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일본과 독일, 세계

일본의 근대화ㅡ 일본의 관점과 나의 비전문가적 관점

골뫼사니 2024. 10. 10. 19:54

메이지 정부는 주로 구미 열강 국을 따라 잡기 위해, 개혁을 모색하였다. 학제, 징병령, 지조개정(地租改正)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고, 부국강병의 기치 하에 유럽과 미국의 근대 국가를 모델로 하여, 민주화와 인권 운동을 탄압하고 천황이 주도하여 일방적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적 강화에 노력하였다.

또한, 유신 정부는 서양의 여러 제도를 연구하기 위해 이와쿠라 도모미를 정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등을 부사로 하는 이와쿠라 사절단을 구미에 파견하지만, '잔류 정부'로 불리며 일본에 남은 사이고 다카모리, 이노우에 가오루, 오쿠마 시게노부, 이타가키 다이스케, 에토 신페이, 오키 다카토 등에 의해서, 차례차례로 개혁은 진행되어 갔다.

주 개혁으로는 학제(学制) 개혁, 지조(地租) 개정, 징병령, 그레고리력 채용, 사법 제도 정비, 단발령 등이 있다. 다만, 이런 개혁은 급격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모순도 적지 않았고, 사족이나 농민의 불만을 사서, 후에 정한론으로 이어졌다 라고도 말해진다. 구미 사절에서 귀국한 이와쿠라나 오쿠보가 정한론을 지지하지 않았고, 더욱 더 오쿠보 밑으로 내무성이 설립됨으로써 여러 개혁의 정리가 이루어지게 된다.

또한, 같은 시기에 민간에서 이루어진 문명 개화의 움직임, 육식 보급과 철도 개통 등과 함께, 신시대 '메이지'의 분위기가 양성되었다.

경제 산업분야에선, 부국강병, 식산흥업의 슬로건 아래, 도미오카 제사장을 비롯한 관영공장이 만들어지는 등, 정부 주도의 산업 육성이 시작되어, 서양식 공업 기술이 도입되었다. 금융제도에서도 통화단위로 '엔'을 도입(1871년), 국립은행 조례에 의한 국립은행(내셔널 뱅크)을 거쳐, 통화 발행권을 독점하는 중앙은행으로써 일본 은행을 설립(1882년) 하는 등, 자본주의적 금융제도의 정비도 이루어졌다. 유통 분야에서는, 우편제도, 전신망의 정비, 철도 및 선박 운수(민간 우편 기선 미쓰비시 회사와 국책 회사인 공동 운수 회사의 경합을 거쳐 일본 유센 회사가 되었다.) 등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자본 활동에는, 실직한 대신 녹봉을 얻은 화족의 자산에 의한 투자 활동도 배경에 있었다.

이러한 개혁에는 적극적으로 서양 문명의 선진 제도가 받아들여지는 과정에서, '오야토이 외국인'이라고 불리는 외국인이, 기술 지도, 교육 분야, 관제, 군제 정비 등 여러 가지 분야에서 고용되어 근대국가 건설을 도왔다.

나의 생각

첫 번째로 일본은 미국 페리 제독과 통상조약(불평등)을 맺고 미국의 식민지로 전락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1861년부터 5년 동안 일어난 미국 남북전쟁으로  미국은 일본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존왕양이의 기치를 내세운 사무라이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지식인들은 서구의 위력적인 문물, 무기 등에 위축되었다. 그리하여 존왕은 하되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동도서기의 생각을 갖게 되었다.

두 번째로 일본이 서구의 식민지로 전락되지 못한 이유는 서양 강국들의 세력 충돌로 아시아 변방까지 서구 제국주의 세력권이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은 16세기부터 존속해온 서양 세력  특히 네델란드와 무역을 통해 근대화의 기틀(의술, 과학 지식 등)을 마련하였다

세 번째는 어찌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부국이 되면 만족해야지 조선을 침략하려는 야욕을 갖게 되었나 하는 점이다
일본의 전국 통일 과정에서 존재한 도쿠가와 가문과 도요토미 가문의 대립이 있었다
사쓰마 번, 죠슈 번, 도사 번은 서군으로 참여한 토요토미 사후 벌어진 세키키하라 전투에서 동군인 도쿠카와 가문 패한 세력들이다. 이 세 번은  도요토미의 야욕을 계승한 세력들이다. 도요토미  일당은 대륙 진출의 야망을 가진 군국주의적 성향을 가진 자들이다.
현재도 이런 제국주의적, 정한론은 일본인의 잠재의식 속에 존재할 것이다. 이를 우리는 항상 경계하고 놓치지 않아야 한다.
일본이 자국의 번영을 목표로 하고 타 국가와 병존을 추구했을 때  우리 나라는 그들과 상호 친근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이 침략적 제국주의로 방향을 틀었을 때 우리는 국가의 안위를 제일로 여겨 일본의 침략에 대응해야 한다.

네 번째로   우리의 근대화는 청나라의 울타리 속이었다는 점, 댱대 조선의 대다수 지식인들은  성리학적 가치관으로 인해 세계(문명의 진보 수준과 세계 정치 지형에 대한 침략적 제국주의적 동향)를 바로 볼 수 없는 한계를 갖게 되었다. 지식인들은 청나라를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청나라 너머의 세계를 보지 못한 것이다. 청나라를 통해 세계를 보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일본의 집요한 방해, 즉 서구와  조선의 접촉을 지리상 이점을 이용해 막았다는 점이다.
위아래가 다 막혀 있는 상황에서 근대화 즉  정신과 물질의 변혁은 각자 도생으로 인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쇄국과 개항, 성리학과 동학,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분리로 인해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을 받았다.
참으로 아쉬운 점은 하멜이 제주도로 표류해왔을 때 그들을 통해 서국의 문명 발달과 변화를 알아내고 그에 따른 대응을 못했다는 점이다.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대륙을 넘어 세계에 대한 강한 지적 호기심, 바다 일본 너머에 어떤 세상이 있을까 하는 탐험적 정신이 아쉬운 것이다. 정조 이후 능력없는 지배자 왕과 권신들 현실에 순응하고 자기들만의 안위를 생각하는 자들이 현실 권력을 틀어쥐고 있었던 것이 그 내재적 원인일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의 발달과 상업의 발달이 서구와의 접촉면을 늘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시다 쇼인
ㅡ죠슈번의 몽상가이다. 그는 맹자를 읽고 인간의 평등을 천황의 그늘 아래에 둔 사람이다.
서양을 배워 일본의 부강을 위해 홋가이도 류뀨 필리핀 누손섬, 북쪽의 여러 섬들, 한국, 만주 , 호주까지 정벌하는 것이 일본의 길이다라고 주장했다.

나의 생각2
ㅡ 한국의 비극은 여기서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