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광주천에서 미역을 땄다는 내용이 실린 기사 전문입니다
잃어버린 마을 '방림동'을 찾아서
온통 밋밋한 들판이라 맷맷들?
아주 옛날엔 미역 땄던 곳이라 '밋밋들'
축축이 내려앉은 장맛비에 도시는 온통 회색빛으로 널브러져 있다. 공기는 연고처럼 끈적거리고 월요일의 직장처럼 무겁다. 묵직하고 습한 공기 탓일까, 제법 먼 곳에서 울려오는 소리가 환청처럼 가깝게 들리고, 여태껏 익숙했던 눈앞의 풍경들이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집처럼 낯설게 느껴진다. 이런 낯설음이 돌연 오랫동안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물건을 되찾게 해주듯 도시를 잠시 색다르게 보게 만든다.
왕왕 광주 남구 방림동은 빼곡한 아파트촌과 동의어가 된다. 아파트 단지만을 세다가 그만 지쳐버린다. 하지만 본디 그곳에도 집보다는 확 트인 들이 더 많았고, 넓은 들 사이로 올망졸망한 마을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망자의 이름을 깨우듯 옛 마을들의 이름을 불러보고 그 위치를 더듬어본다.
방림동은 숭의고등학교 등이 들어선 치마봉에서 내려오는 산줄기를 기준으로 두 개의 생활공간, 즉 안방림과 밖방림으로 나뉜다.
광주천 쪽인 밖방림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짧다. 1950년대 한국전쟁을 전후로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시내의 폭격을 피해 이곳으로 피난온 것이 마을 형성의 뿌리가 됐다고도 한다. 처음 마을이 들어선 곳은 치마봉 아래쪽, 지금 파평윤씨 사당인 서강사 일대였다. 그 무렵까지도 그 아래쪽으로 광주천 주변, 즉 지금의 방림초교와 방림동성당이 들어선 일대는 논이나 물풀이 무성한 저습지였다. 그런 곳이 거주지로 탈바꿈한 것은 1960년대가 거의 저물어갈 무렵이었다.
반면에 방림동 안쪽은 마을 역사도 깊고, 마을도 여러 뜸으로 이뤄져 있었다. 삼일아파트 동쪽인 방림동 443번지 일대엔 앵당마을이 있었고, 광명그린아파트 동쪽엔 운룡촌이 있었다. 예전 차고약별장(현재의 봉선동 동아여고 자리)으로 소풍을
다녔던 기억이 생생한 50대 이상의 광주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 소풍길에 한두번쯤 운룡촌에 눈도장을 찍었을 것이다.
한편, 이 모든 방림동 얘기의 진짜 발원지는 따로 있었는데 ‘원방림’마을이 그곳이다.
제1순환도로 혹은 광주의 자매결연도시인 타이완의 타이난을 기념하는 뜻에서 이름 붙여진 대남로(臺南路) 북쪽,
언덕에 자리 잡은 동네가 원방림이다.
원방림이 마주한 곳, 지금의 명지맨션 자리도 예전에는 산이었다. 저 목포의 유명한 산과 이름이 같은 유달산이었다.
물론 목포의 유달산만큼 유명하지는 않았겠지만 이 일대 사람들에겐 참 의미 있는 공간이었을 터.
한편, 원방림과 유달산 사이는 온통 밋밋한 들판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밋밋들, 맷맷들이라 했다. 하지만 토박이들은 그저 지형이 밋밋해서 그런 이름이 생겨났다고 믿지 않았다. 그들이 오래전 할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로 이곳은 원래 바다였단다. 그리고 미역을 땄던 이유로 이곳을 밋밋들이라 했다는 것. 생뚱맞고 과장된 얘기처럼 들리지만 이런 신화 같은 얘기를 잃어버린 우리에게 지금의 밋밋들은 예전보다 훨씬 더 밋밋하게 보인다.
어떻든 이런 밋밋들에 마치 바다의 등대 같은 구실을 하는 것이 있었다. 방림초교 근처 광명아파트가 들어선 고지대에는 원래 크고 오래된 버드나무가 있었다. 나무는 어른들이 한 아름으로 채 껴안을 수 없을 정도로 덩치가 컸다고 한다. 아파트가 들어서기 직전까지 있었다고 하는데 물론 지금은 베어지고 없다.
옛 나무만 없어진 것은 아니다. 옛집들도 없어진 게 많다. 원방림 근처에는 예전 제중병원 의사였고 미군정 때 전남도지사를 지냈던 최영욱이 살던 집이 있었다. 과수원을 끼고 세워진 이 집은 일제시대엔 드물게 실내에 수도가 들어왔던 집이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에 아파트가 들어서는 바람에 옛 지도를 들고 가도 그 장소를 짚어내기 어렵게 됐다.
한편, 방림의 서쪽은 봉선동과 만난다. 그 경계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자연지형이 없다. 그저 건물과 건물 사이로 그려놓은 반듯한 선들만이 방림과 봉선을 가른다. 그래도 그 경계선을 그을 때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사실 그 경계선은 예전에 방림과 봉선을 가로지르던 개울을 기준으로 삼았다.
주변 산자락에서 흘러든 개울들이 오래전부터 방림과 봉선을 나눴고 비록 개울의 형태를 꼭 따라 그려낸 것은 아니지만 얼추 그와 비슷한 축선에 맞춰 지금의 두 동네 경계선이 그어졌던 것이다. 이런 선들은 단지 두 동네를 가르는 경계선이어서 중요했던 것은 아니다. 이곳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마셨던 물, 즉 생명의 또다른 근원을 나타내줬기 때문이다.
장맛비가 일상의 기억을 뒤엎고 오랫동안 묵혀놓았던 기억을 들춰내듯 하여 잠시 방림동 얘기를 꺼내봤다. 하지만 이게 방림동 얘기만은 아닐 것이다. 변변한 셔터조차 달지 않는 동네슈퍼에서, 아직 두툼한 가죽에 대고 면도날을 가는 낡은 이발관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의 묵은 얘기들을 들어보자. 비록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았을망정 같은 기억의 유전자를 나눠가질 때 우리는 이 도시 혹은 동네의 진짜 주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조광철 <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본 기사는 '광주드림'사의 제공에 의해 게재됨을 알려드립니다)
2009.07.21. 00:15 아나사랑
○ 지리 역사적 배경
(남구문화원 전문) 동명의 유래는 방림1동과 거의 유사하고 다만 방림2동 지역은 밖방림, 밭방림, 늘리리마을이라 불렀던 새방림이었다. 시가지는 남쪽에서 뻗어온 치마봉과 ‘회룡고조’의 명당이 있다는 고조부리(고조봉) 등성이를 중심으로 동편과 서편, 북편으로 형성되어 있다. 즉 동편은 광주천 천변좌로를 따라 대체로 단독책지지구이며 방림동사무소, 우영타워 등이 있다. 서편은 신시가지로 삼일, 송림, 광명그린, 모아, 금원, 라인효친 등 신흥아파트단지와 잘 정비된 단독택지지구가 있다. 북편으로는 방림1동과 인접한 주택지구로 광명아파트, 방림동천주교회, 방림초등학교가 있다.
동의 영역을 보면 동남쪽에서 북서쪽으로 흐르는 광주천의 서쪽으로 자리하고 있다. 즉 남쪽에서 북쪽으로 곧장 흘러온 광주천이 증심사천과 합류하면서 서쪽으로 90도 굽이돌아 방학교를 지나면서 다시 북서쪽으로 흐르는 광주천의 서쪽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광주천을 경계로 지원동, 학동과 구분된다. 남쪽으로는 동일전자정보고등학교 남쪽으로 치마봉과 경계한 동구 용산동과, 라인효친아파트 남쪽으로으로 봉선동 접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모아아파트 서쪽 담장과 봉선중길 일부, 유달1길 일부를 경계로 봉선1동과 접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낙향4길과 학림길을 중심으로 방림1동과 접하고 있다. 동의 극동은 방학2길 입구(245번 건물)동쪽 광주천 건너로 남문로와 접한 곳이다. 극서는 유달1길이며 근남은 치마봉 정상이다. 극북은 학림교와 천변좌로가 만나는 지점이다.
치마봉 능선에는 여러 학교가 잡고 있는 점이다. 산등성이에 숭의중, 숭신공고, 동일전자정보고, 설월여고가 있고, 봉선동의 동아여중고, 농아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동의 역사는 1970년대까지 방림1동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즉 1930년대 양림동과 경계선을 따라 경전선 철도가 놓였지만, 그 후에도 오랫동안 이곳은 벌거숭이산들에 둘러싸인 한적한 농촌경관을 유지해 왔으며, 고조봉 줄기 너머 광주천변 쪽은 여름철이면 으레 침수피해를 입는 오미 땅으로 남아 있었다.
1960년대 도심근교 값싼 거주지로 많은 영세민들이 들어와 살면서 인구가 증가했고, 1970년 시내 10개 동을 분리하면서 이곳도 방림1동과 2동으로 분리될 만큼 동세가 커졌다. 또 80년대 중반 방림 ․ 봉선지구가 대단위 택지로 개발되면서 주로 고조봉 능선의 서쪽지역(옛 유안동 마을)을 중심으로 아파트들이 거주하는 거대동이 되었다. 이에 따라 1990년대 1월 이 가운데 6천여 세대(2만 7천명)만을 방림2동으로 남기고, 나머지 5천여세대(2만 3천명)는 봉선동으로 따로 분리했다. 이처럼 옛 유단동이 신흥 아파트촌으로 상전벽해의 변화를 보이는 것과 달리 광주천변 쪽은 대체로 개발이 미진하여 영세민들의 밀집주거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아울로 도로 등 기반시설이 낙후되어 이곳에는 1980년대 중반까지 밖방림마을(큰방림이라고도 했음)과 동구 학동 사이에 광주천을 가로지르는 이른바 뽕뽕다리가 있을 정도였다. 이 다리는 당시까지 광주천에 남아 있던 유일한 뽕뽕다리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86년 이 다리를 철거하고 광주천을 횡단하는 17번째 철근 콘크리트 교량으로 교체했는데, 이것이 지금의 방림교이다.
지역내 문화유적으로는 숭신공고 밑에 서강사라는 사우가 있다. 이 사우는 파평 윤씨들이 시조인 고려 태사공 윤신달과 여진족의 침입을 막고 동북 9성을 개척한 윤관 등을 배향하기 위해 건립했다. 『광주의 문화유적』(1990)에는 이 사우가 선조 7년(1574)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이 사우에 딸린 파평 윤씨의 재실로 경모재도 있다. 한편 옛 유안동에는 순천 박씨로 중종반정 당시 공을 세워 정국공신 승평군에 녹훈되었던 박이온의 부조묘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박이온의 행적은 역대『광주읍지』에 그 기록이 있다.주요 아파트와 시설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아파트는 우영타워, 송림, 송학맨션, 광명, 금호맨션, 삼일, 송림맨션, 송림, 광명그린, 금원, 모아, 라인효친등이 있다. 노인당은 금원, 송림, 방림부녀, 수용라인효친, 삼일, 수용취성, 모아, 방림등이 있다. 교회는 사랑의, 방림동천주, 영광, 방림, 산성, 새언약, 가나안, 주님의, 방림천부등이 있고, 절로 대법사, 옥련사가 있다. 메리야스를 생산하는 동서섬유도 있다. 금융기관으로는 방림동새마을금고, 광주은행방림동지점, 방림신용협동조합, 한일은행방림출장소 등이 있다. 기타 사회복지법인으로 전남성로원이 있다. 공동체로 밋밋들회가 있다.
전해오는 주요 지명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 거북등 : 방림 남쪽에 있던 등성이로 거북 형국인데 현재 주택지가 되었음
․ 송장등 : 고조부리 서쪽에 있는 등성이
․ 방학교 : 방림동과 학동은 연결하는 광주천에 있는 교량으로 동명을 한 자씩 취하여 이름하였다. 우영타워 부근에 있다.
․ 방림교 : 송림아파트 주변의 송림1길에서 광주천을 건너 학동삼거리1길로 통하는 광주천의 교량이다.
․ 학림교 : 학동의 학림다리길과 방림동의 학림길을 이어주는 광주천에 있는 교량이다. 동 이름을 각각 한 자씩 취하였다. 천변좌로와 만나는 학림교는 방림1동, 방림2동 학동의 경계지 이기도 하다.
○ 유물과 유적
■ 서강사
방림2동 82-1번지, 윤정복 소유 사당, 1574년 초건, 해방후 재건, 경모재(강당)과 묘정비(1974건립)가 있다. 서강사는 방림동 82-1 숭신공고 아래편 구릉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향 인물은 고려 태사공 삼한공신 윤신원을 주벽으로 하여 개국공 문숙공 윤광, 호부상서 문강공 윤언이, 남원백 벽송 윤위, 함안백 행촌 윤돈령, 평부원군 문현공 윤요 등 6위를 배향하고 있다. 건물의 건립시기는 1574년 조선 선조조에 초건되었다고 하나 현재의 건물은 해방이후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관리는 윤정복씨가 하고 있다. 건물의 구조를 살펴보면 3단의 화강석 기단위에 정평주초를 놓고 원주의 기둥을 세워 정면 3칸 측면 1칸의 골기과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네 귀에는 각각 3개씩 처마를 받치는 활두를 세웠으며, 창방위의 주두에는 뻘목을 결구하고 평주와 평주 사이에 1개의 변형 소로를 끼워 장혀와 납도리를 가구하였다. 내부 천정은 우물천정으로서 2고주 5량집이다. 창호는 좌우 편문으로 되어 있고 중앙은 2분합겹문으로 교살창으로 장식하였다. 안반 밑에는 머름을 두고 상인방 위에도 머름을 설치하여 안상의 무늬를 넣었다. 처마는 평고대를 끼워 겹처마로 되어 있고 포작은 2익공식을 따록 있다. 전면에는 단청이 비교적 잘 되어 있으며, 대문은 평삼문이며, 배향일은 매년 음력 3월 18일이다.
■ 경모재는 방림동 82-1번지의 서강사 강당이며, 건물 우측에는 서강사 묘정비, 좌측에는 서강사창건기실비가 세워져 있다. 건립시기는 상량문의 기록으로 보아 단기사천삼백일년(1968)에 해당된다. 건물의 세부적 특징을 보면 화강석으로 돌계단을 1.8m 높이로 먼저 기단을 조성한 후 그 위에 모기둥을 세우고 정면 5칸 측면 1칸의 일식기와 올린 8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내부구조를 보면 중앙에는 대청을 조성하고 좌우에는 온돌방을 배치하였으며 분합문으로 마루와 온돌방으로 구획하였다. 천장은 우물천정으로 되어 있으며, 사다리꼴 판매공을 종보위에 올려 각구한 5량집으로 되어 있다. 주두에는 장혀와 납도리만을 가구하였으나 전면 좌우 퇴관에는 소로와 창방을 덧붙였다. 창호는 좌우 각 1칸씩은 2분합겹문 중앙은 4분합문으로 되어 있으며 띠살창을 장식하였다. 온돌방 좌우에도 2분합문으로 출입문을 두었으며, 뒤편에는 2분합문을 2개 내고 온돌방 뒤편에는 봉창을 달았다. 전면에는 최근에 비바람을 막기 위해 유리창을 내었으며, 대문인 필식문은 소슬대문으로 홍살, 귀문 등을 목각하여 장식하였다.
마을 노인당 대표로 나온 김용운입니다. 제가 주월동 봉선동에 산지는 60년이 되었습니다. 원래 전라남도 광산군 효리면이라고 해서 봉선리였습니다. 새 봉자에 신선 선자를 사용하였습니다. 주월동은 원래 주월리라는 동칭이 생겨서 분리가 되었습니다. 현재 이 자리는 유안동이고 울렁춘?이라는 자리입니다. 울렁춘의 유래나 유안동의 유래는 살피지 않고, 제가 아는 마을은 원래는 옹정입니다. 국제호텔 위의 자리 현재 주월중학교가 있는 자리가 옹정부락이고 그 앞이 이성부락입니다. 그런데 제가 나고 자란 곳은 옹정부락이기 때문에 그때 그 유래를 625사변을 거치고 그때 저는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유래를 이야기 한다면 현재 지금 제석산 높은 곳이 곤지몬달이라고 해서 그 삶이 봉우리가 졌습니다. 어느날 제석이라는 명칭이 되었다. 제가 알기로는 제석이라는 명칭을 제가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디서 나왔는가 했더니, 제가 그 유래 설명을 하지 못하고, 옹정이라는 곳을 먼저 말씀 드리겠습니다. 옹정하면 저수지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병아리를 길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옹자가 옹기옹자가 아닌 병아리와 연관된 옹자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샘 정자입니다.
예전 남구청 자리에 저수지가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는 저수지 물을 받는 것이 방죽 안이라고 해서 방죽 안으로 통칭이 된 것으로 압니다. 그 다음에 불록에 다른 부락이 있어요. 그리고 이쪽이 대밭이 많은 유안동이 있어요. 아까 이야기드린 이 자리는 울렁춘자리죠. 그리고 방림동 자리가 일성동이라고 통칭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올라가면 현재 모아1차 뒤에 보면 소나무 몇 그루가 있는 자연공원이 있다. 그곳이 용정부락이라고 한다. 처음에 이야기한곳은 옹정이고 이곳은 용정이다. 그래서 이곳에 마을 형성이 옛날부터 있었다. 봉선리가 그대로 통칭이 되어서 봉선동이 되었다고 안다. 아리랑고개 뒤로 저수리가 되었다. 저수리가 되었다가, 도시계획되면서 그것이 없어지고 현재 이마트 자리 밑에가 저수지가 되었다. 그곳이 구획정리 되면서 도로가 나오면서 이곳이 완전히 봉선리로 해서 학군이 조성이 된 것은 남구에서 동아여고, 문성고가 생기면서 학군조성에 큰 역할을 했다.
성실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인정받다
그리고 조대가 저쪽에 있었기 때문에 성실한 사람이 걸어다녔다. 이곳에서 교육대학을 걸어다니고, 전대도 걸어다녔다. 걸어다니다 보니 이곳에서 다니는 사람은 건강하고, 성실성이 인정이 되었다. 그래서 학교에 가면 공부를 잘 했다고 인정을 받았다. 저는 광주공고를 다녔다. 매일매일 40분 거리를 왕복을 하였다. 그런식으로 해서 조대까지 걷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였다. 그런정도로 우리가 조성이 되었다고 이야기를 드리겠다.
봉선2동
1. 역사
○ 유래 : 동명은 조봉리(朝鳳里)와 이선리(伊仙里)의 마을명을 각각 취해 봉선리(鳳仙里)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조봉마을, 이선마을, 불로마을이 있었다. 조봉(朝鳳)은 문성중고등학교에서 대화아파트가 소재하는 골짜기 입구에 위치했던 마을로 그 본래의 뜻은 좁은 골짜기에 있어 좁은골>조봉골>조봉(朝鳳)으로 변한 듯하다. 이선(伊仙)은 원래 의미는 독(바위)이 서 있는 마을에서 연유된 것으로 추정된다. 바위가 마을 주변에 서있는 것으로 보고 독이 선 마을이라 했다가 독자가 탈락하고 이선마을이 된 것이다. 한자로 이선(移仙)이나 이선(伊仙)으로 쓴 것을 보면 우리말을 다만 한자로 표기한데 지나지 않는다. 독이선마을>독+이선+마을>이선마을>이선(移仙)>이선(伊仙)으로 변천된 지명으로 볼 수 있는데 방죽안이라고 한다. 불로(不老)의 의미를 살펴보면 산의 옛 말 중에 받, 붇이 있는데 붇+늘음 곧 산 능선이 뻗어내린 곳에 위치한 마을이란 뜻을 담고 있다. 산능선이 늘어진 곳>붇+늘음>불+늘음>불(不)+늙음(老)>불로(不老)로 변천된 지명인 듯하다. 주민들은 한자말로 풀어 늙지 않고 사는 동네라고 여기고 있다.
○ 역사 : 이 동의 역사는 대략 1995년까지는 봉선1동과 같다. 다만 본래 서쪽의 장생잇산의 경사면에 있던 장산(長山, 장생이), 옹정(甕井, 도가지시암), 이선(伊仙, 방죽안)마을도 봉선동에 속한 자연마을이었으나 1973년 주월동 소속이 되었다. 그러나 봉선2동에는『호구총수』(1789년)에 기록된 조봉(鳥鳳,鳥奉,祖奉623번지일대), 불로(不老555번지일대), 유안(柳岸222번지일대), 부처울(부처골559번지일대)이 일부 남아 있다. 조봉마을 뒤 현 남구청자리에 일제시대 때부터 조봉저수지가 있었다. 삼익2차아파트 동편 133번지에도 1952년 축조된 유안저수지가 있었다. 이 저수지의 수원이었던 남동쪽 큰새골과 한새골은 포스코아파트외 여러 아파트가 위치하고 있다, 9km 정도 길이가 되는 극락천(極樂川)의 발원지이다. 이 개천은 백운광장을 거쳐 주월동 무등시장 앞으로 지나 광주신청사가 들어서 있는 계수마을에서 광주천과 합류했다. 지금은 개천의 전구간이 복개되어 그 자취를 찾기가 쉽지 않으나 군분로(軍盆路)라는 도로의 축선이 대략 그 물줄기와 일치한다.
1. 역사
○ 유래 : 동명의 유래는 조봉마을의 봉(鳳)자와 이선마을의 선(仙)자를 각각 취하여 봉선동(鳳仙洞)이라 하였다. 운룡(雲龍321~348번지일대)마을의 본래 의미는 구렁진 들에 위치한 마을이란 뜻이다. 구렁진마을>구렁+몰>구렁몰>구렁=구름=운(雲)+몰=물=미르(龍)>운룡(雲龍)이 된 것이다. 유안(柳岸)마을의 의미는 버등>버들>버떨>벋(벋들=柳)+떨(岸.벼랑.떨어지다)로 이루어진 이름으로 곧 산 능선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 역사 : 봉선동은 서쪽 자생잇봉에서 남쪽을 돌아 동쪽의 물동지산에 이르는 능선의 북쪽 경사면의 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택지개발 이전에는 서당골, 부처골, 샛골, 한대골, 방죽골의 시냇물을 받아 조봉제와 유안제로 농사를 짓던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이곳은 조선후기에 옹정면(甕井面)과 부동방면(不動坊面)의 접경지역으로 그 경계는 대략 지금의 대남로에서 봉선파출소로 들어가는 봉선중앙로 어간으로 추정된다. 즉, 이 도로를 경계로 동쪽은 옹정면, 서쪽은 부동방면의 땅이었다.
『호구총수』(1789년)에 따르면, 당시 옹정면에 속한 마을로 이 일대에는 이선촌(移仙村), 조봉촌(鳥鳳村), 불노촌(不老村) 등이 있었다. 이 밖에 용정(龍井소411~415번지일대)를 비롯하여 작은 동네가 여러 군데로 흩어져 있었던 추정되는데, 거주민 수는 매우 적어 옹정면 전체의 인구는 79호에 360여명이 살고 있는 정도에 불과했다. 옹정면은 19세기 중엽에 도천면(陶泉面)으로 바뀌었고, 1914년 부동방면의 일부 지역과 합해져 효천면(孝泉面) 봉선리로 불리게 되었다. 봉선이란 이름은 이 때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조봉(鳥鳳, 祖奉)마을과 이선(伊仙)마을의 글자에서 한 자씩 떼어내 지은 이름이었다. 그후 잦은 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라 1935년에는 효지면(孝池面) 봉선리으로 불렸으며, 1957년에는 봉주동(鳳珠洞) 관할지역이었다가 1970년에는 방림2동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3년에는 그
동안 봉선동 지역에 속해 있던 장생잇산 아래의 장산, 이선, 옹정마을이 주월1동으로 옮겨갔다. 1984년부터 87년 사이에 3천 가구에 1만여명을 수용할 규모의 서민주택공급을 위한 택지로 방림 ․ 봉선지구가 개발되면서 인구가 크게 늘었다. 급기야 1990년 방림2동에서 분리되어 봉선동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