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시인의 산정리 일기, 비녀산, 빈산, 성자동 언덕의 눈
-산정리 일기/김지하-
나를
여기에 묶는 것은 무엇이냐
뜨거운 햇발 아래 하얗게 빛날 뿐
고여 흐르지 않는 둠벙 속에 깊이 숨어
끝끝내 나를 여기에 묶는 것은 무엇이냐
눈부신 붉은 산비탈
간간이 흔들리는 흰 들꽃들조차
가까이 터지는 남포 소리조차 아득히 멀고
흙에 갇힌 고된 노동도 죽음마저도
나를 일깨우지 않는다
흐린 불빛이
가슴을 누르는 소주에 취한 밤
목쉬인 노래와 칼부림으로 지새우는 모든 밤
뜬눈으로 지세우는 알 수 없는 몸부림에
기어이 나를 묶는 것은
아아 무엇이냐
개어 있지도 잠들지도 않는
끝없는 소리 없는 이 어설픔은 무엇이냐
밤마다 취해서 울던
붉은 눈의 해주 영감은 죽어버렸다
열여섯 살짜리 깨곰보도
취한 채 잠을 이루지 못한다
어디에 와 있는 것이냐
나는 살아 있는 것이냐
무딘 느낌과 예리한 어둠이 맞서
섞이지 않는다 부딪히지도 않는다
또다시 시퍼런 새벽이 온다
남포가 터진다
흙차가 돌아간다
나는 흙 속에 천천히 깊숙이
대낮 속에 새하얀 잠의 늪 속에 빠져 들어간다
이것이 대체 무엇이냐.
비녀산
기름진 벌판도 없네 비녀산 밤봉우리
외쳐부르는 노래는 통곡이었네 떠나갔네
치솟아 오르는 맨드라미
터질듯 터질듯
거역의 몸짓으로 떨리는 땅
어느 곳에서나 어느 곳에서나
옛 이야기속에서는 뜨겁고 힘차고
가득하던 꿈을 그리다
죽도록 황토에만 그리다
삶은
일하고 굶주리고 병들어 죽는것.
삶은 탁한 강물속에 빛나는
푸른 하늘처럼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것
송진타는 여름 머나 먼 철길을 따라
그리고 삶은 떠나가는 것.
아아 누군가 그 밤에 호롱불을 밝히고
참혹한 옛 싸움에 몸바친 아버지
빛바랜 사진앞에 숨죽여 울다
박차고 일어섰다
입을 다물고
마즈막 우러른 비녀산 밤봉우리
부르는 노래는 통곡이었네 떠나갔네
무거운 연자매 돌아 해가고
기인 그림자들 밤으로 밤으로 무덤을 파는 곳
피비린내 목줄기마다 되살아오고
터질듯한 노여움이 되살아오고
낡은 삽날에 찢긴 밤바람
외쳐대는 곳
여기
삶은 그러나
낯선 사람들의 것.
빈 산
빈 산
아무도 더는
오르지 않는 저 빈 산
해와 바람이
부딪쳐 우는 외로운 벌거숭이 산
아아 빈 산
이제는 우리가 죽어
없어져도 상여로도 떠나지 못할 아득한 산
빈 산
너무 길어라
대낮 몸부림이 너무 고달퍼라
지금은 숨어
깊고 깊은 저 흙 속에 침묵한 산맥 속에
숨어 타는 숯이야 내일은 아무도
불꽃일 줄도 몰라라
한줌 흙을 쥐고 울부짖는 사람아
네가 죽을 저 산에 죽어
끝없이 죽어
산에
저 빈 산에 아아
불꽃일 줄도 몰라라
내일은 한 그루 새푸른
솔일 줄도 몰라라.
성자동 언덕의 눈-김지하
지금도 너는 반짝이느냐
성자동 언덕의 눈
아득한 뱃길 푸른 물구비 구비 위에
하얗게 날카롭게
너는 타느냐
산 채로
산 채로 묻힌 붉은 흙을 헤치고
등에 칼을 꽂은 채 바다로 열린 푸른 눈
썩은 보리와 갈라진 논바닥이 거기서 웨치고
거기서 나의 비탄은 새파란
불꽃으로 변한다 너는 타느냐
마주한 저 월출산 아래 내리는
저 용당리 들녘에 내리는 은빛
비행기의 은빛 비늘의 눈부심, 독한 눈부심 위에 아아 푸른 눈
침묵한 아우성의 번뜩임이 거기서 타느냐
지금도 너는 반짝이느냐
성자동 언덕의 눈
하얗게 날카롭게 너는 타느냐.
용당리에서-김지하
용당리에서의 나의 죽음은
출렁이는 가래에 묻어올까, 묻어오는
소금기 바람 속을
돌 속에 흐느적거리고 부두에서
노동자가 한 사람 죽어 있다
그러나 나의 죽음
죽음은 어디에
무슨 일일까
신문지 속을 바람이 기어가고
포래포래마다 반짝이는 내 죽음의
흉흉한 남쪽의 손금들 수군거리고
해가 침몰하는 가래의 바다 저 끝에서
단 한 번
짤막한 기침 소리 단 한 번
그러나 용당리에서의 나의 죽음은
침묵의 손수건에 묻어올까
난파와 기나긴 노동의 부두에서 가마니 속에
노동자가 한 사람 죽어 있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작은 손이 들리고
물 위에서 작고 흰 손이 자꾸만
나를 부르고.
황토길/김지하(시집 황토/1970)
황톳길에 선연한 / 핏자욱 핏자욱 따라 /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 두 손엔 철삿줄
뜨거운 해가 /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나는 간다 애비야 / 네가 죽은 곳 /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밤마다 오포산에 불이 오를 때 /울타리 탱자도 서슬 푸른 속니파리
뻗시디 뻗신 성장처럼 억세인 / 황토에 대낮 빛나던 그날
그날의 만세라도 부르랴 / 노래라도 부르랴
대숲에 대가 성긴 동그만 화당골 / 우물마다 십 년마다 피가 솟아도
아아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 / 총칼 아래 쓰러져간 나의 애비야
어이 죽순에 괴는 물방울 / 수정처럼 맑은 오월을 모르리 모르리마는
작은 꼬막마저 아사하는 / 길고 잔인한 여름
하늘도 없는 폭정의 뜨거운 여름이었다 / 끝끝내
조국의 모든 세월은 황톳길은 / 우리들의 희망은
낡은 짝배들 햇볕에 바스라진 / 뻘길을 지나면 다시 메밀밭 / 희디흰 고랑 너머
청천 드높은 하늘에 갈리든 / 아아 그날의 만세는 십 년을 지나
철삿줄 파고드는 살결에 숨결 속에 / 너의 목소리를 느끼며 흐느끼며
나는 간다 애비야 /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아침바다/고은 (두고 온 시/2002)
향수는 오랜 멍에였다/ 왜 우리는 지난날의 느티나무 옹이만을 서럽게 이야기하는가
왜 우리는 지난날/ 그 어둑어둑한 저녁 외딴 마을만을 못내 그리워하는가
천둥소리여 꾸짖어다오/ 왜 우리는 오늘이 아닌/ 어제의 저문 밀물만을 노래하는가
아 모든 비애여 과거여
왜 우리는 두고 온 밤하늘 별들만 숭상하는가
겨울잠의 곰이 어둠속에서 새끼를 낳는다
밤새도록 잠 못 이루는 번뇌 있다면/ 거기 얽매여서는 안된다
살아온 날들/ 그런 번뇌 있어야 했다면/ 이제 벌떡 일어나
새벽 먼동 앞에서 노여운 신발끈을 매어야 한다
그리하여 새로 찾아오는 시간 속으로 걸어가야 한다/ 가야 한다
가야한다/ 아침 푸른 노고지리여 너도 솟아올라 노래하라
태어난 곳 자라난 곳은 미개이다/ 지난날의 하염없는 마루턱이 아니라
오늘의 거리를 가야 한다/ 오늘과 내일의 성난 바다 한쪽을 건너가야 한다
돛폭 가득히 바람 친다
왜 우리는 오래된 고향의 유골을 떠나지 못하는가
내 조상이 무덤 속에서 말한다/ 어서 네 세상으로 가거라
네 낯선 항구/ 푸른 하늘 영 넘어/ 네 뜨거운 가슴팍 달구는 그곳
새로운 세월의 풀무 속으로 가거라
동해 연어들 살어리 살어리랏다/ 서해 조기 제비떼 살어리랏다
저 활짝 열린 아침바다/ 네 집이 거기 있다
보라 이토록 첫여름 초록빛 묻은/ 우리들의 순결한 시작만이
이 세상 땅끝 눈뜬 진리와 함께 있다 거기 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