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증식 곽재구 김경후 성다영 신미나 유병록 윤재철 이근화 이기성 이도윤 조온윤 조용미
고증식 59년생
그만 분필을 놓을 때
시험이 끝났다 어떤 녀석들은 세 문제나 틀렸다 엉엉 부둥켜안고 어떤 녀석들은 세 문제나 맞혔다 방방 떠다닌다 그 사이에 엉거주춤 내가 서 있다 이쪽도 저쪽도 분명치 않게 오랜 새월 그 틈을 벌리는 일에 덩참해온 건 아닌가 반뼘 분필의 무게가 하교할 때가 다 돼서야ㅐ 시리게 와닿는 아침
이름값
1924년생 서운여사
서녘 서에 구름 운자'
간난이 분이 언년이 같은 이름들 앞에
언뜻 도력 높은 선사의 법명 같은
서역으로 향하는 구름의 달관, 어쨌거나
그녀의 팔십 평생을 한 단어로 줄여보라면
'낙천'
젊어 홀로 다섯 자식 거두면서도'
살아생전 울음 한번 보인 적 없다
머리 싸매고 누운 걸 본 적 없다
죽을 만치 속상하면
-내 칵 양잿물이라도 마셔야지, 한마디면 끝
그 말에 잠 설치다 깨어나 보면
'새벽같이 벌써
이도윤 57년 광주 출생
그물
나는 오늘도 혁명 중이라
꺼지지 않는 촛불을 들고 너에게로 간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 살고 있다는
서초동 향나무 아래 쭈그리고 앉아
사람의 말들을 따에 내려놓으면
하늘의 그물이 우리의 가슴을 담아 올려 반짝거린다.
조온윤 93년 광주 출생
유리 행성
안경을 쓰면 더 멀리 상상하고
더 멀리 슬퍼하고
멀어지는 사람은 얼마나 멀리까지 뒷모습을 보여주는지
오랫동안
우리는 길고 긴 복도 같은 일인칭을 걷고 있었다
눈이 어두운 우리는 불빛만을 향해 걸어서
옆에 누군가 나란히 걷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는데
눈이 어두워서
밤과 낮을 구분할 줄 모르는 심해어처럼
우리는 꿈과 꿈 아닌 것을 구분할 줄 몰랐다
시선을 꺾는 순간 풍경이 되어 멀어지던 너는 마른 목초지였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