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뫼사니 2022. 1. 7. 06:20

김우종 교수의  장백일교수에 대한 추억

<추모사>                   평론가  장백일 선생의 뒷모습

 

 

 

                                                                                                    김우종

 반세기 넘도록 이 땅에서 많은 독자들과 제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 온 한국문단의 큰 나무가  많은 업적을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젊은 시절에 나는 장교수의 뒷모습을 보며 프랑스의 명배우 장 개방을 연상했었다. 얼굴과 걸음 걸이도 그렇고 당찬 말솜씨가 흔히 말하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래서 프랑스 영화 속의 레지스땅스가 연상되기도 하고 이태리로 망명하여 숨어 지내다가 형사에게 끌려 가던 쓸쓸한 모습의 장 개방을 연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베레모는 사라지고 검은 머리가 백발로 변한 뒷 모습이 여전히 멋이 있었다. 나이 탓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등단한 1958년은 참으로 가혹한 시기였다. 전쟁 직후여서 누구나 폐허에서 겨우 살아 남아 밥이나 굶지 않으면 다행이던 시절인데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그는 문학평론가로 변신해서 그의 꿈을 실현해 나가고 있었다. 평론 활동을 통해서 우리의 현실을 보고 철학적 이념을 그같은 이론전개를 통해서 표현해 나가며 한국문학의 바른 길을 모색해 나갔다.

 그렇지만 그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그는 신춘문예를 통해서 화려하게 등단했지만 당시의 그의 평론활동은 나보다 훨씬 환경이 불리했다. 신문은 신인들을 등단시키기는 했지만 그것은 문예지가 아니기 때문에 문인들의 발표지가 되기는 지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춘문예출신은 발표지를 얻지 못해서 활동이 제한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는 많은 평론을 발표해 나갔는데 10여년이 지난 어느 날 참으로 황당한 사건으로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선포하고 영구독재 체제를 만들자 문단에서도 사회적인 참여운동이 확산 되었다. 물론 참여문학운동은 1960년초에 내 평론들이 시작이었지만 1974년 정월에는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운동이 문단 일각에서 일어나고 체포 고문 투옥사태가 벌어졌다. 반공을 국시(國是)로 한다는 헌법과는 달리 반공을 독재 정권 잘 해먹는 수단으로 삼던 정치군인들은 ‘문인가첩단’사건을 서빙고동 지하 고문실에서 날조하고 그 당시에 문학의 사회참여운동에 동참하고 있던 장백일 교수와 임헌연 그리고 나를 비롯한 3명의 평론가를 한데 묶었다. 소설가로서는 유신 반대운동에 먼저 앞장 섰던 이호철이 주동자로 찍혀 정을병과 함께 한데 묶여져 서대문 감옥에 처넣어졌다.

 첫 공판이 있던 날 오랏줄에 묶여 호송차에 실리기 전 장백일 교수를 보니 나도 물론 그랬었지만 그의 얼굴은 너무도 창백하고 예전의 장 개방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장선생, 너무 걱정하지 마, 죽는다고 해도 담담하게 받아 들일 각오를 해봐”

나도 하기 어려운 큰 소리를 하며 그를 달랬다.

 얼마 전에 사형수들을 봤었다. 나는 창살에 매달려서 그들이 사형장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손을 흔들었었다. 이 때 뜻 밖에도 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답례나 하듯이 손을 흔들던 사형수가 있었다.

 그 때 나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내게 그런 죽음이 온다면 나도 뒤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작별 인사를 하겠다고. 나는 그 때 그 생각을 하며 장교수에게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그런 말을 한 것이다.

 법정에서 인정심문이 시작되었을 때 판사는 장교수를 대학 시간 강사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장교수는 그냥 강사가 아니라 전임강사라고 고쳐 주었다. 전임강사는 조교수 부교수 교수와 함께 다 같이 정교수다. 그리고 그 자리는 참으로 어렵게 성취한 영광의 자리였다. 장교수는 나보다 네 살 아래인데 나는 이미 교수로서는 꼭대기까지 올라가 있었는데 그는 그 때 전임교수였으니 한 번 교수 되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갔었다. 간첩이라고 생사람 잡는 미치광이들한테 그 따위 직함은 굳이 정정을 요구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지만 참으로 어렵게 교수가 되자 마자 간첩이 되었으니 얼마나 분통이 터졌으면 “야 ,이 새끼들아 나는 당당한 대학 교수야”라고 말하고 싶어서 그랬을까!

 박정권이 무너지자 복직이 되고 나와 함께 독일 함부르그에 가서 국제 펜클럽대회에 참가한 후 관광을 시작했을 때 우리는 어느 대학 건물 앞을 지나게 되었었다. 거기 어느 유명철학자의 기념물이 있었다. 확실한 기억은 아니지만 금세기 최고의 철학자로 알려지기도 한 하이데커의 기념물이었던 것 같은데 장 교수는 이 앞에서 발을 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원래 철학도였으며 학창시절에 하이데커의 실존 철학에 너무도 심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았던 것같다.

 복권이 되고 다시 군사정권도 사라진 뒤에 그에게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피해보상에 관한 조사를 하는 정부기구로부터 ‘“민주 헌정질서를 위해 기여한 공로로 .........”라고 민주화운동 인사로 인정하는 문서가 전달되었다.

 그런데 이런 문서가 전달되고 만났을 무렵이었다. 헤어져서 집으로 간다고 전철역 계단을 밟고 내려가는 뒷 모습이 예전같지 않았다. 손잡이를 잡고 한 계단 한 계단 밟고 내려 가는 걸음이 너무 힘들어 보였다. 그리고 얼마 후 나도 힘들어졌다.

 어제 나는 오른 손에 지팡이를 들고 왼 손으로 손잡이를 잡으며 건국대학교 입구 전철역 계단을 걸어 내려 갔다. 장교수의 영안실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장교수는 나처럼 지팡이까지 짚지는 않았었는데 그렇게 나보다 먼저 가버렸다.

 검은 치마 저고리를 입은 장교수의 부인은 내 손을 잡고 울었다. 그렇게도 예쁘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얼굴도 40년 가까이 세월이 지나니 여전히 아름다운 윤곽은 지녔지만 나이를 속일 수는 없었다. 옆에 있던 딸을 보고 오히려 장교수의 예쁜 부인으로 착각할 뻔 했다. 나는 부인과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큰 일을 하고 갔습니다. 험한 세상 만나서 고생도 많았지만 그래서 더 빛납니다. ”

정말 장교수는 큰 일을 하고 갔다. 58년에 <현대문학론>으로 등단하고 <문학 혁신> <현대시의 방황과 그 실험> <현대시의 새로운 생태학적 도전>등 초기작에서부터 참으로 많은 평론을 하고 대학에서 많은 제자를 길러 내고 작고하는 날까지 그는 많은 후배들을 감싸고 격려하고 키워주며 한국문단의 거목으로 남아 있었다.

 나무는 고목이 되어 쓰러져도 그 잎과 줄기가 모두 썩어 땅에 묻히면서 다시 새 생명을 키우는 거름으로 남는다. 그는 이제 그 거름이 되어 영원히 우리 문단을 키워 나가는 새 길을 걸어 간 것이다. 등단 초기에 내 기억에 남아 있던 아름다운 뒷 모습, 그리고 백발이 되니 더 멋 있던 뒷 모습이 흘러가버린 과거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함께 아리게 내 가슴 속에 새겨져 있다. 이젠 너무 힘겹던 세상 살이도 다 끝났으니 저승에서 편히 쉬다가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