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識에 대한 공부-나무위키
불교의 識에 대한 공부-나무위키
초기 불교에서는 마음 작용을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의 6식(識)으로 분류했다.
불교에서는 심왕(心王)과 심소(心所)라고 해서 의식작용의 본체. 객체에 대해 그 일반적인 상을 인식하는 정신 작용의 본체를 심왕이라고 부르고 그 심왕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심소이며, 오직 심왕에게만 '식'이 존재하고 심소는 심왕의 식에 따라서 식을 받아 정신작용을 일으키는 객체에 불과하다고 본다.
심왕에게 존재하는 식을 여섯 가지로 나눈 것이 보고(眼識)ㆍ듣고(耳識)ㆍ맡고(鼻識)ㆍ맛보고(舌識)ㆍ닿고(身識)ㆍ아는(意識) 인간의 기초적인 감각에 대한 6식이며, 유식종에서는 여기에 제6식(의식)을 세분화해서 말나식(末那識)[3]과 아뢰야식(阿賴耶識)[4]을 더하고 8식으로 설명한다. 여기에 또 암마라식(菴摩羅識, amala-vijnana)[5]과 건률다야식(乾栗陀耶識, hrdaya-vijnana)을 더해서 10식이 나왔다. 에기에 무량식(無量識)을 더해서 11식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말나식은 제6식(의식)과 아뢰야식의 매개가 되는 식인데 의(意)라고 번역되며, 끊임없이 인식하고 분별하고 생각하고 헤아리고 비교하는 마음 작용으로, 아치(我癡) · 아견(我見) · 아만(我慢) · 아애(我愛)의 네 번뇌와 항상 함께 일어나는 자의식이다. 아뢰야식은 말하자면 무의식으로, 인간이 과거에 경험한 인식, 행위, 학습 등을 모두 마음의 심층부에 가라앉혀 저장해두고 있는 마음의 잠재력을 말한다. ‘장식(藏識)’이라 한다. 과거에 경험한 인식 · 행위 · 학습 등을 저장하고 있는 마음 작용으로, 심층에 잠재하고 있다. 이러한 과거의 경험들이 아뢰야식에 잠복 상태로 저장되어 있는 잠재력을 종자(種子) 또는 습기(習氣)라고 한다. 유식삼십론송에서는 보고(眼識)ㆍ듣고(耳識)ㆍ맡고(鼻識)ㆍ맛보고(舌識)ㆍ닿고(身識) 하는 5식이 모두 아뢰야식에 의해서 조건에 맞춰 일어나며, 어느 때는 함께 일어나고 어느 때는 함께 일어나지 않는데[6] 파도(전5식)가 물(아뢰야식)에 의지해 일어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즉 전5식은 조건에 따라 심층에 잠재하고 있는 아뢰야식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바깥 대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자동적으로 그 대상을 덧칠해서[7] 자기 나름대로 지각한다. 즉, 그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 보고 피부에 닿고 하는 다섯 가지 식은 모두 아뢰야식이라는 색안경을 통해 바깥 대상을 지각한 결과라는 것이다.
말나식은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닿고 하는 식처럼 바깥의 대상을 인식하는 게 아니라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해서 일어나고, 생각하고, 헤아리고, 비교하는 것을 본질로 삼는다. 자신에 대해 어리석은 아치, 자신을 독립적인 존재라고 착각하는 아견, 자신을 높이고 남을 낮추는 아만, 자신만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아애와 항상 함께 일어나기 때문에 ‘에고’의 본바탕이 되며, 아뢰야식에 의지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과거의 경험들과 함께한다. 따라서 말나식의 내용은 ‘에고’를 바탕으로 한 상상 · 허상이고, 이것은 바깥 대상과 관계없이 그냥 내면에서 떠오르는 번뇌이고 분별이고 자의식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말나식이 일어나면 곧바로 알아차리고 잠깐 ‘틈’을 가져야 한다. 이 틈이야말로 말나식을 약화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예를 들어 남에게 화를 내려거나 부정적인 말을 하려고 할 때, 그것을 즉각 알아차리고 잠깐만 틈을 가지면 그 충동이 누그러진다. 이 틈을 계속 반복해서 가지면, 에고가 점점 약화되고 감소되어간다. 이게 유식학의 지향점이다.
다시 말하면, 상상과 허상을 따라가지 않고, 자신의 선입견이나 감정으로 대상을 채색하지 않는 게 마음의 소음을 줄이는 길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나식이 일어날 때, 즉각 그것을 알아차리고 한발짝 물러서서 잠깐 관조하는게 말나식을 약화시키는 길이다. 말나식은 ‘에고’의 본바탕이고, 이 에고가 괴로움의 뿌리이다. 에고는 자신을 드러내고 내세우려는 마음의 소음이다.
열반에 이르는 데 장애가 되는 가장 근본적인 번뇌인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도 에고를 바탕으로 해서 일어나고,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도 에고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말나식이 일어나자마자 자동으로 반응하지 않고, 그것을 자각해서 누그러뜨리는 게 수행의 시작이다.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아라한,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멸진정, 모든 번뇌를 떠난 출세간도에서는 말나식이 일어나지 않는다.
아뢰야식은 너무나 미세하고 마음의 심층에 잠복된 상태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감지할 수 없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끊임없이 흐르는 것이 급류 같다. 그런데 잠복 상태에 있는 아뢰야식의 종자가 어떤 자극으로 의식에 떠오르면 탐욕 · 분노 · 고락 · 선악 등으로 나타난다. 비유하면 무슨 씨앗인지 잘 구별되지 않는 좁쌀 같은 갖가지 씨앗이 바구니에 가득 담겨 있는데, 그 하나를 집어내어 물을 주면 싹이 돋아나 그 본색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수행자는 분노가 일어날 때 즉각 알아차려서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 따라가지 않으며, 한 걸음 물러서서 그냥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 즉 분노의 종자에 물을 주지 않음으로써 그 종자의 잠재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이런 통찰을 반복하면 그 종자는 말라 죽게 되는데, 그 온갖 종자가 다 말라 죽은 경지에 이른 성자가 아라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