼기도 하죠. 그러나 그 선조 27년의 기록을 보면 선조는 이순신을 의심하며 원균을 용장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당연히 이순신을 비호하는 유성룡을 고깝게 보며 그의 발언을 의심하고 말이죠. 이런 상황에서 유성룡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선조의 비위를 맞췄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선조로서는 정치적으로 동인을 견제하려던 목적에 서인 쪽의 지지를 받는 원균을 높이 세우려 했고 이에 대한 갈등이 생겼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원균을 비난하는 내용들은 어떨까요? 일단 『난중일기』는 빼고 이야기합시다. 『난중일기』가 이순신이 적은 일기라서 객관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 말이죠. 『난중일기』까지 포함하면 원균은 정말 기준 이하입니다. 빼도 마찬가지지만요. 일단 선조실록의 선조 25 6 28일 김성일의 장계를 봅시다. 그 장계에 의하면 원균은 일본군이 바다를 건너오자 싸워보지도 않고 전함과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말이 나옵니다. 알다시피 조선에서 공문서 위조는 극형에 처할 중죄였기 때문에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더더구나 뒷배경이 좋기로는 이순신보다 원균이죠. 원균은 서인 주류 라인을 타고 있었지만 이순신은 동인 계열이지만 아웃사이더라 그다지 힘이 없었거든요.

동시기 의병을 일으켰던 안방준은 그의 『은봉전서』에서 원균이 수급을 모으는 데만 급급하고 심지어 다른 장수들에게 수급을 구걸까지 하니 병사들이 이를 두고 “한 숟갈씩 얻어온 밥이 온 공기보다 많다”라며 비웃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 『은봉전서』를 쓴 안방준은 원균과 무슨 원수라도 졌을까요? 천만의 말씀이죠. 오히려 원균과 안방준은 일가였습니다. 『은봉전서』에 보면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친척인 안중홍을 찾아갑니다. 이 안봉준의 처가 바로 원씨 집안 사람이죠. 즉 처가 쪽 친척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방문한 자리에서 원균은 높으면서 막중한 책무를 받은 것에 대한 걱정이나 영광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순신을 쫓아낸 것만이 기쁘다고 말합니다. 결국 안중홍은 원균을 두고 조괄과 기겁에 비유하며 졸렬하다는 평가를 내립니다.

원균은 수군이 아닐 때도 비리를 저질렀는데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 나서 원균과의 트러블로 이순신이 “나를 내치든지 원균을 내치든지 둘 중에 하나를 골라라.” 하고 엄포를 놓자 조정에서는 원균을 충청병사로 빼버리죠. 이것으로도 당시 원균의 평가가 어떠한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충청병사로 간 자리에서도 원균은 비리를 저지릅니다
.
선조실록 28 8 15일자 기록에 사헌부에서 원균이 씨콩을 받고 복무 기간이 남은 병사들을 군에서 빼주는 병역비리를 저지르고 무리한 형벌로 사람을 죽거나 다치게 하였다고 파직해야 한다고 건의합니다. 이때 철원부사 심원해와 봉산 군수 박응인도 함께 비리로 고발됩니다만 선조가 원균만 빼주죠. 왜냐하면 ‘시기 어려우니 그런 장수를 빼면 안 된다’라는 이유였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성은 둘째 치고 그가 정말로 용맹하기라도 한 장수였을까요? 그것도 천만의 말씀입니다. 임란이 끝난 지 2년째 되는 해 윤계선이라는 선비가 『달천몽유록』이라는 소설을 쓰는데 그곳에 원균을 비웃는 글을 적습니다. 그는 그 소설에서 원균을 배가 불룩하고 입은 삐뚤어지고 얼굴빛은 흙빛이라고 말하죠. 이것이 소설이라 믿을 수 없다면 의병장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에 원균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그는 ‘원균이 체구가 비대하고 식사에 밥 한 말, 생선 5마리, 닭이나 꿩 3~4마리를 먹으며 평소에도 배가 무거워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용맹하다 할 수 있을까요? 외모도 외모거니와 묘사된 상황이라면 제 몸 가누기도 힘든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용맹한 무엇이 나올 수 있다면 정말 개가 웃을 일이죠. 그뿐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원균이 육전에서는 용맹한 장수로, 장군감은 아니지만 그래도 잘 싸우는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에도 근거가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어디에도 원균이 전공을 세웠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선조 22 1월과 7, 대신들이 북방에서 전공을 세운 장수들을 비변사에 추천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원균은 이에 해당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이순신은 세 번이나 추천이 되죠.
또한 원균이 종성부사로 있을 때 직급 테스트를 치렀는데 급수가 하급으로 나와 면직된 적도 있었습니다. 조선은 관리의 승진 및 평가가 엄격했는데 상중하로 나뉜 인사고과에서 하급 평가를 받으면 당상관은 파직, 그 이하는 인사고과 2회 기간 동안 승진불가였습니다. 즉 자기 일도 제대로 못해 승진 시험에 떨어지고 면직까지 받은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끈이 장난 아닌지라 불과 6개월 후에 전라좌수사로 승진되어버리죠.

그리고 위에서 말했지만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보이자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간 사실은 더 말할 필요도 없겠죠. 1593년 웅천포 해전에서 위기에 처한 아군 상선을 외면한 것도 기억할 만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 난 다음 그가 통제사로 오르기 전에 약속했던 대로 부산에 진격하지 않은 것을 두고 현실을 잘 본다는 둥 이순신 쪽이었던 권율이 방해를 놨다는 둥의 말을 하지만 실제 원균이 요구한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습니다.

원균은 수륙합동작전에 육군 30만을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당시 조선에 30만의 병력을 만들 여력이 있었으면 전쟁이 그렇게까지 되지도 않았겠지요. 한마디로 되지도 않는 땡깡을 쓰며 전투를 미뤘다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전황과 국력을 평가할 기본적인 소양조차 없었다는 소리가 되는 것이지요. 전략을 못 짜면 잘 싸우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는 부산포 출정 중 가덕도에서 물을 구하러 보낸 아군 병사들이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위기에 처하자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냥 도망쳐버립니다. 몇몇 사람들은 아군이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도망치는 장수를 용맹한 장수라고 보는 이상한 눈이라도 있는가 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몽땅 말아먹고 사라져버린 사실은 원균을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좋게 볼 수가 없는 명백한 사실들의 집합입니다.

살펴보면 당대 기록이나 후대 기록 어디에도 원균을 훌륭한 장수라고 표현한 부분은 없습니다. 심지어 왜란 내내 원균을 두둔하던 선조마저도 이순신 사후 더 이상 원균을 두둔하여 견제할 필요가 없어지자 “나는 그대를 버렸으나, 그대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라는 말로 제문을 내려 위로합니다. 도대체 이런 사람을 시대가 만든 희생양으로 보는 부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도리어 지금의 모습을 보면 시대가 만든 희생양은 이순신입니다.

사람들이 원균맹장론 등으로 ‘어? 정말로 원균은 그런 거야?’라고 생각할까 두렵습니다. 좀 더 많은 분들이 이런 사실에 대해 정확히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원균명장론 따위가 설치는 꼴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요.
 


출처: http://wam2010.tistory.com/65 [원고지와 만년필]


불사혼= 비로자나불 | 조회 183 |추천 0 | 2005.05.10. 00:54
"소인이 일찍 함경도 종성에서 원균을 만나보았사온데, 비록 적군이 만 명이 넘는다 해도 그 앞에서 가로질러 돌진하는 용장이었습니다.(병조참의 조인득)"

선조실록에 있는 기록으로 원균이 종성부사로 재직할 때의 그에 대한 평가입니다. 이 외에도 원균은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세운 공으로 특진을 한 바 있습니다. 다만 그의 근무평가는 최하였다고 합니다.

"일전에 원균이 경상 우수사로 있을 적에 돌격할때에 머뭇거리는 병사가 있으면 가차없이 칼로 내리쳤습니다. 이때문에 원 수사는 미쳤다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습니다.(이덕형. 선조 34년 1월 17일)"
"원균은 배의 수는 비록 적었지만 돌격을 잘했다.(조경남. 난중잡록)"
"예로부터 육장은 해전을 못하고 수장은 육전을 못하나 원균은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싸워 그 모두에 능합니다.그러나 피로한 군졸을 잘 어루만지지는 못합니다.(영의정 유성룡. 선조 29년 11월 7일 회의)"
"해전은 원균의 장점입니다. 이제 그의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해 쓰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지충추 정탁. 선조 29년 11월 7일 회의)"
"원균은 성질이 몹시 억세어 윗사람이 공문을 보내어 지휘하면 반드시 다투기는 하지만, 그래도 전쟁에 임해서는 쓸만한 장수입니다. 그에게는 군사를 미리 주지 말고 전쟁에 임해서 군사를 주어 돌진케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우의정 이원익. 선조 29년 10월 5일)

 

 경상도 연해의 왜적이 거제도(巨濟島)로 향하니 원균(元均)은 우후(虞侯)한테 군영을 지키게 하고는 배천사(白川寺)까지 달려갔는데, 우리나라 어선을 보자 왜적의 배인 줄로 생각하고 창황히 달아나 노량(露梁)으로 물러났다. 우후가 그 소식을 듣고 나가길 독촉하니 온 성 안의 늙은이와 어린이들이 어지러이 길을 꽉 메웠다. 그러자 우후는 다함께 피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활을 당겨 마구 쏘아대자, 임신한 두 여인이 한 화살에 맞았는가 하면 그 밖에도 무고하게 죽은 자가 퍽 많았고, 온 섬의 장병들이 모두 소문만을 듣고도 흩어져 버렸다. 남해 현령(南海縣令) 기효근(奇孝謹)은 창고를 불사르고 달아났는데, 왜적은 아직 남해 땅을 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난중잡록]


처음 적병이 한 방향으로 거제를 향하였다. 경상 우수사 원균이 우후(虞侯)를 시켜 병영을 지키게 하고 백천사(白川寺)에 달려가서 관망하다가 우리나라 어선을 적선인 줄 알고 당황하여 노량(露梁)으로 물러났다. 우후가 그 소문을 듣고 성중 노약자(老弱者)를 나가라고 독촉하니 죽은 자가 많았다. 어느 섬의 군사가 그 형세를 보고 모두 흩어졌다. 해남 현령 기효근(奇孝謹)은 창고를 불태우고 달아났다. 원균은 적이 여러 성을 연달아 함락시켰다는 말을 듣고 주사(舟師)를 인솔하고 가덕도(加德島)로 향하다가 적선이 바다를 뒤덮으며 오는 것을 보고 퇴각하여 돌아오니 여러 장수도 차차 흩어져 갔다. 원균이 육지에 올라 적의 칼날을 피하려 했다. 기문(記問)에는 전선 백여 척과 화포와 군기를 다 바다에 빠뜨리고 홀로 비장(裨將)을 데리고 곤양으로 달아났다 했다.

[연려실기술]



 삼도(三道)의 해군 함대[舟師]가 가덕도(加德島) 앞바다까지 왜적을 추격하여 크게 이기다. 이에 앞서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은 왜적들이 여러 성을 연달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해군 함대를 이끌고 가덕도로 향했는데, 왜적의 배가 바다를 덮고 있는 것을 보자 마침내 퇴각하여 돌아오고, 여러 장수들도 점점 흩어져 가버렸다. 원균은 아군의 전함을 다 침몰시키고는 육지에 올라가서 왜적을 피하려 하였으나, 옥포만호(玉浦萬戶)이운룡(李雲龍)이 안 된다고 하여 마침내 중지하였다. 원균이 이운룡 등의 몇 척의 배와 함께 노량(露梁)에 퇴각해 있는데 적병이 뒤따라 좇아오자, 이운룡이 전라도의 해군에 구원을 청하고자 곧 작은 배 하나를 타고 달려갔다



 

 

五月初一日。至固城之蛇梁。
5월 초하루 고성 사량진에 이르렀다.

時賊勢甚急。嶺南沿海諸鎭。無暇整軍。惶怯失措。皆自沈其戰船。
이때 적의 형편은 파죽지세와도 같이 매우 급하여 영남 연해의 여러 진들은 군기를 바로잡을 겨를도 없어 두렵고 겁이 나 조치를 잘못 취했으며, 모두 제 스스로 자기네 전선을 바다에 가라앉혀 버리고 말았다.

元均亦以一夾船。竄伏于赤梁島。聞舜臣至。自三川來見舜臣。
원균 또한 협선 하나를 적량도에 잠복시켜 놓았다가 순신이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삼천으로부터 와서 순신을 뵈었다.

泣曰。令公令公。吾固苦待之矣。吾之戰船。無一隻在。此將何爲。
울면서 말하기를 "영공, 영공! 저는 실로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제게는 이제 전선 한 척도 없으니 '이 불쌍한 장수'가 여기서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舜臣慰撫之。且曰。此臣子報國盡瘁之秋也。
순신이 그를 위무하고는 "여기 신하들이 보국함에 있어 몸이 여위도록 마음과 힘을 다 할 때입니다."라고 말하였다.

遂留軍一日。
드디어 하룻동안 군사를 머물게 했다.

-은봉전서-



안방준의 은봉야사별록의 내용입니다 안방준은 당시 의병장이었으며 그의 당파는 서인이었다.



선조30년 7월 22일 / 선전관 김식이 한산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보고하다

선전관 김식(金軾)이 한산(閑山)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입계하였다.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 나라 전선 4척이 전소 침몰되자 우리 나라 제장들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왜선이 몰려 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형도(刑島) 등 여러 섬에도 끝없이 가득 깔렸습니다. 우리의 주사(舟師)는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고성 지역 추원포(秋原浦)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 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과 옥포(玉浦)·안골(安骨)의 만호(萬戶) 등은 간신히 목숨만 보전하였고, 많은 배들은 불에 타서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7월 21일에 성첩(成貼)한 도원수 권율의 서장에 아뢰기를,
“신의 군관인 최영길(崔永吉)이 한산도에서 지금에야 비로소 나왔는데 그가 말하기를 ‘원균(元均)이 사지를 벗어나 진주로 향하면서 말하기를, 「사량(蛇梁)에 도착한 대선(大船) 18척과 전라선(全羅船) 20척은 본도에 산재해 있고, 한산에 머물러 있던 군민(軍民)·남녀·군기(軍器)와 여러 곳에서 모여든 잡선(雜船) 등을 남김없이 창선도(昌善島)에 집합시켜 놓았으며, 군량 1만여 석은 일시에 운반하지 못하여 덜어내어 불태웠고, 격군(格軍)은 도망하다 패배한 배는 모두 육지 가까운 곳에 정박시켰으므로 사망자는 많지 않았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최영길을 곧이어 올려보내겠습니다. 이순신(李舜臣)에게 흩어져 도망한 배를 수습하도록 사량으로 들여보내소서.”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啓下)하였다

 

 

선조실록

크게 승리한 뒤에 원균이 조정에 보고하려 하니 순신이 말했다 "공과 더불어 ]
[힘을 다했으나 왜노를 모두 섬멸하지 못했다 이와같은 작은 승리를 가지고 ]
[어찌 조정에 알리겠소? 내가 다른 도에서 창졸간에 도우러 와서 병기도 ]
[제대로 갖추지 못했소 적의 머리를 얻은 다음에 승리의 보고를 해도 좋겠소 ]
[원균은 이말에 따랐다 그런데 순신이 사람을 몰래 보내 빼앗은 병기와 적선에]
[실려 있던 금병풍,금부채 같은 물건을 실어 보내서 조정에 알려 전공을 과장 ]
[스럽게 자랑했다 그리고 그 공을 자기에게 돌렸다 피난해 있던 조정에서는 ]
[ 승리의 보고를 받고 크게 기뻐하여 순신을 통제사로 삼았다 원균이 이로 ]
[말미암아 크게 성을 내어 서로 협조 하지 않았다 ]

선조실록은 광해치세때 북인이 편찬한 실록이다 그러면 이번엔 서인이 편찬한
선조수정실록을 살펴 보자
[원균이 장계를 보내자고 하니 서서히 보내자고 해놓고 밤을 타 장계를 보내 ]
[면서 원균이 군사를 잃었을뿐만 아니라 적을 친 공이 없다고 보고하니 원균이]
[이를 듣고 크게 감정을 가졌다 이로부터 각자 전공을 보고했는데 두 사람이 ]
[서로 헐뜯음이 이로부터 시작 되었다 ]

이순신의 [난중일기]

1. 원균은 술주정뱅이에다가 위인이 옹졸하고 음흉하며 공사를 가릴줄 모른다
그는 전쟁중에도 계집을 끼고 놀 궁리만 했다
2. 명나라 경략 송응창이 보낸 화살을 나눠 보내라 하니까 혼자 독차지해서
쓰려고 하였다
3. 서울로부터 영의정(유성룡),병조판서(심충겸)의 편지가 왔는데 분개한
뜻이 많이 적혀 있다 원수사(원균)의 일은 참으로 해괴하다 날더러
머뭇거리며 나가지 않는다 하니 이는 천고에 탄식할 일이다
4. 이경신이 한산에 와서 음흉한 원가(원균)의 말을 많이 하였는데 원가가
데리고 있는 서리를 곡식 사오라는 구실로 육지에 보내놓고 그 처를 사통
하려 하니 계집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한다 원이(원균) 온갖 계략으로 나를
모함하려 덤비니 이도 운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