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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뱀의 고백-이설야

골뫼사니 2020. 4. 12. 04:11

도마뱀의 고백

 

 

                            이설야

 

 

 

 

 

 

새의 그림자를 갉아먹으며

악마나뭇잎꼬리도마뱀이 지나간다

 

봄날, 우리는 각자 우울한 검은 잎들을 흔들고 있었다

생활의 바닥에 자꾸만 떨어지는 이파리들

파랗게 질려 있다

 

우리는 비밀 하나씩 고백하기로 했다

 

난쟁이 아저씨가 처음으로 젖가슴을 만져봤다고,

동성애자였다고, 어렵게 고른 말을 뱉었다

모두 웃었지만, 그만 웃지 않았다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고

창문 너머 달아났다

 

중년의 곱슬머리 여자는 한참 만에 굳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였다고,

엄마의 시아버지가 아버지라

한 번도 부를 수 없었다고,

고백 끝에 울음을 터뜨렸다

여자의 고백은 모든 고백을 빨아들였다

산허리가 휘어지도록 여자의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고백이 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고백이 고백을 넘어가고 있을 때,

도마뱀이 꼬리를 찾으러 창문을 넘어왔다

 

나는 비밀을 고르고 고르다가 그만 다 삼켜버렸다

도마뱀이 벽을 옮겨 다녔다

모서리에 죽은 듯이 멈춰서 다음 고백을 엿듣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