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불교의 이해

신심경-퍼옴

골뫼사니 2019. 11. 28. 16:49

신심경-퍼옴


二見不住

이견부주     두 견해에 머물지 말고

愼莫追尋

신막추심      삼가 쫓아가 찾지 말라.

 

裳有是非

상유시비     잠깐이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紛然失心

분연실심     어지러우니 본 마음을 잃으리라.

 

二由一有

이유일유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一亦莫守

일역막수     하나 마져도 지키지 말라.

 

一心不生

일심불생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萬法無咎

만법무구     만 법이  허물 없느니라. 

   

無咎無法

무구무법     허물이 없으면 법이 없고

 不生不心

불생불심     나지 않으면 마음이랄 것도 없음이라



신심명 信心銘


지도무난 유혐간택:

도에 이르는 길(성불)은 어렵지 않다. 오직 가리는 것(사량분별)을 꺼리면 된다.

 

단막증애 통연명백: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텅 비어서 명백하다.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은 양극단의 선택을 말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 이건 알아차려야한다.)

 

호리유차 천지현격:

털끝만큼의 차이가 생기면, 정법에서는 천지차이로 벌어진다.


욕득현전 막존순역:

지금 바로 도를 얻으려 한다면, 따라가거나 거슬러서는 안된다.

(따라가거나 거슬리지 말라는 것은 생각나기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 신심경은 중도사상임을 기억. 내 생각: 그냥 지켜보라. 지켜보는 것이 그대로 자성에 내 맡김이다. 그래서 관하라고 한다. )


위순상쟁 시위심병:

어기거나 따르면 서로 다투게 되는데, 이것은 마음에서 생긴 것이다.

(내가 아는 대로 인식하는 대로 사실로 믿어버리면, 고집하게 되고, 갈등을 일으켜 서로 다투게 된다. 이것은 자기 업식에서 일어난 것이다.)


불식현지 도로염정:

이런 미묘한 뜻을 알지 못하고, 헛되이 수고하여 생각으로 고요히 하려한다. (싫어하는 마음을 놔 버려야 한다.)


원동태허 무흠무여: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아서, 부족하거나 남음이 없다.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다는 것은 두루 원만하여 걸림이 없다는 뜻)


양유취사 소이불여: 

취하고 버림으로 말미암아, 그런 까닭에 한결같지 못하다.

(한결같지 못하다는 여여하지 않다. )


막축유연 물주공인:

세간의 인연을 따르지 말고, 출세간의 법에도 머무르지 말라.

(세간의 인연을 따른다는 것은, 모든 존재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 존재가 변하지 않고 항상 한다는 생각을 따르지 말라는 것. 물질의 가치는 본래 없지만 중생계에서는 가치가 부여된다. 존재의 참모습은 큰 것도 작은 것도 아닌 그냥 한 물건이다 이것이 제법이 공한 이치이다.)


일종편회 민연자진:

한 가지(중도)를 바르게 지니면, 모든 번뇌가 저절로 끝이 난다.


지동귀지 지갱미동:

움직임을 멈추어 멈춤으로 돌아가려하면, 멈춤이 다시 더 큰 움직임이 된다.

 

(‘구하는 게 아니다.’ 고요해야지 하고 애쓰면 오히려 혼란이 가중된다. 불안정한 자체를 알아차리고 지켜 볼 때 고요로 들어간다. 아침에 수행 하러 ‘일어나야지’ 하고 누워 용을 쓰면 결국 일어나지 못한다. ‘일어나기 싫다’는 본질을 알아차리고 벌떡 일어나야한다.)

(좌선 중 망상이 일어나고, 망상을 떨치려고 애쓰면 번뇌망상이 더 심해진다.  이렇게 애쓰는 것은 수행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애쓰는 것은 이미 상을 쥐고 있는 것이다. 참을 것이 없는 경지로 가야한다.)



견유몰유 종공배공:


유를 버리면 곧 유에 빠지게 되고, 공함을 따르면 도리어 공함을 등지게 된다.


* 동산이라 하면 서산이라 하는 견해와 다투고, 동산도 서산도 아니다하여 두 견해를 모두 버리면 비동비서 산 이라는 새로운 견해를 가지려한다. 즉 이게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깨달으면 비동비서가 된다.’ 하게 되어 다시 깨달았다 못 깨달았다. 라는 시비에 휘말리게 된다. 이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공상에 집착한 것에 불과 할뿐이다.

공상에 빠지는 것은 흔히 범하는 우이다.

상을 버리는 것이 공인데, 공이라는 상을 취한 결과이다. 사실은 다만 동산이라는 상과 서산이라는 상을 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진리를 새로 세우지 않아야한다.


불법을 잘못배우면 전법의 이름으로 타인을 구속하고 해친다. 진리의 세계에서는 선악이라는 것이 각자의 입장에서 바라 본 것일 뿐이다.


귀근득지 수조실종: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지만, 비춤(그림자)를 따라가면 근본을 잃게 된다.

*비유: 개에게 흙덩어리를 던지면 개는 흙덩어리를 쫒고, 사자는 흙덩이를 던지면 사람을 잡는다. 사람을 잡으면 다시는 흙덩이가 날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가지를 붙잡고, 그림자를 쫒고 있다. 앞으로 돌아가서 말하면, 아침에 “일어나야지” 하는 것은 ‘일어나기 싫다’의 그림자이다. 이때 벌떡 일어나는 것은 ‘일어나기 싫다’를 놓아 버리는 것이다.


사람들이 갠지스 강에서 목욕하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하자, 부처님 이르시길, 그럼 갠지스강 물고기가 제일 먼저 천상에 가겠구나?  하셨다고 한다.


수유반조 승각전공:

모름지기, 잠깐사이에 자기 내면을 비추어 보는 것이, 텅 비었다는 견해에 집착하는 것 보다 낫다.


승찬대사께서 “제 죄를 면해 주십시오” 하니까, 혜가 대사께서, “ 내가 너의 죄를 면케 해 줄테니 그 죄를 한번 내 놓아 보거라” 하였다 그 사이에 승찬스님은 죄를 찾을 량으로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았고, 죄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승각전공의 원 뜻은 전공을 물리쳐 이긴다. 인데 전공이란 공견(공하다는 견해)에 집착하는 것을 말함이니, 일어나야지 하고 용쓰는 것보다 잠깐 일어남이, 그리고 고요해야지 하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 한번 살펴봄이 낫다.’ 는 뜻이다.

‘제법이 공하다 ’ 그러고 있는 것보다 잠시 내면을 돌아보는 것, 즉 있는 그대로 살펴봄이.. 즉 잠시 라도 실상을 알아차림이 낫다.


전공전변 개유망견:

모든 것이 공하다 집착하는 것은 모두 망견이다. (실상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불용구진 유수식견:

참됨을 구하지 마라. 다만 망견을 쉬어야한다.

(망견을 버리기만 하면 그냥 되는 것이다. 그릇된 견해를 떠나 바른 견해를 구하려 하면 그 자체가 망견이다.)


이견부주 신물추심:

두 가지 견해에 머무르지 마라. 삼가 쫓아가서 찾지 마라.

(두 가지 견해에 머무르지 마라의 뜻은 두 가지 견해를 버리기만 하면 이미 진리에 들게 된다.)


재유시비 분연실심:

잠깐이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이미 근본에서 어긋나 버린다.

(정답을 찾는 것도 버려야한다. 선입관 없이 접근해야한다.)



소견호의 전급전지:


마음 씀씀이(견해)가 좁으면 여우같이 의심하고, 더욱 급할수록 더욱 더뎌진다.


[소견호의 해설]

손과 손가락은 좁은 견해로 보면 손가락 5개로 보지만, 큰 눈으로 보면 한손이다. 우리에게는 가리워져서 손가락이 각 별개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모두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뭉뚱거려진 한 개가 아니라 서로 연관된 별개(하나)이다. 이것을 불이불일 이라한다.

콩 한 되가 있다 치면,  이 콩들은 모두가 모양이 서로 다른 콩이다. 그러나 팥이 옆에 있어 팥과 비교하면 콩들은 모두 같은 것이다.

팥과 콩을 채소와 비교하면 같은 곡물이다. 나아가 계속 비교해나가면 이들은 모두 같은 음식이 된다.

이 때, 이 콩들은 정말 같은 것이냐? 정말 다른 것이냐? 한다면 이건 어리석은 생각이다. 상황에 따라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는 것이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따로 없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뿐, 이 모두 마음에서 생겨난 것이며, 실상이 아니며, 꿈같은 것이다.



집지실도 필입사로:

집착하면 도를 잃게 되고, 반드시 삿된 길(틀린 길)로 들어서게 된다.


도를 얻어야지 깨달아야지 하면 오히려 도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정답을 찾으려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편안하게 선입견 없이 접근해야한다.

그렇게 하여 지우치다가도 어느 순간 벗어나면 환하게 보인다.


방지자연 체무거주:

집착하지 않고 놓아버리면, 스스로 진리의 길을 간다. 본체는 머무름도 없고 감도 없다.


임성합도 소요절뇌:


성품[본성, 자성]에 맡기면, 도에 계합하게 되어, ‘왔다갔다니’ 하는 번뇌가 끊어져 저절로 멀리 사라진다.

*수식관; 숨에 몰입하여, 있지만 옆에서 떠들면 놓친다. 그러나 숨은 계속 된다. 알아차림이 집중되어있으면 떠드는 줄 알면서도 알아차린다. 머리 속의 온갖 생각 번뇌가 일어나던 말던 호흡만 집중하면 번뇌는 저절로 사라진다. 이때 번뇌는 가만 내버려둔다. 다만 빠져 허우적 되지 않기 위해 호흡에 집중한다.


담배; 담배 피우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피워서 없애려하지 말고 내 버려둔다. 그러다 안 피우고도 사라지는 것을 보면 놔두게 될 수도 있다. 어떻게 되나 가만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졸음 오는 것도 내버려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사라진다. ‘잠깐 자고 올까? 그래서는 안된다.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깨어있지 못함이다.


계념괴진 혼침불호:

생각에 매달리고 얽매이게 되면 참됨에서 어긋나 버리며, 어지러움에 빠져서 좋지 않다.



욕치일승 물오육진:

일승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육진(경계)을 미워하지 말라.


삼승(성문승, 연각승, 대승 보살승)이 따로 없이 부처되는 길을 가고자하면,

육진이란 6가지 경계로 육진을 미워하지 말라 경계를 탓하지 말라. 이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으며, 그것이 바로 정각과 동일하다.

나를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것을 ‘아상’ 이라한다. 내가 옳다고 고집 세우는 것을 ‘아집’이라한다. 우선 수행자로써 아집은 무조건 끊어야한다. 그러면 아상인 줄 알면서도 갈등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상을 아상인줄 안다면 서로 다른 느낌과 취향이 공존할 수 있다.


육진불오 환동정각:

육진을 미워하지 않으면, 도리어 정각과 같다.


장심용심 기비대착:


마음가지고 마음을 쓴다면(용쓴다면), 그게 어긋남이 아니겠는가?


미생적란 오무호오:

어리석으면 고요함과 어지러움(혼란)이 생기고, 깨달으면 좋고 싫음이 없어지도다.

* 고요와 혼란이 구분되면 어리석은 것이다.


득실시비 일시방각:


얻고 잃음(옳고 그름)을 일시에 놓아 버려라.

(놓아 버리는 것이 눈을 뜨는 것이다.)


신심명 15강


안약불수 제몽자제:

눈에 만약, 졸음이 없다면, 모든 꿈이 스스로 사라져 버린다.


(눈에 졸음이 없다는 것은 잠에서 깨어난다. 졸음은 즉 미혹하다, 자기 생각에 사로 잡혔다는 뜻이다.)




양기불성 일하유이:

둘이 이미 성립하지 않는데, 어찌, 하나인들 있을 수 있겠는가?

(동산.서산이 시비거리가 아닌데, 비동비서도 고집하지 않는다.)


구경궁극 부존궤칙:

마침내 궁극에 이르면,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궁극에 이른다는 것은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면 이라는 뜻이며,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금강경에 나오는 무유정법 이라는 표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계심평등 소작구식:

마음이 계합하여 평등해지면, 짓고 짓는 바가 모두 그친다.

다할 구 쉴식

여기서 평등하다는 것은 ‘하나의 존재로 보면’ 이라는 뜻이고, 짓는 바가 그친다는 것은 시비분별이 스르르 가라앉는다는 말이다.

 

호의정진 정신조직:

여우같은 의심이 다해버려 맑아지면, 바른 믿음이 고르고 곧으리라.


바르게 믿는 마음을 신심 혹은 정신이라 한다. 상을 짓는 것은 자유를 해치는 것이며, 노년의 외로움은 돈 버는 시절, 힘 있던 시절 목에 힘을 준  과보이다.


 

허명자조 불로심력:

허허로이 밝아 스스로 비추나니, 애써 마음 쓸 일이 아니로다.(애써 노력 할 일이 없다.)

다만 인연 따라 일어나므로 좋아하거나 미워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래서 마음의 힘을 수고 할 일이 없다. 항상 싫은 사람이 오고 좋은 사람이 간다. 그러나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만  없애면 된다.



요급상응 유언불이:


이런 도리를 급히 상응하기(알기)를 원한다면, 오직 둘 아님을 알아야한다.


불이개동 무불포용:

둘 아닌 도리를 알면 모두가 같아서, 포용되지 않는 바가 없다.


둘이 아니면 모두가 같다는 것은 제법이 공한 도리를 알면 모두가 평등하다. 다만 인연을 따라서 움직이므로 포용되지 않는 바가 없다는 뜻인데,  둘 아닌 도리는 곧 제법이 공한 도리이다.



신심불이 불이신심:

믿는 마음이 곧 둘이 아니니, 둘 아님이 곧 신심이다.


언어도단 비거래금:

언어가 끊어지고(말할 필요가 없이), 과거 현재 미래가 곧 일념이다.

신심명 信心銘


모든 번뇌의 뿌리가 얻으려는데 있다. 그래서 정법은 우리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반면, 정법 아닌 것은 귀에 속속  들어온다.

사람이 늙거나, 높은 지위에서 떨어져 바닥 인생을 살거나, 중병을 앓으면 보통 욕심은 모두 없어지고 없다.


어떤 40대 남자가 밤중에 찾아와 혜가대사에게 말했다. “저는 죄를 많이 지어, 이 꼴로 삽니다. 제 죄를 사해 주소서.”

혜가대사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내가 너의 죄를 사해 줄테니, 이리 내 놓아라.”

한참 있다가 거사가 말했다. “죄를 내 놓을래야 내 놓을 수가 없습니다.”

혜가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내 이미 너의 죄를 사했느니라.”

그리고 그날 밤 출가하여 법을 전수 받았다.


이분이 승찬대사이다. 평생 딱 글 한편을 남겼다. 후세의 수행자들이 마음에 새기라는 뜻으로 남긴 글, 그것이 신심명이다.


어느날 어린 사미승이 들어와 승찬대사에게 말했다. “저에게 해탈하는 법을 일러 주소서.”

승찬대사가 말했다. “누가 너를 속박하느냐?”

사미승이 말했다. “아무도 속박하지 않습니다.”

다시 승찬대사가 말했다. “내 이미, 너를 해탈하여 마쳤느니라.”


초기 선종은 매우 간단명료하다. 깨달음은 몸과 마음에서 체험되어지는 것이다.

불교의 믿음은 믿느냐 안 믿느냐를 가지고 믿는다 하지 않는다. 믿고 이해하고 실천하고 경험적으로 증득해야한다. 이것을 믿음이라한다. 신심명의 핵심사상은 양변을 떠난 중도의 길(중도사상)을 가르친다.


쾌락주의란 누구나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욕구 즉 원하는 바가 충족되면 만족의 기쁨이 있다. 이 기분 좋음으로 행복을 삼는 것을 쾌락주의라 한다.

모든 욕계의 중생은 쾌락주의이다. 이것이 가장 완벽하게 충족되는 곳이 타화자재천, 가장 나쁜, 전혀 충족되지 않는 것을 지옥이라 한다. 그래서 천상과 지옥이란 욕구의 충족여부에 따라 구분 되어진 것이다.

자재천왕이 욕계의 우두머리이다.

욕구란 한번으로 만족되지 않는다. 점차 욕구가 커진다. 만족 양이 점차 증가한다. 만약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곧 그것이 불만이고 괴로움이다. 이로 인해 벌어지는 것이 육도요, 그래서 육도윤회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완전한 행복은 절대 없다.

두 번째는 욕망이 괴로움의 원인이어서 이것을 씨를 말리자 하는 것이 있다. 잠 안자고,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렇게 고행을 통해 해탈을 시도하는 것이 고행주의이다. 부처님께서 이 고행의 거의 꼭대기까지 가 보았지만, 역시 해탈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의 삶을 돌아 보셨다. 욕구를 따라가거나 욕구를 거슬려 보니, 둘 다 욕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즉 둘 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데에 공통점이 있다. 이 말은 즉 집착과 외면은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이를 일러 양변이라 한다. 사실은 둘 다 한 뿌리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둘을 다 놓아 버렸다. 이 둘을 떠난 제삼의 길이 중도였다.

양변을 떠난 것은 어떤 것인가? 꿇어 앉아 오래 있으면 다리가 아파진다 이때, 이걸 펴면 쾌락주의, 안따라 갈려면 그대로 참아야 한다. 이것은 고행주의이다.


그러면 이것을 떠난 중도는 무언인가? 다리가 아파도 펴지도 않고 참지도 않는다. 다리의 통증을 알아차리고 그 통증을 지켜보는 것. 통증을 통증으로만 본다. 이론과 달리 실제로는 안된다. 그래서 몇 번 시도해 보면 이것이 되기 시작한다. 연습이 필요하다.

물론 다리의 통증을 지켜보는 것으로 통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하는 그 둘을 떠나야 한다.

[신심명 3강]

우리는 항상 좋아 하고 싫어하고 둘 중 하나 밖에 할줄 모르며, 사랑하면 가져야 하고 싫어하면 버리려한다. 항상 여기에 속박 받고 있으며 여기에는 자유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이) 이해가 되어도 현실에서는 실수를 반복하기도 하며 계속 연습해야한다.

실수를 계속하면서 경험하면서 극단에 치우치면서 치우치지 않는 길을 찾아야한다. 실패하더라도 원리를 알고하면, 실패가 축적되면서 곧 극복하게 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이 정법이다.


至道無難 唯嫌揀擇

지도무난 유혐간택


도에 이르는 길(성불)은 어렵지 않다.

오직 가리는 것(사량분별)을 꺼리면 된다.


지는 지극할 지 혹은 이를 지로 해석한다. 지극한 도란 열반을 말한다. 성불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오직) 유 (혐오의 혐 , 꺼릴 혐) 혐, (취사선택)간택을 멀리하면 된다. 가리지 않으면 된다는 뜻이다. 이런가 저런가? 가져야 할까 안가져야 할까? 같은 분별을 내지 않으면 저절로 된다. 결론적으로 중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양극단을 떠나면 된다.


시비분별하는 마음을 버려라. 불생불멸이요 불구부정이요 부증불감 이다.

간택이란 깨끗하다 더럽다 하고 깨끗한 것을 가지고 더러운 것을 버리게 된다. 여기서 시비가 일어난다. 그래서 간택하지 않는다.


但莫憎愛 洞然明白

단막증애 통연명백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마라,

텅 비어서 명백하다.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은 양극단의 선택을 말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 그러나 내가 이 두 가지 밖에 찾지 못하는 것은 (절을 하다가 다리가 아프면) 이미 싫어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미 싫어하면 다리를 펴던가, 참던가 두가지 밖에 없게 된다. 근본 뿌리는 싫어함이니, 싫어하는 이 생각을 놓아라. 통증은 알아차렸고, 빨려 들어가지 말고 통증을 지켜본다. 그리고 놓아 버려라하면 통증을 놓으려하지만 그건 놓아지는 것이 아니다. 통증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은 싫어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통증을 통증로만 알아라. 통증을 통증으로만 느껴라.

담배를 끊어야 하겠다하면 이미 근본에서 어긋난 것이다. 왜 담배가 피우고 싶을까? 이건 참으면 고행주의, 따라 피우면 쾌락주의이다. 이를 악물고 참던지, 다른 걸로 대체해 보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이렇게 까지 고통스러워하면서 이렇게 할 걸 뭐 있나’ 하게 된다. 피우려는 욕구를 참고 견디면 현기증이 난다. 이렇게 까지 하면서 담배를 끊을게 있나. 그러면서 자꾸 생각을 바꾼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 가르침까지 떠올리게 된다. 합당한 이론을 찾아내면(합리화), 그냥 피워 버린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담배 피우고 싶은 욕구를 알아차리고 지켜봐야 한다.

참지 말고 욕구를 지켜본다. 이 욕구는 담배를 피워야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담배피우는 욕구를 알아차리고 지켜 보아야한다.

현기증이 나고, 마음속에 회의가 일어나고 몸을 못살게 굴고 그러는 그 모든 과정, 욕구가 어떻게 작용해서 몸부림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가만히 지켜보면서 저절로 내려가는 것을 보면 3번 쯤 지나면, 견디기가 싶다. 다시 담배의 욕구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을 수행과제로 삼아서 참지도 않고 따라가지도 않고, ‘알아차리고 지켜보기’를 계속 해야 한다.

좋아하고 싫어하기 이전에 알아차림이 있어야한다. 이것이 12연기의 ‘수’이다. 좋아하고 싫어함이 일어나기 전에 알아차려야 한다.

느낌을 느낌으로만 알아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면 텅 비어서 아주 명백하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 좋아하는 것은 가져지지 않아 괴롭고 미워하는데 헤어지지 않으면 괴롭다.

이세상의 모든 사물은 인연 따라 만나고 헤어지는데, 어떤 것을 좋아 하면 그것이 사라지는 인연이라면 괴로워진다. 원래 사물 자체가 좋고 나쁨이 없다. 사물은 사물일 뿐, 다만 내가 좋고 싫어하는 마음을 냄으로서 괴로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아주 뚜렷해진다.


毫釐有差 天地懸隔

호리유차 천지현격


털끝만큼의 차이가 생기면,

정법에서는 천지차이로 벌어진다.


보통, 우리는 이미 근본에서 멀어져서 제자리를 찾으려 하니, 이쪽에 갔다가 저쪽에 갔다가 하게 된다.

이 가르침 즉 제법이 공한 도리에서 털끝만큼의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 차이만큼 벌어진다.


欲得現前 莫存順逆

욕득현전 막존순역


지금 바로 도를 얻으려 한다면,

따라가거나 거슬러서는 안된다.


따라가거나 거슬리지 말라는 것은, 따르고 거스르는 이전, 생각나기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생활 속에서 항상 양극단에 치우친다.

애를 야단칠까 말까? 항상 내 뜻대로 하는 것에 뿌리를 두고, 내 뜻대로 하거나 아니면 외면한다. 그러나 외면은 집착을 놓는 게 아니다. 애를 내버려두라 하는 것은 그냥 지켜본다. 아이가 다치지 않게 그네를 딱 잡고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다치던 말던 내버려두고 가버리는 것도 아니다.

그냥 지켜보는 것이다. 그렇게 남의 집 아이를 보듯이 보는 것이 지켜보는 것이다.

[신심명4강]

신심경은 중도사상임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 바로 도를 얻기를 바란다면, 거스르거나 따르지 마라. 좋아하는 것은 따르는 것이고 싫어하는 것은 거스르는 것이다.

결국 따르고 거스르는 것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내지 마라. 이다.


違順相爭 是爲心病

위순상쟁 시위심병


어기거나 따르면 서로 다투게 되는데,

이것은 마음에서 생긴 것이다.


이래야한다 저래야한다,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하고 서로 다투면 이것이 곧 마음의 병이다. 즉 마음에서 생긴 것이다.


우리에게는 오해가 있다.

여기 흰종이가 있다. 이것을 볼 때 푸른안경을 끼고 보면 푸르게 보인다. 그때 내 눈에는 푸르게 보인다고 해야 한다. 이것은 주관이다. 종이의 색깔은 내 눈에 있다. 그러나 ‘그 종이 색깔이 푸르다’ 하면 인식하면 이것을 객관적 사실로 인식한 것이다. 즉 내가 아는 것이 본래 푸르다. 이것은 색깔이 종이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모두,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을 객관이라고 믿는데 있다. 

결과는, ‘내가 아는 대로, 내가 인식하는 대로 그것을 사실로 믿어버리면, 고집하게 되고, 갈등을 일으켜 서로 다투고 외면하게 된다. 이것은 자기 업식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다수를 동원하여 자기가 옳다고 표현하게 된다.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자, 길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자하는 것은 ‘내가 옳다’를 주장하는 것이다. 아니면 옛날 자료를 캐내어 자기주장이 옳음을 내 세우고, 지지 않으려 한다. 여기에는 해결책이 없고 오직 힘에 의해 눌러 해결된다. 그러나 이것은 또 문제를 일으킬 뿐 해결책이 아니다.

서로 다툼의 원인은 주관적인 것을 객관적으로 인식함으로 인한 것이다. 이것이 반야심경의 전도몽상이다.

[신심명 5강]

그래서 ‘이 종이가 푸르게 보인다’는 것은 다만 ‘내 눈에 푸르게 보인다’. 하는 데까지는 가야한다. 그래야 대화가 가능하다. 본래 이세상의 사물들은 모두 본래 옳고 그름이 없다. 이것은 주관 일 뿐이다.

그래서 이것을 마음의 병이 이라한다. 마음에서 지은 바를 마음에서 지은 것으로 아는 것이 바로 아는 고, 마음에서 지은 것을 객관이라 아는 것이 전도몽상 이다

이게 중생의 병이다. 그리고 내 눈에 이렇게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바로 나의 업식 때문이다.

된장찌개 냄새가 구수한 것은, 된장찌개가 원래 구수한 것이 아니라 내 코에서만 그런 것이다. 마음에서 일어난 것을 객관적이라고 믿어 버린 것, 이것이 전도 몽상이다.

원래 좋은 냄새 없고, 원래 좋은 사람 없고, 오직 마음(자기 업식)에서 일어난 것이다.

나의 의견과 나의 생각을 객관화 시키지 마라. 이 모두가 마음의 병이다. 그걸 알면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 음식 간이 딱 맞네. 하는 것도 내 혀끝에 맞다고 아는 것이 올바로 아는 것이다.


不識玄旨 徒勞念靜

불식현지 도로염정

이런 미묘한 뜻을 알지 못하고,

헛되이 수고하여 생각으로 고요히 하려한다.


이런 미묘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공연히 수고한다. 생각으로 고요히 하려하는 것이다.

내일 아침 기도하려면, 5시에 일어나야 한다. 결심하고 자고 아침에 일어나야지 하면 못 일어난다. 이때 일어나야 되는 줄 아는데 일어나고 싶었는데 몸이 말을 안 들어서 못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이거 몸을 사탄 취급하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가르침에 맞지 않다.

식물인간이 되어있거나 몸을 묶어 두어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못 일어나는 것이고, 그게 아니면 일어나기 싫어서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자기는 일어나고 싶었는데 일어나지 못했다고 알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제법이 공하다하니 몸도 제법이며 공하다. 공하다는 것은 잘된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니다. 사실은 몸이 아니라 내가 일어나기 싫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싫어하는 이 마음을 놔 버려야 한다. 잘못 알고 있으면 해결이 나지 않는다.

마음을 고요히 해야지 하는 것은 마음이 불안하다는 것이고 이걸 고요해야지 한다고 고요해지지 않는다. 불안한 마음의 원인을 찾아 놔 버려야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 진척도 없는 생각만으로  고뇌가 많다.

주어야지 하는 것은 주기 싫다는 것이고, 가야지 하는 것은 가기 싫다는 것이고, 보시해야지 하는 보시하기 싫다는 것이고, 사랑해야지 하는 것은 사랑하기 싫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노력한다는 것은 그게 하기 싫다는 뜻이다. 병을 고치려면 근본을 찾아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서 해결해 버려야한다. 마음을 찾아서 놔 버려야 한다.


그래서, 가야할 텐데 할 때는 가버리면 되고, 줘야지 할 때는 줘 버리면 되고,

생각만으로 무얼해야지 하는 것은 하기가 싫다는 것이고, 일어나야지 하는 것은 일어나기 싫다는 것이니 그 순간 발딱 일어나 버리면 일어나기 싫다는 그 생각도 없어진다. 아니면 안가고, 안주고, 안 일어나는 방법도 있다. 이것은 번뇌는 일으키지 않지만 있지만 과보를 각오해야 한다.

‘하고 싶은데 안하고,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것’을 괴롭다 하지만, 이도 자기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 괴로워 할 일이 아니다.

[신심명 6강]


圓同太虛 無欠無餘

원동태허 무흠무여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아서,

부족하거나 남음이 없다.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다는 것은 두루 원만하여 걸림이 없다는 뜻이고, 흠은 부족할 흠 여는 남을 여, 부족하거나 남음이 없다.

존재자체는 그것대로 완전하다. 거기에는 부족하고 남음이 없고, 깨끗하고 더러운 것도 아니다.


良由取捨 所以不如

양유취사 소이불여

 

취하고 버림으로 말미암아,

그런 까닭에 한결같지 못하다.


양은 정말로 유는 말미암아 이니 취하고 버림으로 말미암아, 소이는 그런 까닭에, 불여는 한결같지 못하다, 여여하지 않다.

느낌(수)은 쾌, 불쾌, 덤덤으로 느껴진다. 쾌에는 사랑하는 마음, 불쾌에는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좋아하면 취하려 하고 싫어하면 버리려한다. 12연기상에서는 수 애 취(취사를 취라한다.) 수에 반연하여 애가 애에 반연하여 취가, 이것에 반연하여 과보(유)가 생기고.. 그것이 새로운 발생을 일으킨다. 즉 생 노사 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취사(취하고 버리는 것)하지 마라, 애증(사랑하고 마워하는 것)을 하지 마라,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라.

그래서 자기 업식에 의해 주관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내 주관인줄 알아라.


주먹만한 그릇을 예로 들어, 이것이 큰 것인가? 작은가? 물었을 때, 누군가 대답할 때는 자기 마음 속 무언가에 비교하여 크다 작다고 대답한다. 소주잔 보다는 크지만, 단지보다는 작다.

이 자체는 큰 것도 작은 것도 아니다. 그냥 그것이다. 그것이 참모습이다.

그래서 이 모든 세상의 사물은 원래,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아니다.

제법이 공한 것이다. 모두 마음이 짓는 바 이다.

이 도리를 깨치면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고, 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다. 그러면 취할 것도 버릴 것도 없다.


莫逐有緣 勿住空忍

막축유연 물주공인

세간의 인연을 따르지 말고,

출세간의 법에도 머무르지 말라.


세간의 인연을 따른다는 것은, 모든 존재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며, 이것을  유연이라 한다. 즉 유아의 견해이며 상견이라 한다. 

그래서 존재가 변하지 않고 항상 한다는 생각을 따르지 말라는 것. 물질의 가치는 본래 없지만 중생계에서는 가치가 부여된다.

이것은 새것이냐 헌 것이냐? 가짜냐 진짜냐? 속에는 새로운 견해가 개입되어있다. 새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이미 새것이 좋다 그리고 가치가 있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꿈에 보석을 잃어 버렸다. 너무 아까워.. 그러나 깨니 꿈이다. 전혀 아깝지 않다.

꿈이란 주관에 사로잡혀있는 세계이다.

유연은 이와 같이 세상에 가치가 있다 하는 것이고, 아무것도 없다 하는 공인(공)이다. 유연에도 따르지 말고 공에도 머무르지 말라.

공은 좋은 건데 왜 머무르지 말아야하는가?


옷은 입는 게 낫다. 그러나 목욕탕에서는 옷을 벗는 게 진리다. 옷을 입는 게 좋다하는 것은 세간적 사고이다. 벗는다 하는 것은 출세간의 사고이다. 물질의 가치가 있다하더라도 본래는 없는 줄을 알아야한다. 그러나 중생계에서 가치가 매겨지기도 한다.


세상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존재의 참모습은 큰 것도 작은 것도 아닌 그냥 한 물건이다 이것이 제법이 공한 이치이다.


一種平懷 泯然自盡

일종평회 민연자진


한 가지(중도)를 바르게 지니면,

모든 번뇌가 저절로 끝이 난다.


‘한 가지를 바르게 지니면 자연스럽게 저절로 다해버린다.’

이때의 한 가지는 중도이다.

절문은 일주문이라 불리지만, 다른 곳에서는 불이문이다.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아니다. 이것이 둘 아닌 도리이며 그것이 일종 일주이다.

‘옷을 입어야 한다와 벗어야 한다’ 가 둘인 도리이다. 이치를 알아버리면 둘을 떠난다.

다만, 인연을 따라서 저절로 입기도 하고 벗기도 한다.


‘모두 공이다.’ 하면 공상을 그린 것이다. 이건 공이 아니다. 잘못이다.

본래 공하지만, 우리들에겐 '옳니, 그러니' ‘맞으니 틀리니’하고 비친다. 이것이 꼭 객관적인 것 같은 현실이다. 그러나 이걸 따르면 전도몽상이 되고, 본질(공)을 논하면 현실과는 맞지 않다. 그래서 공하지만 업식을 따라서 비침으로, 마음에 비친 이것을 객관화시키지는 말아야한다.

가다가 스스로 자각해야한다.  ‘어, 나의 주관을 객관화 시켰다.’ ‘또 나의 기준으로 세상을 본다.’ 이렇게 자각을 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항상,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렇습니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상대의 의견을 수렴하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다름이 다툼이 되지 않아야 한다. 솔직한데 고집은 하지 않는다. 그러면 삶과 인간관계가 조금씩 자유로와진다.


[신심명7강]

止動歸止 止更彌動

지동귀지 지갱미동 (다시 갱)

움직임을 멈추어 멈춤으로 돌아가려 하면,

멈춤이 다시 더 큰 움직임이 된다.


부처님 당시에 앙구리 마라라는 희대의 살인마가 있었다. 그는 당시대에 아주 악독한 살인자로 999개의 손가락으로 염주를 만들어 목에 걸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원래 이 사람은 아주 착한 영특한 젊은이였다. 스승의 잘못된 인도로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의 스승이 그에게 사람을 100명을 죽여 그 손가락으로 염주를 만들어 목에 걸면 산 상태로 천국에 갈수가 있다고 가르쳤고,  그가 그걸 그대로 믿어버린 것이다.

이 스승은 젊은 부인이 있었는데, 그 부인이 젊은이를 좋아하는 보고 오해로 인해 질투심으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앙구리말라는 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라에서 이자를 죽이기 위해 천명의 군사를 보낸다는 소문이 들리자 그의 부모는 너무나 놀라서 부처님을 찾아갔다. 자기 아이를 살려주십사고. 영특한 아이를 유학 보내놓았더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들의 간절한 소원을 다 듣고 앙구리밀라를 구하기 위해 그가 있다는 숲속으로 갔다. 모두 도망가는 사람들을 거슬려 올라가다 앙구리말라를 만났다.

앙구리 말라가 외쳤다. “사문아, 게 섰거라.” 그러나 부처님은 평소 걸음걸이로 갔으나 앙굴리마라가 따라잡기 힘들었다. 겨우 힘을 내어 부처님을 가로 질러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말했다. “그대는 왜 멈추지 않았는가?”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 하시길, “나는 이미 오래전에 멈추었네, 멈추지 않은 것은 너다.”

“멈춘지 오래되었다고? 너 계속 가지 않았느냐? 왜 거짓말하느냐?”

그러자 부처님께서, “나는 시비 분별심이 모두 멈추었다. 나는 경계 따라 일어나는 모든 분별심이 멈추었다.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짐에서 멈추었다. 그러나 너는 아직도 희노애락, 나고 죽음의 윤회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때 앙굴리마라가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자기가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제가 저지른 죄를 어떻게 해야합니까?”


부처님께서는, 그가 무지로부터 깨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저도 출가 수행을 하고 싶습니다.” 이제 그가 마음의 눈을 떳기 때문에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죽을 보므로, 그를 돌로 쳐 죽였다.

그가 돌에 맞아 죽어 간다는 소식을 듣고 부처님께서 갔을 때, 아힘사는 그렇게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한점도 후회가 없습니다. 숨이 넘어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이 요동치지 않고 고요합니다.’


우리 마음은, 두려워하면서 그걸 억제하려면 잘되지 않는다. 방안에 햇살이 들면, 먼지가 일어나 떠다니는 것이 보인다. 이걸 없애려고 빗자루 질을 하면 먼지가 더 심하게 일어난다.


좌선 중 망상이 일어나고, 망상을 떨치려고 애쓰면 그 한 생각으로 번뇌망상이 더 심해진다. 이렇게 애쓰는 것은 수행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애쓰는 것은 이미 상을 쥐고 있는 것이다.

참을 것이 없는 경지로 가야한다.

망상이 일어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그냥 지켜보면 고요해지며,

망상을 떨치려고 한 생각 일으키면 그것이 더한 망상이 되어 번뇌는 치성해진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이미 고요해 있다. 그래서 나는 멈춘지 오래다. 이런 까닭으로 감도 옴도 없다고해서 여래라 부른다.

앙굴리말라는 마음에 오고 감이 있었다, 욕구 즉 하늘나라에 가야지 하는 욕구가 있었기에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도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오고감이 없어지니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면서도 마음에 원한도 미움도 후회도 없게 된 것이다.


우리는 마음을 고요히 하려고 애를 쓰는데, 이렇게 애를 쓰는 것이 불안의 원인이다. 불안하면 불안한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지켜봐야한다.


‘구하는 게 아니다.’ 알아차리고 지켜보는 것이다.


[신심명 8강]

唯滯兩邊 寧知一種

유체양변 영지일종

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거늘,

어찌 하나(중도)라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움직임을 그치고 돌아가려 하는데 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거늘,

여기서 양변이라는 것은 이문, 시비, 구정(더럽고 깨끗한 것), 생멸, 유무, 선악, 미추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이나 미워하는 마음 등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의 마음은 항상 양변에 치우친다. 할까 말까? 이건가 저건가? 이 양변은 항상 시비를 가리게 하는 것이므로, 이 동네에서 보면 동산이고 저 동네에서 보면 서산이다. 이건 서산인가 동산인가? 이것을 떠나 그냥 지켜보는 것이 되어야 한다. 산이 하나 있어 동쪽에서 보면 서산이요 서쪽에서 보면 동산이다. 시비를 가려야하나? 떠나서 보면  동산도 서산도 아니다. 이건 산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산은 그냥 산일 뿐! 이것이 ‘공’ 이다.

양변에 머물러 있으면 어찌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이 하나는 중도이다.


一種不通 兩處失功

일종불통 양처실공

하나라는 것에 통하지 못하면

두 곳에서 공덕을 잃는다.


하나라는 것을 통하지 못한다는 것은, 즉 중도를 깨닫지 못하면 양쪽을 다 잃는다.

다시 양변에 치우친다. 하나인 줄 알면 동산도 서산도 맞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산이 본래 동산도 서산도 아님을 안다면 동산이기도 서산이기도 하다.

인간관계에서도,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고, 또 상대가 나에게 좋은 사람이 되었다가 나쁜 사람이 되었다가 한다. 그러나 사실은 상대는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니다. 내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그는 좋은 사람이 되었다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나로부터 일어나는 줄 알아버리면 양극단에서 벗어날 수 있다.


遺有沒有 從空背空

견유몰유 종공배공


유를 버리면 곧 유에 빠지게 되고,

공함을 따르면 도리어 공함을 등지게 된다.


유(유무의 단견)를 버리면 곧 유에 빠지게 된다. 유는 버려야 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유를 버리면 바로 공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 도리어 유에 빠진다. 그러면 공을 따르면? 도리어 공을 등져 버린다.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공을 따르면 공함을 등지게 된다.


범부는, 동산이라 하면 서산이라 하는 견해와 다투고, 서산이라 하면 동산이라는 견해와 다툰다. 그러다 양극단을 떠나면 동산도 서산도 아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때, 동산과 서산이 망견이므로 두 견해를 버리면 끝나는데, 이 두 견해를 모두 버리면 비동 비서산 이라는 새로운 견해를 가지려한다. 즉 이게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깨달으면 비동비서가 된다.’ 하게 되어 다시 깨달았다 못 깨달았다. 라는 시비에 휘말리게 된다. 이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공이 아니라, 공상에 집착한 것에 불과 할뿐이다.

공상에 빠지는 것은 흔히 범하는 우이다.


상을 버리는 것이 공인데, 공이라는 상을 취한 결과이다. 이것은 이미 공이 아니다.

그러면 상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은 다만 동산이라는 상과 서산이라는 상을 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진리를 새로 세우지 않아야한다.

친구지간의 토론시, 친구가 지식이 많다. 그러면 내가 밀린다. 그러다 법문을 듣고 자기 생각이 부처님 말씀과 같다는 것을 발견한다.

너무나 기뻐서 가는 길에 친구를 다시 만났을 때, 이렇게 말한다. 여보게, 부처님께서 말씀 하시길, 진리란 이런거라고 하셔..

이순간 이 사람은 자기의 견해가 옳음을 주장하기위해 부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한다.  만약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라면, 응당 이렇게 말해야한다. 내가 잘 몰랐는데, 의견이란 서로 다른 거로구나. 전에 당신이 동산이라 하기에 틀렸다고 내가 우겼는데,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동산이라 해도 될 것 같아요.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이것이 공을 이해 한 것이다.


평소에 어머니가 미신을 믿고 그러는데 오늘 법문을 듣고 보니, 어머니 그건 정법이 아니래요한다면 그게 바로 정법이라는 상을 취한 것이다.

법문을 제대로 들었다면, 미신을 믿는 어머니에게, 그런 환경에서, 그 분의 삶에서 볼 때, 그 분으로서는 그것도 하나의 믿음이요, 종교요, 신앙이다.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면 그래서 옳은 것은 아니지만 함께 가자고하면 가주기도 한다. 만약 이와 같이 한다면 제대로 불법을 배운 것이다. (동산이 동산이 아니라 그 이름이 동산이다)

불법을 잘못배우면 전법의 이름으로 타인을 구속하고 해친다. (이것은 세속적 정의이다)

진리의 세계에서는 선악이라는 것이 각자의 자기 입장에서 바라 본 것일 뿐이다.


多言多慮 轉不相應

다언다려 전불상응


이런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 이러니저러니 말이나 생각이 많다면,

더욱더 (진리에) 상응하지 못 한다


絶言絶慮 無處不通

절언절려 무처불통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래서 선에서는 불립문자라 하여 문자로 진리를 증거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불교인들은 불교라는 상에도 집착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진리다.’ 라고 하는 것 그것이 법상이며, 이것도 마음속에 그려서는 안된다.


그게 무엇이라 할지라도, 상을 취하면 갈등이 생긴다.

상을 여의면 인연 따라 이루어진다.

집에 가면 아빠가 되고, 친구를 만나면 친구가 되고, 차를 타면 승객이 되고, 가게에 가면 손님이 될 뿐이다. 상이 없는 것을 자신이 알 때 자유인이 된다.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물은 본래 형상이 없어 세모통이던 네모통이던 어디에던 들어간다.


[신심명 9강]

歸根得旨 隨照失宗

귀근득지 수조실종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지만,

비춤(그림자)를 따라가면 근본을 잃게 된다.


옛선사들의 비유를 보면, 개에게 흙덩어리를 던지면 개는 흙덩어리를 쫒고, 사자는 흙덩이를 던지면 사람을 잡는다. 사람을 잡으면 다시는 흙덩이가 날아오지 않는다.


사람을 향한다는 것은 근본을 향하면 바로 끝난다. 뿌리를 끊어 버리면 죽어 버릴텐데,

우리는 가지를 붙잡고, 그림자를 쫒고 있다. 앞으로 돌아가서 말하면, 아침에 “일어나야지” 하는 것은 ‘일어나기 싫다’의 그림자이다. 이때 벌떡 일어나는 것은 ‘일어나기 싫다’를 놓아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일어나야지 하는 그림자는 없어진다.

사람들이 갠지스 강에서 목욕하면 모든 죄가 씻기고, 천상에 태어난다고 하자, 부처님 이르시길, 그럼 갠지스강 물고기가 제일 먼저 천상에 가겠구나?  하셨다고 한다.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그림자를 따르면 근본을 잃게된다.


須臾返照 勝脚前空

수유반조 승각전공

모름지기, 잠깐사이에 자기 내면을 비추어 보는 것이,

텅 비었다는 견해에 집착하는 것 보다 낫다.


승찬대사께서 “제 무거운 죄를 면해 주십시오”하니까, 혜가 대사께서, “ 내가 너의 죄를 면케 해 줄테니 그 죄를 한번 내 놓아 보거라” 하였다.

그 사이에 승찬스님은 죄를 찾을 량으로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았고(이것이 반조이다), 죄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승각전공의 원 뜻은 전공을 물리쳐 이긴다. 인데, 전공이란 공견(공하다는 견해)에 집착하는 것을 말함이니, 일어나야지 하고 용쓰는 것보다 잠깐 일어남이, 그리고 고요해야지 하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 한번 살펴봄이 낫다.’ 는 뜻이다.

‘제법이 공하다.’ 그러고 있는 것보다 잠시 내면을 돌아보는 것, 즉 있는 그대로 살펴봄이.. 즉 잠시 라도 실상을 알아차림이 낫다.


前空轉變 皆由妄見

전공전변 개유망견


모든 것이 공하다 집착하는 것은 모두 망견이다.

법의 실상을 실제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不用求眞 唯須息見

불용구진 유수식견


참됨을 구하지 마라.

다만 망견을 쉬어야한다.


참됨을 구하려하는 것 그것도 망견이다. 망견을 버리기만 하면 그냥 되는 것이다.

그릇된 견해를 떠나 바른 견해를 구하려 하면 그 자체가 망견이다.


二見不住 愼莫追尋

이견부주 신막추심


두 가지 견해에 머무르지 마라. 삼가 쫓아가서 찾지 마라.


두 가지 견해에 머무르지 마라의 뜻은 두 가지 견해를 버리기만 하면 이미 진리에 들게 된다.


有是非 紛然失心 재유시비 분연실심


잠깐이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이미 근본에서 어긋나 버린다.


잠깐이라도 옳네 그르니 하면, 이미 어지러이 본심을 잃게 된다.

정답을 찾는 것도 버려야한다. 이것이 진리라 정해놓고 찾으려한다. 아니다. 다만 망견을 쉬어야한다. 선입관 없이 접근해야한다.

다만 사실은 어떤가?


二由一有 一亦莫守

이유일유 일역막수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일어났다. 하나 마저도 움켜지지 마라.


하나 마저도 세워서는 안된다. 금강경에도 나옵니다. 일상은 무상이다.


一心不生 萬法無咎

일심불생 만법무구


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만법에 아무런 허물이 없다.


허물이 없다는 것은 옳으니 틀리니, 잘했니 잘못했니 하는 것들은 모두 생각에서 일어난 것이라 모두 사라진다. 이를 진여라고 한다.


無咎無法 不生不心

무구무법 불생불심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남(생김, 生)이 없으면 마음이라 할 것도 없다.


이것이 무아의 경지, 공의 세계이다.


[신심명 10강]

能隨境滅 境逐能沈

능수경멸 경축능침


주관은 객관을 따라 소멸하고, 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기느니라.


境由能境 能由境能

경유능경 능유경능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요,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다.


능은 주관, 경은 객관 바같 경계를 말함.

주관과 객관이 별개로 존재치 않고 서로 의지하고 연계 되어있다는 뜻이며, 불교의 연기법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이것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함(사라짐)으로 말미암아 저것도 멸(사라짐)한다. 우리의 이해는 사물이 단독으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더럽다하는 것이 있어 깨끗한 것이 존재한다. 밝음과 어둠 역시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모든 존재한다는 것의 특성이다. 존재의 상호연관성 이것이 제법 무아이다. 단독자는 없다.

제행은 무상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을 항상함이 없다라고 한다. 그래서 고인 것이다. 고이므로 무아이다. 이를 존재의 참모습(무상, 고, 무아)이라 하며 즉 삼법인이다.


참모습의 이치를 알게 되면 모든 괴로움은 사라진다. 열반인 것이다. 괴로워해야 할 일이 없는 것을 깨닫는다.

착각에서 깨어나면 원리 전도몽상 구경열반한다. 주관과 객관이 서로 연관되어있다. 반야심경에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공과 색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


欲知兩段 元是一空

욕지양단 원시일공


양단(유무)을 알고자하면, 원래 이것이 하나의 공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색은 공으로부터 일어나고, 공은 색으로부터 일어난다.

양단에 치우쳐 있을 때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고 저것 아니면 이것이다.

그러나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닌 도리를 알면 동산이 되기도 하고 서산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一空同兩 齊含萬象

일공동량 제함만상


하나의 공은 양단과 같다. 만상을 품은 것과 같다.

하나도 세우지 않을 때 진정한 공(하나)이 된다. 진정한 하나는 공이다.[모양 없음이다]

여기서 일공은 곧 중도를 말한다.


不見精麤 寧有偏黨

불견정추 영유편당


세밀하거나 아주 거칠음을 둘로 보지 않는다.

어찌 편당이 있겠는가?


세밀하고 거칠음을 둘로 보면 진리에서 어긋남이다. 어찌 편당.. 지우쳐 무리를 짓는 일이 있겠는가? 라는 뜻.

절대성을 떠날 때 ‘공’ [空]이다. 크다 할 때 큰 것의 속성이 없고, 작다 하더라도 작은 것의 속성이 없다. 저사람 나쁘다 할 때도  나쁘다고 할 어떤 속성이 없다.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존재는 그냥 존재이다. 한쪽에 지우치는 것은 도가 아니다. 사물의 모습은 그냥 그것이다. 산은 산, 물은 물. 다만 한 물건 일 뿐이다.


[신심명 11강]

大道體寬 無易無難

대도체관 무이무난


큰 도는 본체가 없어, 쉬운 것도 어려운 것도 없다.


우리는 쉬운 일이 있고 어려운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어떤 사람은 어렵다하고 어떤 사람은 쉽다 하지만, 일 자체는 쉽고 어려움이 없다. 다만 사람에 따라서 혹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진리(대도)는 넓어서 쉬고 어려움이 없다. 바로 양단을 떠나기만 하면 된다.

일 자체는 쉽고 어려움이 없으며, 그것은 마음에 있다. 마음내면 쉽게 되기도 한다.


小見狐疑 轉急轉遲

소견호의 전급전지


마음 씀씀이(견해)가 좁으면 여우같이 의심하고,

더욱 급할수록 더욱 더뎌진다.


‘소견호의’는  좁은 견해로 보기 때문에 늘 의심한다.

손과 손가락은 좁은 구멍(견해)으로 보면 손가락 5개로 보지만, 큰 눈으로 보면 한손이다. 우리에게는 가리워져서 손가락이 각 별개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모두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도 뭉뚱거려진 한 개가 아니라 서로 연관된 별개(하나)이다. 이것을 불일불이 이라한다.(이 세상 만물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콩 한 되가 있다 치면, 이 콩들은 모두가 모양이 서로 다른 콩이다. 그러나 팥이 옆에 있어 팥과 비교하면 이 콩들은 모두 같은 콩들이다 고 이야기한다.

팥과 콩을 채소와 비교하면 팥과 콩은 같은 곡물이다. 나아가 계속 비교해나가면 예를 들어 돌에 비교하면 이들은 모두 같은 음식이 된다.

이 때, 이 콩들은 정말 같은 것이냐? 정말 다른 것이냐? 한다면 이건 어리석은 생각이다. 상황에 따라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는 것이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따로 없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뿐, 이 모두 마음에서 생겨난 것이며, 실상이 아니며, 꿈같은 것이다.

좁은 견해로 보기 때문에 늘 의심한다.


[신심명12강]


‘전급전지’은 서두를수록 더뎌진다는 뜻인데,

아침햇살이 비치면 깨끗하던 방안에 먼지가 보인다. 이를 쓸어내려하면 빗자루 질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은 먼지가 생긴다. 고요해지려 할수록 애쓸수록 더 어지러워진다. 고요해 지려는 마음이 더욱더 불화를 조장한다. 애쓸수록 상기가 된다.

가만히 내버려 두어야한다.


어떤 사람이 부처님의 법문에 감동 받아 출가하였다.

그는 열심히 정진했는데 도무지 깨달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조급해졌다.

그래서 더더욱 정진하였는데 역시 진전이 없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생각하길, ‘나는 소질이 없나 보다, 차라리 돈이나 벌어 보시나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였다.

떠나려 부처님께 작별을 고하니, 부처님께서 물으시길,  “왜 그러느냐?”

그래서 사실대로 말하였다. “저는 열심히 수행하였는데도 진전이 없습니다. 그래서 소질이 없는 것 같으니, 돈이나 벌어 스님들 뒷바라지나 할까합니다.” 하였다.

부처님께서 물으셨다. “너는 출가 전에 무엇을 잘 하였느냐?”

“예, 거문고를 잘 탓습니다.”

“그럼 그 거문고는 줄을 빡빡하게 조여야 소리가 잘 나느냐?”

“아닙니다, 너무 조이면 좋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그럼 줄을 느슨하게  해야 좋은 소리가 나느냐?”

“아닙니다. 너무 느슨해도 좋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좋은 소리가 나느냐?”

그러자 그 수행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거문고는 줄을 너무 조여서도 안되고, 너무 느슨해서도 안되며 잘 맞게 조여야 좋은 소리가 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 하셨다. “그렇다! 수행도 이와 같아서, 너무 열심히 하려 해도, 또 너무 나태해서도 안된다. 조급한 마음을 버려야한다.”

조급한 마음을 버리는 것이 나태하라는 것은 아니다.


執之失度 必入邪路

집지실도 필입사로

집착하면 도를 잃게 되고,

반드시 삿된 길(틀린 길)로 들어서게 된다.


도를 얻어야지 깨달아야지 하면 오히려 도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정답을 찾으려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편안하게 선입견 없이 접근해야한다.

우리는 거부 하다가 집착하다가 하면서 세월을 보낸다.

그렇게 하여 지우치다가도,

어느 순간 벗어나면 환하게 보인다.


放之自然 體無去住

방지자연 체무거주


집착하지 않고 놓아버리면, 스스로 진리의 길을 간다.

본체는 머무름도 없고 감도 없다.


상을 놓아 버리면 저절로 이루어진다.

얼음은 모양이 정해져 버렸기에 모양이 다른 곳에 넣으려면 깨트려야 한다.

인연을 따라 흐르는 물처럼 살아가지만, 고집할 때에 갈등이 생긴다.


언제나, 갈등은 하나를 고집할 때 생긴다.

관계에서 유연하지 못하면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적절하게 항상 맞추어야 한다.

상이 벗어지면 저절로 맞춰진다.

놓아 버리면 자연히 돌아가므로 본체가 가거나 머무름이 없다.


[신심명 13강]

任性合道 逍遙絶惱

임성합도 소요절뇌


성품[본성, 자성]에 맡기면, 도에 계합하게 되어,

‘왔다 갔다’ 하는 번뇌가 끊어져 저절로 멀리 사라진다.

맡길 임, 성품에 맡기면 도에 계합하게 된다. 저절로 번뇌가 사라진다.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끊으려하면 번뇌가 끝없이 일어나고 놔두고 지켜보면 사라진다.


*수식관; 숨에 몰입하여, 있지만 옆에서 떠들면 놓친다. 그러나 숨은 계속 된다. 알아차림이 집중되어 있으면 떠드는 줄 알면서도 알아차린다. 머리 속의 온갖 생각, 번뇌가 일어나던 말던 호흡만 집중하면 번뇌는 치성 했다가도 저절로 사라진다.

이때 번뇌는 가만 내버려둔다. 다만 번뇌에 빠져 허우적 되지 않기 위해, 호흡에 집중한다. 다른 것을 모두 내버려 둔다. 놔버리는 것이다.


담배, 담배 피우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안피워야지 하지도 말고, 피워서 없애려하지 말고 내 버려둔다. 그러다 안 피우고도 사라지는 것을 보면 놔두게 될 수도 있다. 어떻게 되나 가만히 볼 수 있는 것이다. 한대만 피워 볼까? 아니 참아야지 하는 것들은 시간 낭비이다.

졸음 오는 것도 내버려둔다. 졸음은 오는 원인이 있으니 그것의 성품에 맡겨 두면, 그러다 어느 순간 사라진다. ‘잠깐 자고 올까(이건 빠져 드는 것이다. 깨어있지 못함이다.)? 그래서는 안된다.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깨어있지 못함이다.


繫念乖眞 昏沈不好

계념괴진 혼침불호


생각에 매달리고 얽매이게 되면 참됨(진리)에서 어긋나 버리며,

어지러움에 빠져서 좋지 않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얽매이게 되면 진리에 어긋나 버린다. 그러면 어지러움에 빠져 버린다. 좋치 않다.


不好勞神 何用疎親

불호노신 하용소친


기분이 좋지 않으면 정신이 수고롭다(피곤하다).

어찌 멀고 가까움을 가리랴?


기분이 좋지 않으면 정신이 피곤하다. 우리는 늘 멀고 가까움을 가린다. 멀고 가까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欲趣一乘 勿惡六塵

욕치일승 물오육진

일승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육진(경계)을 미워하지 말라.


삼승(성문승, 연각승, 대승 보살승)이 따로 없이 부처되는 길을 가고자하면,

육진이란 6가지 경계(색성향미촉법)로 육진을 미워하지 말라.

경계를 탓하지 말라. 세상을 미워하지 말라.

경계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그것은 그것일 뿐이다.

이건 자기 업식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六塵不惡 還同正覺

육진불오 환동정각


육진을 미워하지 않으면,

도리어 정각과 같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으며, 그것이 바로 정각과 동일하다(좋다, 나쁘다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본다면 그대로 깨달음이다).


나를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것, 즉 나의 업식을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것을 ‘아상’ 이라 한다. 아상을 객관적 진실로 여기면, 그게 ‘내가 옳다’고 고집 세우는 것이고 이것을 ‘아집’이라한다. 여기서 아집이 모든 고뇌 번뇌 갈등의 원인이다.  우선 수행자로써 아집은 무조건 끊어야한다. 그러면 아상인 줄 알면서도 갈등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상을 아상인줄 안다면 서로 다른 느낌과 서로 다른 취향이 공존할 수 있다.

‘내 보기는 이렇네, 내 입에는 좋네’ 정도로  표현하면 갈등은 없다. 아상은 생겨도 갈등은 없다.


딱 사로 잡히면, 아 내가 사로 잡혔구나, 내가 또 주관을 객관으로 여기고 있구나, 내 입장을 절대화 시켰구나. 상을 버리지는 못해도 고집은 부리지는 말자. 이것만으로도 우리 고뇌의 80-90%는 해결된다고 본다.


[신심명 14강]


智者無爲 愚人自縛

지자무위 우인자박


지혜로운 자는 함이 없거늘,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결박하고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생활에 걸림이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속박하고 있다.

도신 사미가 승찬 대사에게 ‘저를 해탈케 하소서’ 하자 ‘사미여, 누가 너를 속박하고 있느냐?’ 하자, 그때 자기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나를 속박하고 있지 않다.

불안한 마음을 찾아본다. 자기를 돌아본다. 이것이 관하는 것이고, 조견 이라한다.

눈을 뜨면 없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함(노력할게 없다)이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속박한다.


法無異法 妄自愛着

법무이법 망자애착


진짜 법이라고 할 다른 법이 없거늘,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상을 지어 집착하여 진리라는 것을 만든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법이라고 할 것이 없다. 이것이 진리다라고 할 어떤 진리가 따로 있지 않다. 꿈을 깨면 남을 해치는 강도도 없고, 나를 구원해주는 보살도 없다.

진짜 진리라고 하는, 진리 아닌 것과 대별되는 진짜 진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상을 지어 집착하여 진리라고하는 것을 만든다.


將心用心 豈非大錯

장심용심 기비대착


마음가지고 마음을 쓴다면(용쓴다면), 크게 어긋남이 아니겠는가?


그냥 벌떡 일어나면 되는데 ‘일어나야지, 하고 있다.’

용을 쓰는 것은 이미 어긋나 버린 것이다.


迷生寂亂 悟無好惡

미생적란 오무호오


어리석으면 고요함과 어지러움(혼란)이 생기고,

깨달으면 좋고 싫음이 없어지도다.


어리석을 때 혼란이 온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고요함과 혼란이 구분되면 어리석은 것이다.

어리석으면 깨끗하고 더럽고가 있다. 그러나 지혜로우면 그런 것이 없다.

육도 윤회나 천상에 가는 것 모두가 꿈속의 이야기 이다.

꿈에서 깨면 강도도 보살도 아무것도 없다.


一切二邊 良由斟酌

일체이변 양유짐작


모든 두 견해(선악, 시비, 구정, 생멸)는 자못 짐작하여 생겨난다.


모든 상대적인 두 견해는 짐작(잔에 술을 따른다)하는데서, 즉 두 견해란 결국 선악을 헤아려 분별하는데서 양변이 생겨나는 것이다.


夢幻空華 何勞把捉

몽환공화 하로파착


꿈속의 허깨비나 허공의 꽃을 보았다면,

어찌 알지 못하고 잡으려고 애쓰는가?


착각하여 헛것을 본 것을 잡으려 애쓰는가?

우리가 근심 걱정하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있는가? 본인은 있다고 착각하지만, 눈을 뜨면 없다. 사실은 눈을 안떠도 없는 것이다. 다만 모를 뿐이다.


得失是非 一時放却

득실시비 일시방각


얻고 잃음(옳고 그름)을 일시에 놓아 버려라.


이 신심명 전체 가르침의 핵심은 양단을 떠나는 것이다. 즉 일체 유심조라는 것이다.

꿈에서 깨지 못하면 엄청나게 할일이 많지만, 깨고 나면 아무런 할일이 없다.

도망가지 말고 뒤 돌아서서 정면으로 살펴보라. 조견하라. 

놓아 버리는 것이 눈을 뜨는 것이다. 모든 게 사라져 버린다.


[신심명 15강]

眼若不睡 諸夢自除 안약불수 제몽자제

눈에 만약, 졸음이 없다면, 모든 꿈이 스스로 사라져 버린다.


눈에 졸음이 없다는 것은 잠에서 깨어난다.

눈에 졸음이 있다는 것은 즉 미혹하다, 자기 생각에 사로 잡혔다는 뜻이다.


心若不異 萬法一如

심약불이 만법일여


만약에 마음에 다름이 없다면, 만법이 한결 같다.


마음에 다름이 없다는 것은, 좋았다 싫었다가 하는 게 없으면,

다시 말해 마음이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지 않으면 이라는 뜻이고,

항상 우리 마음이 촉새 꽁지처럼 움직인다.


만법이 한결같고 허물이 없다.  ‘공’이다.

즉 바깥의 모든 존재가 그대로이다. 산은 산, 물은 물.

그래서 맞고 틀림이 없고 깨끗함과 더러움이 없다.

만물에는 본래 값어치가 없으며, 그 값어치라는 것은 우리 마음에 있을 뿐이다.

다만 인연따라 그때그때 정해지는 것이다.

[피난 비유 생략함]

만약에 마음이 다르지 않으면, 만법이 한결 같다.


一如體玄 兀爾忘緣

일여체현 올이망연


본체가 한결 같으면, 그 우뚝 선 모양이 인연을 다 잊게 한다.


만법이 한결 같다는 것은 공이다 라는 말이다.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다. 이것이 한결 같음이다.

제법이 공한데서 온갖 것이 일어나므로.. 온갖 것들이 색인데 이것이 곧 공이다(색즉시공). 그런데 공에서 모든 것이 일어난다. 그래서 공즉시색이다.

제법이 공한 도리에서는 모든 인연이 사라지고, 일어나면 색이라 한다.

그 현묘한 제법이 공한 도리에서는 모든 인연이 사라진다.


萬法齊觀 歸復自然

만법제관 귀복자연


만법을 있는 그대로 보면(진여), 돌아감이 자연스럽다.

만법을 있는 그대로 보면 마치 꿈속에서 온갖 일이 벌어졌는데 눈을 떠니 사라져 버리듯이 자연스럽다.


泯其所以 不可方比

민기소이 불가방비


그 까닭을 다하면, 비교할 것이 없다.


그 까닭, 원인들이 다 사라지면, 비교하거나 견줄 것이 없다.

눈을 떠서 강도가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 느낌은 비교할 수가 없다.


[신심명 16강]

止動無動 動止無止

지동무동 동지무지


멈추면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아니요,

움직이면서 멈추니, 멈춤 또한 아니다.


앙구리말라가, “너는 멈추라는데 왜 멈추지 않았는가?” 했을 때.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멈추었다. 멈추지 않은 것은 너다. 너는 천상에 가려는 욕심에 헐떡거리고 있다.”

나는 마음에서 모든 번뇌가 멈추었다. 즉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


사람을 99명이나 죽였던 앙구리말라가 다시 죄의식에 사로 잡혔을 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비구여, 너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로 한번도 살인 한 적이 없다.”


兩旣不成 一何有爾

양기불성 일하유이


둘이 이미 성립하지 않는데, 어찌, 하나인들 있을 수 있겠는가?


이미 눈을 떠버리면 둘이 성립할 수 없다. 진은 진이라고 세울 것이 없어야 한다.

동산.서산이 시비거리가 아닌데, 비동비서가 진이다 하면 동도 아니고 서도 될 수 없다.

비동비서라는 것은 진도 가도 아니라는 것이다. 

비동비서도 고집하지 않는다.


究竟窮極 不存軌則

구경궁극 부존궤칙

마침내 궁극에 이르면,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궁극에 이른다는 것은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면 이라는 뜻이며,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궤칙이 없다는 것은 금강경에서는 무유정법이라는 표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학교선생님도 다만 그 인연에서 선생님이고, 절에서는 우바새우바이 일뿐이다.

회사 사장도 부인을 만나면, 남편일 뿐이다. 그러나 사장임을 고집하면 갈등이 생긴다.

이러한 상이 없어야 자유로와 진다.

상을 지으면 상에 갇히고, 고착화된다. 선생님과 아이가 다투면, 선생님이 먼저 화를 낸다. ‘이게 감히’ 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몇 살이다.’ 하는 것도 상이다.


契心平等 所作俱息

계심평등 소작구식


마음이 계합하여 평등해지면,

짓고 짓는 바가 모두 그친다.


다할 구 쉴식, 여기서 평등하다는 것은 ‘그냥 하나의 존재로 보면’ 이라는 뜻이고, 짓는 바가 그친다는 것은 시비분별이 스르르 가라앉는다는 말이다.


어떤 사물의 이치가 내 마음에 계합되면, 즉 색이 공함을 깨달으면(제법이 공함을 알면), 그러면 평등해진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남산도 북산도 되고 동산 서산도 된다.

즉 모든 시비분별이 사라져 버린다.

狐疑淨盡 正信調直

호의정진 정신조직

여우같은 의심이 다해버려 맑아지면,

바른 믿음이 고르고 곧으리라.


바르게 믿는 마음을 신심 혹은 정신이라 한다.

오늘의 나의 모든 믿음은 사실은 정신이 아니고 미신에 속한다.

의심이 다하고 끝나면 그때 올바른 믿음이 나온다.

바르게 믿는 마음을 신심이라 한다.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어 진다.(무상정등각)


돈 있을 때 겸손하면 돈 없을 때 구박받지 않는다.

예쁜 여자가 있었다. 많은 남자가 따랐다. 이후에 화상으로 얼굴을 망쳤다. 남자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 당연하다. 그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상에 집착하면 화를 자초한다. 상을 짓는 것은 자유를 해치는 것이며, 노년의 외로움은 돈 버는 시절, 힘 있던 시절 목에 힘을 준 과보이다.


[신심명 17강]


一切不留 無可記憶

일체불류 무가기억

일체가 머무르지 아니하므로,

어찌 기억 할 것이 있겠는가?


머물 류,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항상 함이 없는 즉 무상을 말하며, 기억할 것이 없는 것은 ‘집착할 바가 없다.’ 는 뜻. 제행이 무상하니 집착할 바가 없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변해간다. 영원한 것은 없다.


虛明自照 不勞心力

허명자조 불로심력

허허로이 밝아 스스로 비추나니, (텅 비었다)

애써 마음 쓸 일이 아니로다. (애써 노력할 일이 없다.)


다만 인연 따라 일어나므로, 오는 인연은 오는 대로 받아들이고, 가는 인연은 가는대로 받아들인다. 좋아하거나 미워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래서 마음으로 수고 할 일이 없다. 항상 싫은 사람이 오고, 좋은 사람이 간다. 그러나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만  없애면 된다.


非思量處 識情難測

비사량처 식정난측

이 도리는 생각으로 헤아릴 곳이 아니니,

알음알이와 감정으로는 측량하기가 어렵다.


량은 헤아릴 량, 식은 알음아리 식, 이 도리는 사량분별(생각)로 알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이 세계가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꿈속에서는 꿈에서 깬 소식을 알 수 없다.


[신심명 18강]


眞如法界 無他無自

진여법계 무타무자

진리의 세계에서 보면, 나도 없고 남도 없다.


진여는 진리의 세계, 제법이 공한 세계이며 법계는 우주를 뜻한다. 그래서 제법이 공한 세계에서 보면, 나도 없고 남도 없다는 것은  즉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으로 다만 연관되어있을 뿐이라는 것. 이것은 우리의 세계 생멸이 있는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다.


얼음이 녹아 물이 생기는 것은 좁은 소견에서야 물이 생긴 것으로 보이지만, 전체를 큰 눈으로 보는 견지에서는, 실재는 아니며 다만 바뀌어 모양만 바뀐 것이다.

제법이 공한 세계에서는 나와 남이 둘이 아니다.


비행기 속에 창고 속에 음식이 잔뜩 쌓여 있다. 식사시간이 되어 모두 나누어 주었다. 이제 창고에는 음식이 비워졌다. 그런데 비행기가 가벼워 졌을까? 화장실에는 대소변이 늘어  났다. 그러나 비행기는 무거워지지 않았다. 부분적으로 보면 늘어나고 줄어들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았다.


좁은 소견으로 보면 너와 나는 남이다. 큰 눈으로 보면 한손 위의 손가락들처럼 나와 남이 아니다. 진여법계에서는 둘이 아니다.


要急相應 唯言不二

요급상응 유언불이


이런 도리를 급히 상응하기(알기)를 원한다면,

오직 둘 아님을 알아야한다.


이런 도리를 담박 알고자 하면 오직 둘 아님을 알아야한다.


不二皆同 無不包容

불이개동 무불포용

둘 아닌 도리를 알면 모두가 같아서,

포용되지 않는 바가 없다.


둘이 아니면 모두가 같다는 것은 제법이 공한 도리를 알면 모두가 평등하다.

다만 인연을 따라서 움직이므로 포용되지 않는 바가 없다는 뜻인데, 

둘 아닌 도리는, 곧 제법이 공한 도리이다.


十方智者皆入此宗

시방지자 개입차종

시방의 지혜로운 분들도 모두 이 종에 들어오리라.


시방은 십방, 동서남북, 그 사이 사유와 상하를 말하는 것으로, 온 세계를 뜻하며, 온누리의 지혜로운 분이라는 것은 시방의 부처님들 이라는 뜻이다.

이 종에 들어오리라 하는 것은 이 도리 즉 제법이 공한 도리 이자, 둘 아닌 도리를 으뜸으로 삼는다. 이 도리로 깨달음으로 삼는다.


宗非促延 一念萬年

종비촉연 일념만년,

이 종은 짧다 하거나 길다 할 것이 없어서,

찰나와 긴 세월이 둘 아니다.


혹은 이것으로 종취로 삼으며, 이 도리에서 보면 길다고 할 수도, 짧다고 할 수도 없다.

법성게의 일념이 무량겁이며 무량겁이 일념이라는 같은 뜻이다.


無在不在 十方目前

무재부재 시방목전

있거나 있지 않음이 없어서, 시방이 모두 내 눈앞이로다.


댓귀가 조금 맞지 않아 다른 자료에서 보면  무재부재 시방복전 대신에

非古之今 三世一念

비고지금 삼세일념

옛과 지금이 (둘) 아니니,

삼세가 곧 찰나이다.


삼세란 과거세 현재세 미래세를 말하며, 한량없는 세월을 말한다. 길고 짧음이 없다.

(금강경의 삼세심 불가득)


極小同大 忘絶境界

극소동대 망절경계

지극히 작은 것은 큰 것과 같아서,

큰 것과 작은 것의 경계가 사라져 버렸다. (경계가 없다.)


極大同小 不見邊表

극대동소 불견변표

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같아서,

끝과 겉을 볼 수가 없다.


법성게, ‘일중일체 다중일’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하나이니. ‘일미진중 함시방’ 하나의 작은 티끌 속에 우주를 다 포함하고 있다. 일체진중 역여시.

상식이 통하지 않는 부분이다.


경험의 세계에서는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다. 우리의 경험이 너무 좁은 범위에서 관찰한, 그 경험을 모든 것에 적용하여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결과로 오늘날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정확한 게 아니다. 모든 괴로움이 여기에서 일어난다.


[신심명 19강]


有卽是無 無卽是有

유즉시무 무즉시유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니,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다. 원자 속이 텅 비어있고, 텅빈 것들은 또 차 있다.

없다하면 가득차 있다.


若不如此 不必須守

약불여차 불필수수

이와 같은 도리를 깨닫지 못했다면,

모름지기 이건 지킬 필요가 없다.

만약에 이와 같지 않다면,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라는 뜻이다.


一卽一切 一切卽一

일즉일체 일체즉일

하나가 큰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니


但能如是 何慮不畢

단능여시 하려불필

다만, 이와 같으면 

어찌 다하지 못할까 걱정하겠는가?

이런 도리를 안다면, 아무 걱정 할게 없다.


信心不二 不二信心

신심불이 불이신심

믿는 마음이 곧 둘이 아니니,

둘 아님이 곧 신심이다.


여기서의 신심은 깨달은 마음, 제법이 공한 상태의 믿음이다.

반야바라밀다는 시 대신주(신), 시 대명주(혜), 깨달음보다 가장 확실한 믿음은 없다. 이보다 더한 실천이 없다. (시 무상주), 어떤 증득보다 견줄 것이 없다. (시 등등주)


言語道斷 非去來今

언어도단 비거래금


언어가 끊어지고(말할 필요가 없이),

과거 현재 미래가 곧 일념이다.


승찬대사 이분이, 이렇게 일체가 허망함을 인생이 고 임을, 이미 몸으로 알았으므로, 그래서 이 세상에 미련이 없는 사람이었으므로 담박 깨우쳤을 것이다. 번뇌와 보리가 둘 아니요, 함이 없음은 어떤 의도가 없는 것이다.


신심명 信心銘


모든 번뇌의 뿌리가 얻으려는데 있다. 그래서 정법은 우리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반면, 정법 아닌 것은 귀에 속속  들어온다.

사람이 늙거나, 높은 지위에서 떨어져 바닥 인생을 살거나, 중병을 앓으면 보통 욕심은 모두 없어지고 없다.


어떤 40대 남자가 밤중에 찾아와 혜가대사에게 말했다. “저는 죄를 많이 지어, 이 꼴로 삽니다. 제 죄를 사해 주소서.”

혜가대사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내가 너의 죄를 사해 줄테니, 이리 내 놓아라.”

한참 있다가 거사가 말했다. “죄를 내 놓을래야 내 놓을 수가 없습니다.”

혜가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내 이미 너의 죄를 사했느니라.”

그리고 그날 밤 출가하여 법을 전수 받았다.


이분이 승찬대사이다. 평생 딱 글 한편을 남겼다. 후세의 수행자들이 마음에 새기라는 뜻으로 남긴 글, 그것이 신심명이다.


어느날 어린 사미승이 들어와 승찬대사에게 말했다. “저에게 해탈하는 법을 일러 주소서.”

승찬대사가 말했다. “누가 너를 속박하느냐?”

사미승이 말했다. “아무도 속박하지 않습니다.”

다시 승찬대사가 말했다. “내 이미, 너를 해탈하여 마쳤느니라.”


초기 선종은 매우 간단명료하다. 깨달음은 몸과 마음에서 체험되어지는 것이다.

불교의 믿음은 믿느냐 안 믿느냐를 가지고 믿는다 하지 않는다. 믿고 이해하고 실천하고 경험적으로 증득해야한다. 이것을 믿음이라한다. 신심명의 핵심사상은 양변을 떠난 중도의 길(중도사상)을 가르친다.


쾌락주의란 누구나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욕구 즉 원하는 바가 충족되면 만족의 기쁨이 있다. 이 기분 좋음으로 행복을 삼는 것을 쾌락주의라 한다.

모든 욕계의 중생은 쾌락주의이다. 이것이 가장 완벽하게 충족되는 곳이 타화자재천, 가장 나쁜, 전혀 충족되지 않는 것을 지옥이라 한다. 그래서 천상과 지옥이란 욕구의 충족여부에 따라 구분 되어진 것이다.

자재천왕이 욕계의 우두머리이다.

욕구란 한번으로 만족되지 않는다. 점차 욕구가 커진다. 만족 양이 점차 증가한다. 만약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곧 그것이 불만이고 괴로움이다. 이로 인해 벌어지는 것이 육도요, 그래서 육도윤회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완전한 행복은 절대 없다.

두 번째는 욕망이 괴로움의 원인이어서 이것을 씨를 말리자 하는 것이 있다. 잠 안자고,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렇게 고행을 통해 해탈을 시도하는 것이 고행주의이다. 부처님께서 이 고행의 거의 꼭대기까지 가 보았지만, 역시 해탈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의 삶을 돌아 보셨다. 욕구를 따라가거나 욕구를 거슬려 보니, 둘 다 욕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즉 둘 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데에 공통점이 있다. 이 말은 즉 집착과 외면은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이를 일러 양변이라 한다. 사실은 둘 다 한 뿌리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둘을 다 놓아 버렸다. 이 둘을 떠난 제삼의 길이 중도였다.

양변을 떠난 것은 어떤 것인가? 꿇어 앉아 오래 있으면 다리가 아파진다 이때, 이걸 펴면 쾌락주의, 안따라 갈려면 그대로 참아야 한다. 이것은 고행주의이다.


그러면 이것을 떠난 중도는 무언인가? 다리가 아파도 펴지도 않고 참지도 않는다. 다리의 통증을 알아차리고 그 통증을 지켜보는 것. 통증을 통증으로만 본다. 이론과 달리 실제로는 안된다. 그래서 몇 번 시도해 보면 이것이 되기 시작한다. 연습이 필요하다.

물론 다리의 통증을 지켜보는 것으로 통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하는 그 둘을 떠나야 한다.

[신심명 3강]

우리는 항상 좋아 하고 싫어하고 둘 중 하나 밖에 할줄 모르며, 사랑하면 가져야 하고 싫어하면 버리려한다. 항상 여기에 속박 받고 있으며 여기에는 자유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이) 이해가 되어도 현실에서는 실수를 반복하기도 하며 계속 연습해야한다.

실수를 계속하면서 경험하면서 극단에 치우치면서 치우치지 않는 길을 찾아야한다. 실패하더라도 원리를 알고하면, 실패가 축적되면서 곧 극복하게 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이 정법이다.


至道無難 唯嫌揀擇

지도무난 유혐간택


도에 이르는 길(성불)은 어렵지 않다.

오직 가리는 것(사량분별)을 꺼리면 된다.


지는 지극할 지 혹은 이를 지로 해석한다. 지극한 도란 열반을 말한다. 성불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오직) 유 (혐오의 혐 , 꺼릴 혐) 혐, (취사선택)간택을 멀리하면 된다. 가리지 않으면 된다는 뜻이다. 이런가 저런가? 가져야 할까 안가져야 할까? 같은 분별을 내지 않으면 저절로 된다. 결론적으로 중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양극단을 떠나면 된다.


시비분별하는 마음을 버려라. 불생불멸이요 불구부정이요 부증불감 이다.

간택이란 깨끗하다 더럽다 하고 깨끗한 것을 가지고 더러운 것을 버리게 된다. 여기서 시비가 일어난다. 그래서 간택하지 않는다.


但莫憎愛 洞然明白

단막증애 통연명백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마라,

텅 비어서 명백하다.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은 양극단의 선택을 말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 그러나 내가 이 두 가지 밖에 찾지 못하는 것은 (절을 하다가 다리가 아프면) 이미 싫어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미 싫어하면 다리를 펴던가, 참던가 두가지 밖에 없게 된다. 근본 뿌리는 싫어함이니, 싫어하는 이 생각을 놓아라. 통증은 알아차렸고, 빨려 들어가지 말고 통증을 지켜본다. 그리고 놓아 버려라하면 통증을 놓으려하지만 그건 놓아지는 것이 아니다. 통증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은 싫어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통증을 통증로만 알아라. 통증을 통증으로만 느껴라.

담배를 끊어야 하겠다하면 이미 근본에서 어긋난 것이다. 왜 담배가 피우고 싶을까? 이건 참으면 고행주의, 따라 피우면 쾌락주의이다. 이를 악물고 참던지, 다른 걸로 대체해 보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이렇게 까지 고통스러워하면서 이렇게 할 걸 뭐 있나’ 하게 된다. 피우려는 욕구를 참고 견디면 현기증이 난다. 이렇게 까지 하면서 담배를 끊을게 있나. 그러면서 자꾸 생각을 바꾼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 가르침까지 떠올리게 된다. 합당한 이론을 찾아내면(합리화), 그냥 피워 버린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담배 피우고 싶은 욕구를 알아차리고 지켜봐야 한다.

참지 말고 욕구를 지켜본다. 이 욕구는 담배를 피워야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담배피우는 욕구를 알아차리고 지켜 보아야한다.

현기증이 나고, 마음속에 회의가 일어나고 몸을 못살게 굴고 그러는 그 모든 과정, 욕구가 어떻게 작용해서 몸부림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가만히 지켜보면서 저절로 내려가는 것을 보면 3번 쯤 지나면, 견디기가 싶다. 다시 담배의 욕구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을 수행과제로 삼아서 참지도 않고 따라가지도 않고, ‘알아차리고 지켜보기’를 계속 해야 한다.

좋아하고 싫어하기 이전에 알아차림이 있어야한다. 이것이 12연기의 ‘수’이다. 좋아하고 싫어함이 일어나기 전에 알아차려야 한다.

느낌을 느낌으로만 알아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면 텅 비어서 아주 명백하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 좋아하는 것은 가져지지 않아 괴롭고 미워하는데 헤어지지 않으면 괴롭다.

이세상의 모든 사물은 인연 따라 만나고 헤어지는데, 어떤 것을 좋아 하면 그것이 사라지는 인연이라면 괴로워진다. 원래 사물 자체가 좋고 나쁨이 없다. 사물은 사물일 뿐, 다만 내가 좋고 싫어하는 마음을 냄으로서 괴로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아주 뚜렷해진다.


毫釐有差 天地懸隔

호리유차 천지현격


털끝만큼의 차이가 생기면,

정법에서는 천지차이로 벌어진다.


보통, 우리는 이미 근본에서 멀어져서 제자리를 찾으려 하니, 이쪽에 갔다가 저쪽에 갔다가 하게 된다.

이 가르침 즉 제법이 공한 도리에서 털끝만큼의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 차이만큼 벌어진다.


欲得現前 莫存順逆

욕득현전 막존순역


지금 바로 도를 얻으려 한다면,

따라가거나 거슬러서는 안된다.


따라가거나 거슬리지 말라는 것은, 따르고 거스르는 이전, 생각나기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생활 속에서 항상 양극단에 치우친다.

애를 야단칠까 말까? 항상 내 뜻대로 하는 것에 뿌리를 두고, 내 뜻대로 하거나 아니면 외면한다. 그러나 외면은 집착을 놓는 게 아니다. 애를 내버려두라 하는 것은 그냥 지켜본다. 아이가 다치지 않게 그네를 딱 잡고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다치던 말던 내버려두고 가버리는 것도 아니다.

그냥 지켜보는 것이다. 그렇게 남의 집 아이를 보듯이 보는 것이 지켜보는 것이다.

[신심명4강]

신심경은 중도사상임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 바로 도를 얻기를 바란다면, 거스르거나 따르지 마라. 좋아하는 것은 따르는 것이고 싫어하는 것은 거스르는 것이다.

결국 따르고 거스르는 것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내지 마라. 이다.


違順相爭 是爲心病

위순상쟁 시위심병


어기거나 따르면 서로 다투게 되는데,

이것은 마음에서 생긴 것이다.


이래야한다 저래야한다,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하고 서로 다투면 이것이 곧 마음의 병이다. 즉 마음에서 생긴 것이다.


우리에게는 오해가 있다.

여기 흰종이가 있다. 이것을 볼 때 푸른안경을 끼고 보면 푸르게 보인다. 그때 내 눈에는 푸르게 보인다고 해야 한다. 이것은 주관이다. 종이의 색깔은 내 눈에 있다. 그러나 ‘그 종이 색깔이 푸르다’ 하면 인식하면 이것을 객관적 사실로 인식한 것이다. 즉 내가 아는 것이 본래 푸르다. 이것은 색깔이 종이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모두,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을 객관이라고 믿는데 있다. 

결과는, ‘내가 아는 대로, 내가 인식하는 대로 그것을 사실로 믿어버리면, 고집하게 되고, 갈등을 일으켜 서로 다투고 외면하게 된다. 이것은 자기 업식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다수를 동원하여 자기가 옳다고 표현하게 된다.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자, 길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자하는 것은 ‘내가 옳다’를 주장하는 것이다. 아니면 옛날 자료를 캐내어 자기주장이 옳음을 내 세우고, 지지 않으려 한다. 여기에는 해결책이 없고 오직 힘에 의해 눌러 해결된다. 그러나 이것은 또 문제를 일으킬 뿐 해결책이 아니다.

서로 다툼의 원인은 주관적인 것을 객관적으로 인식함으로 인한 것이다. 이것이 반야심경의 전도몽상이다.

[신심명 5강]

그래서 ‘이 종이가 푸르게 보인다’는 것은 다만 ‘내 눈에 푸르게 보인다’. 하는 데까지는 가야한다. 그래야 대화가 가능하다. 본래 이세상의 사물들은 모두 본래 옳고 그름이 없다. 이것은 주관 일 뿐이다.

그래서 이것을 마음의 병이 이라한다. 마음에서 지은 바를 마음에서 지은 것으로 아는 것이 바로 아는 고, 마음에서 지은 것을 객관이라 아는 것이 전도몽상 이다

이게 중생의 병이다. 그리고 내 눈에 이렇게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바로 나의 업식 때문이다.

된장찌개 냄새가 구수한 것은, 된장찌개가 원래 구수한 것이 아니라 내 코에서만 그런 것이다. 마음에서 일어난 것을 객관적이라고 믿어 버린 것, 이것이 전도 몽상이다.

원래 좋은 냄새 없고, 원래 좋은 사람 없고, 오직 마음(자기 업식)에서 일어난 것이다.

나의 의견과 나의 생각을 객관화 시키지 마라. 이 모두가 마음의 병이다. 그걸 알면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 음식 간이 딱 맞네. 하는 것도 내 혀끝에 맞다고 아는 것이 올바로 아는 것이다.


不識玄旨 徒勞念靜

불식현지 도로염정

이런 미묘한 뜻을 알지 못하고,

헛되이 수고하여 생각으로 고요히 하려한다.


이런 미묘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공연히 수고한다. 생각으로 고요히 하려하는 것이다.

내일 아침 기도하려면, 5시에 일어나야 한다. 결심하고 자고 아침에 일어나야지 하면 못 일어난다. 이때 일어나야 되는 줄 아는데 일어나고 싶었는데 몸이 말을 안 들어서 못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이거 몸을 사탄 취급하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가르침에 맞지 않다.

식물인간이 되어있거나 몸을 묶어 두어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못 일어나는 것이고, 그게 아니면 일어나기 싫어서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자기는 일어나고 싶었는데 일어나지 못했다고 알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제법이 공하다하니 몸도 제법이며 공하다. 공하다는 것은 잘된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니다. 사실은 몸이 아니라 내가 일어나기 싫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싫어하는 이 마음을 놔 버려야 한다. 잘못 알고 있으면 해결이 나지 않는다.

마음을 고요히 해야지 하는 것은 마음이 불안하다는 것이고 이걸 고요해야지 한다고 고요해지지 않는다. 불안한 마음의 원인을 찾아 놔 버려야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 진척도 없는 생각만으로  고뇌가 많다.

주어야지 하는 것은 주기 싫다는 것이고, 가야지 하는 것은 가기 싫다는 것이고, 보시해야지 하는 보시하기 싫다는 것이고, 사랑해야지 하는 것은 사랑하기 싫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노력한다는 것은 그게 하기 싫다는 뜻이다. 병을 고치려면 근본을 찾아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서 해결해 버려야한다. 마음을 찾아서 놔 버려야 한다.


그래서, 가야할 텐데 할 때는 가버리면 되고, 줘야지 할 때는 줘 버리면 되고,

생각만으로 무얼해야지 하는 것은 하기가 싫다는 것이고, 일어나야지 하는 것은 일어나기 싫다는 것이니 그 순간 발딱 일어나 버리면 일어나기 싫다는 그 생각도 없어진다. 아니면 안가고, 안주고, 안 일어나는 방법도 있다. 이것은 번뇌는 일으키지 않지만 있지만 과보를 각오해야 한다.

‘하고 싶은데 안하고,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것’을 괴롭다 하지만, 이도 자기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 괴로워 할 일이 아니다.

[신심명 6강]


圓同太虛 無欠無餘

원동태허 무흠무여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아서,

부족하거나 남음이 없다.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다는 것은 두루 원만하여 걸림이 없다는 뜻이고, 흠은 부족할 흠 여는 남을 여, 부족하거나 남음이 없다.

존재자체는 그것대로 완전하다. 거기에는 부족하고 남음이 없고, 깨끗하고 더러운 것도 아니다.


良由取捨 所以不如

양유취사 소이불여

 

취하고 버림으로 말미암아,

그런 까닭에 한결같지 못하다.


양은 정말로 유는 말미암아 이니 취하고 버림으로 말미암아, 소이는 그런 까닭에, 불여는 한결같지 못하다, 여여하지 않다.

느낌(수)은 쾌, 불쾌, 덤덤으로 느껴진다. 쾌에는 사랑하는 마음, 불쾌에는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좋아하면 취하려 하고 싫어하면 버리려한다. 12연기상에서는 수 애 취(취사를 취라한다.) 수에 반연하여 애가 애에 반연하여 취가, 이것에 반연하여 과보(유)가 생기고.. 그것이 새로운 발생을 일으킨다. 즉 생 노사 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취사(취하고 버리는 것)하지 마라, 애증(사랑하고 마워하는 것)을 하지 마라,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라.

그래서 자기 업식에 의해 주관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내 주관인줄 알아라.


주먹만한 그릇을 예로 들어, 이것이 큰 것인가? 작은가? 물었을 때, 누군가 대답할 때는 자기 마음 속 무언가에 비교하여 크다 작다고 대답한다. 소주잔 보다는 크지만, 단지보다는 작다.

이 자체는 큰 것도 작은 것도 아니다. 그냥 그것이다. 그것이 참모습이다.

그래서 이 모든 세상의 사물은 원래,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아니다.

제법이 공한 것이다. 모두 마음이 짓는 바 이다.

이 도리를 깨치면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고, 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다. 그러면 취할 것도 버릴 것도 없다.


莫逐有緣 勿住空忍

막축유연 물주공인

세간의 인연을 따르지 말고,

출세간의 법에도 머무르지 말라.


세간의 인연을 따른다는 것은, 모든 존재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며, 이것을  유연이라 한다. 즉 유아의 견해이며 상견이라 한다. 

그래서 존재가 변하지 않고 항상 한다는 생각을 따르지 말라는 것. 물질의 가치는 본래 없지만 중생계에서는 가치가 부여된다.

이것은 새것이냐 헌 것이냐? 가짜냐 진짜냐? 속에는 새로운 견해가 개입되어있다. 새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이미 새것이 좋다 그리고 가치가 있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꿈에 보석을 잃어 버렸다. 너무 아까워.. 그러나 깨니 꿈이다. 전혀 아깝지 않다.

꿈이란 주관에 사로잡혀있는 세계이다.

유연은 이와 같이 세상에 가치가 있다 하는 것이고, 아무것도 없다 하는 공인(공)이다. 유연에도 따르지 말고 공에도 머무르지 말라.

공은 좋은 건데 왜 머무르지 말아야하는가?


옷은 입는 게 낫다. 그러나 목욕탕에서는 옷을 벗는 게 진리다. 옷을 입는 게 좋다하는 것은 세간적 사고이다. 벗는다 하는 것은 출세간의 사고이다. 물질의 가치가 있다하더라도 본래는 없는 줄을 알아야한다. 그러나 중생계에서 가치가 매겨지기도 한다.


세상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존재의 참모습은 큰 것도 작은 것도 아닌 그냥 한 물건이다 이것이 제법이 공한 이치이다.


一種平懷 泯然自盡

일종평회 민연자진


한 가지(중도)를 바르게 지니면,

모든 번뇌가 저절로 끝이 난다.


‘한 가지를 바르게 지니면 자연스럽게 저절로 다해버린다.’

이때의 한 가지는 중도이다.

절문은 일주문이라 불리지만, 다른 곳에서는 불이문이다.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아니다. 이것이 둘 아닌 도리이며 그것이 일종 일주이다.

‘옷을 입어야 한다와 벗어야 한다’ 가 둘인 도리이다. 이치를 알아버리면 둘을 떠난다.

다만, 인연을 따라서 저절로 입기도 하고 벗기도 한다.


‘모두 공이다.’ 하면 공상을 그린 것이다. 이건 공이 아니다. 잘못이다.

본래 공하지만, 우리들에겐 '옳니, 그러니' ‘맞으니 틀리니’하고 비친다. 이것이 꼭 객관적인 것 같은 현실이다. 그러나 이걸 따르면 전도몽상이 되고, 본질(공)을 논하면 현실과는 맞지 않다. 그래서 공하지만 업식을 따라서 비침으로, 마음에 비친 이것을 객관화시키지는 말아야한다.

가다가 스스로 자각해야한다.  ‘어, 나의 주관을 객관화 시켰다.’ ‘또 나의 기준으로 세상을 본다.’ 이렇게 자각을 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항상,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렇습니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상대의 의견을 수렴하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다름이 다툼이 되지 않아야 한다. 솔직한데 고집은 하지 않는다. 그러면 삶과 인간관계가 조금씩 자유로와진다.


[신심명7강]

止動歸止 止更彌動

지동귀지 지갱미동 (다시 갱)

움직임을 멈추어 멈춤으로 돌아가려 하면,

멈춤이 다시 더 큰 움직임이 된다.


부처님 당시에 앙구리 마라라는 희대의 살인마가 있었다. 그는 당시대에 아주 악독한 살인자로 999개의 손가락으로 염주를 만들어 목에 걸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원래 이 사람은 아주 착한 영특한 젊은이였다. 스승의 잘못된 인도로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의 스승이 그에게 사람을 100명을 죽여 그 손가락으로 염주를 만들어 목에 걸면 산 상태로 천국에 갈수가 있다고 가르쳤고,  그가 그걸 그대로 믿어버린 것이다.

이 스승은 젊은 부인이 있었는데, 그 부인이 젊은이를 좋아하는 보고 오해로 인해 질투심으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앙구리말라는 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라에서 이자를 죽이기 위해 천명의 군사를 보낸다는 소문이 들리자 그의 부모는 너무나 놀라서 부처님을 찾아갔다. 자기 아이를 살려주십사고. 영특한 아이를 유학 보내놓았더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들의 간절한 소원을 다 듣고 앙구리밀라를 구하기 위해 그가 있다는 숲속으로 갔다. 모두 도망가는 사람들을 거슬려 올라가다 앙구리말라를 만났다.

앙구리 말라가 외쳤다. “사문아, 게 섰거라.” 그러나 부처님은 평소 걸음걸이로 갔으나 앙굴리마라가 따라잡기 힘들었다. 겨우 힘을 내어 부처님을 가로 질러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말했다. “그대는 왜 멈추지 않았는가?”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 하시길, “나는 이미 오래전에 멈추었네, 멈추지 않은 것은 너다.”

“멈춘지 오래되었다고? 너 계속 가지 않았느냐? 왜 거짓말하느냐?”

그러자 부처님께서, “나는 시비 분별심이 모두 멈추었다. 나는 경계 따라 일어나는 모든 분별심이 멈추었다.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짐에서 멈추었다. 그러나 너는 아직도 희노애락, 나고 죽음의 윤회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때 앙굴리마라가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자기가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제가 저지른 죄를 어떻게 해야합니까?”


부처님께서는, 그가 무지로부터 깨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저도 출가 수행을 하고 싶습니다.” 이제 그가 마음의 눈을 떳기 때문에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죽을 보므로, 그를 돌로 쳐 죽였다.

그가 돌에 맞아 죽어 간다는 소식을 듣고 부처님께서 갔을 때, 아힘사는 그렇게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한점도 후회가 없습니다. 숨이 넘어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이 요동치지 않고 고요합니다.’


우리 마음은, 두려워하면서 그걸 억제하려면 잘되지 않는다. 방안에 햇살이 들면, 먼지가 일어나 떠다니는 것이 보인다. 이걸 없애려고 빗자루 질을 하면 먼지가 더 심하게 일어난다.


좌선 중 망상이 일어나고, 망상을 떨치려고 애쓰면 그 한 생각으로 번뇌망상이 더 심해진다. 이렇게 애쓰는 것은 수행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애쓰는 것은 이미 상을 쥐고 있는 것이다.

참을 것이 없는 경지로 가야한다.

망상이 일어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그냥 지켜보면 고요해지며,

망상을 떨치려고 한 생각 일으키면 그것이 더한 망상이 되어 번뇌는 치성해진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이미 고요해 있다. 그래서 나는 멈춘지 오래다. 이런 까닭으로 감도 옴도 없다고해서 여래라 부른다.

앙굴리말라는 마음에 오고 감이 있었다, 욕구 즉 하늘나라에 가야지 하는 욕구가 있었기에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도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오고감이 없어지니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면서도 마음에 원한도 미움도 후회도 없게 된 것이다.


우리는 마음을 고요히 하려고 애를 쓰는데, 이렇게 애를 쓰는 것이 불안의 원인이다. 불안하면 불안한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지켜봐야한다.


‘구하는 게 아니다.’ 알아차리고 지켜보는 것이다.


[신심명 8강]

唯滯兩邊 寧知一種

유체양변 영지일종

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거늘,

어찌 하나(중도)라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움직임을 그치고 돌아가려 하는데 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거늘,

여기서 양변이라는 것은 이문, 시비, 구정(더럽고 깨끗한 것), 생멸, 유무, 선악, 미추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이나 미워하는 마음 등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의 마음은 항상 양변에 치우친다. 할까 말까? 이건가 저건가? 이 양변은 항상 시비를 가리게 하는 것이므로, 이 동네에서 보면 동산이고 저 동네에서 보면 서산이다. 이건 서산인가 동산인가? 이것을 떠나 그냥 지켜보는 것이 되어야 한다. 산이 하나 있어 동쪽에서 보면 서산이요 서쪽에서 보면 동산이다. 시비를 가려야하나? 떠나서 보면  동산도 서산도 아니다. 이건 산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산은 그냥 산일 뿐! 이것이 ‘공’ 이다.

양변에 머물러 있으면 어찌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이 하나는 중도이다.


一種不通 兩處失功

일종불통 양처실공

하나라는 것에 통하지 못하면

두 곳에서 공덕을 잃는다.


하나라는 것을 통하지 못한다는 것은, 즉 중도를 깨닫지 못하면 양쪽을 다 잃는다.

다시 양변에 치우친다. 하나인 줄 알면 동산도 서산도 맞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산이 본래 동산도 서산도 아님을 안다면 동산이기도 서산이기도 하다.

인간관계에서도,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고, 또 상대가 나에게 좋은 사람이 되었다가 나쁜 사람이 되었다가 한다. 그러나 사실은 상대는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니다. 내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그는 좋은 사람이 되었다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나로부터 일어나는 줄 알아버리면 양극단에서 벗어날 수 있다.


遺有沒有 從空背空

견유몰유 종공배공


유를 버리면 곧 유에 빠지게 되고,

공함을 따르면 도리어 공함을 등지게 된다.


유(유무의 단견)를 버리면 곧 유에 빠지게 된다. 유는 버려야 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유를 버리면 바로 공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 도리어 유에 빠진다. 그러면 공을 따르면? 도리어 공을 등져 버린다.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공을 따르면 공함을 등지게 된다.


범부는, 동산이라 하면 서산이라 하는 견해와 다투고, 서산이라 하면 동산이라는 견해와 다툰다. 그러다 양극단을 떠나면 동산도 서산도 아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때, 동산과 서산이 망견이므로 두 견해를 버리면 끝나는데, 이 두 견해를 모두 버리면 비동 비서산 이라는 새로운 견해를 가지려한다. 즉 이게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깨달으면 비동비서가 된다.’ 하게 되어 다시 깨달았다 못 깨달았다. 라는 시비에 휘말리게 된다. 이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공이 아니라, 공상에 집착한 것에 불과 할뿐이다.

공상에 빠지는 것은 흔히 범하는 우이다.


상을 버리는 것이 공인데, 공이라는 상을 취한 결과이다. 이것은 이미 공이 아니다.

그러면 상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은 다만 동산이라는 상과 서산이라는 상을 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진리를 새로 세우지 않아야한다.

친구지간의 토론시, 친구가 지식이 많다. 그러면 내가 밀린다. 그러다 법문을 듣고 자기 생각이 부처님 말씀과 같다는 것을 발견한다.

너무나 기뻐서 가는 길에 친구를 다시 만났을 때, 이렇게 말한다. 여보게, 부처님께서 말씀 하시길, 진리란 이런거라고 하셔..

이순간 이 사람은 자기의 견해가 옳음을 주장하기위해 부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한다.  만약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라면, 응당 이렇게 말해야한다. 내가 잘 몰랐는데, 의견이란 서로 다른 거로구나. 전에 당신이 동산이라 하기에 틀렸다고 내가 우겼는데,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동산이라 해도 될 것 같아요.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이것이 공을 이해 한 것이다.


평소에 어머니가 미신을 믿고 그러는데 오늘 법문을 듣고 보니, 어머니 그건 정법이 아니래요한다면 그게 바로 정법이라는 상을 취한 것이다.

법문을 제대로 들었다면, 미신을 믿는 어머니에게, 그런 환경에서, 그 분의 삶에서 볼 때, 그 분으로서는 그것도 하나의 믿음이요, 종교요, 신앙이다.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면 그래서 옳은 것은 아니지만 함께 가자고하면 가주기도 한다. 만약 이와 같이 한다면 제대로 불법을 배운 것이다. (동산이 동산이 아니라 그 이름이 동산이다)

불법을 잘못배우면 전법의 이름으로 타인을 구속하고 해친다. (이것은 세속적 정의이다)

진리의 세계에서는 선악이라는 것이 각자의 자기 입장에서 바라 본 것일 뿐이다.


多言多慮 轉不相應

다언다려 전불상응


이런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 이러니저러니 말이나 생각이 많다면,

더욱더 (진리에) 상응하지 못 한다


絶言絶慮 無處不通

절언절려 무처불통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래서 선에서는 불립문자라 하여 문자로 진리를 증거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불교인들은 불교라는 상에도 집착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진리다.’ 라고 하는 것 그것이 법상이며, 이것도 마음속에 그려서는 안된다.


그게 무엇이라 할지라도, 상을 취하면 갈등이 생긴다.

상을 여의면 인연 따라 이루어진다.

집에 가면 아빠가 되고, 친구를 만나면 친구가 되고, 차를 타면 승객이 되고, 가게에 가면 손님이 될 뿐이다. 상이 없는 것을 자신이 알 때 자유인이 된다.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물은 본래 형상이 없어 세모통이던 네모통이던 어디에던 들어간다.


[신심명 9강]

歸根得旨 隨照失宗

귀근득지 수조실종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지만,

비춤(그림자)를 따라가면 근본을 잃게 된다.


옛선사들의 비유를 보면, 개에게 흙덩어리를 던지면 개는 흙덩어리를 쫒고, 사자는 흙덩이를 던지면 사람을 잡는다. 사람을 잡으면 다시는 흙덩이가 날아오지 않는다.


사람을 향한다는 것은 근본을 향하면 바로 끝난다. 뿌리를 끊어 버리면 죽어 버릴텐데,

우리는 가지를 붙잡고, 그림자를 쫒고 있다. 앞으로 돌아가서 말하면, 아침에 “일어나야지” 하는 것은 ‘일어나기 싫다’의 그림자이다. 이때 벌떡 일어나는 것은 ‘일어나기 싫다’를 놓아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일어나야지 하는 그림자는 없어진다.

사람들이 갠지스 강에서 목욕하면 모든 죄가 씻기고, 천상에 태어난다고 하자, 부처님 이르시길, 그럼 갠지스강 물고기가 제일 먼저 천상에 가겠구나?  하셨다고 한다.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그림자를 따르면 근본을 잃게된다.


須臾返照 勝脚前空

수유반조 승각전공

모름지기, 잠깐사이에 자기 내면을 비추어 보는 것이,

텅 비었다는 견해에 집착하는 것 보다 낫다.


승찬대사께서 “제 무거운 죄를 면해 주십시오”하니까, 혜가 대사께서, “ 내가 너의 죄를 면케 해 줄테니 그 죄를 한번 내 놓아 보거라” 하였다.

그 사이에 승찬스님은 죄를 찾을 량으로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았고(이것이 반조이다), 죄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승각전공의 원 뜻은 전공을 물리쳐 이긴다. 인데, 전공이란 공견(공하다는 견해)에 집착하는 것을 말함이니, 일어나야지 하고 용쓰는 것보다 잠깐 일어남이, 그리고 고요해야지 하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 한번 살펴봄이 낫다.’ 는 뜻이다.

‘제법이 공하다.’ 그러고 있는 것보다 잠시 내면을 돌아보는 것, 즉 있는 그대로 살펴봄이.. 즉 잠시 라도 실상을 알아차림이 낫다.


前空轉變 皆由妄見

전공전변 개유망견


모든 것이 공하다 집착하는 것은 모두 망견이다.

법의 실상을 실제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不用求眞 唯須息見

불용구진 유수식견


참됨을 구하지 마라.

다만 망견을 쉬어야한다.


참됨을 구하려하는 것 그것도 망견이다. 망견을 버리기만 하면 그냥 되는 것이다.

그릇된 견해를 떠나 바른 견해를 구하려 하면 그 자체가 망견이다.


二見不住 愼莫追尋

이견부주 신막추심


두 가지 견해에 머무르지 마라. 삼가 쫓아가서 찾지 마라.


두 가지 견해에 머무르지 마라의 뜻은 두 가지 견해를 버리기만 하면 이미 진리에 들게 된다.


有是非 紛然失心 재유시비 분연실심


잠깐이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이미 근본에서 어긋나 버린다.


잠깐이라도 옳네 그르니 하면, 이미 어지러이 본심을 잃게 된다.

정답을 찾는 것도 버려야한다. 이것이 진리라 정해놓고 찾으려한다. 아니다. 다만 망견을 쉬어야한다. 선입관 없이 접근해야한다.

다만 사실은 어떤가?


二由一有 一亦莫守

이유일유 일역막수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일어났다. 하나 마저도 움켜지지 마라.


하나 마저도 세워서는 안된다. 금강경에도 나옵니다. 일상은 무상이다.


一心不生 萬法無咎

일심불생 만법무구


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만법에 아무런 허물이 없다.


허물이 없다는 것은 옳으니 틀리니, 잘했니 잘못했니 하는 것들은 모두 생각에서 일어난 것이라 모두 사라진다. 이를 진여라고 한다.


無咎無法 不生不心

무구무법 불생불심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남(생김, 生)이 없으면 마음이라 할 것도 없다.


이것이 무아의 경지, 공의 세계이다.


[신심명 10강]

能隨境滅 境逐能沈

능수경멸 경축능침


주관은 객관을 따라 소멸하고, 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기느니라.


境由能境 能由境能

경유능경 능유경능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요,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다.


능은 주관, 경은 객관 바같 경계를 말함.

주관과 객관이 별개로 존재치 않고 서로 의지하고 연계 되어있다는 뜻이며, 불교의 연기법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이것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함(사라짐)으로 말미암아 저것도 멸(사라짐)한다. 우리의 이해는 사물이 단독으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더럽다하는 것이 있어 깨끗한 것이 존재한다. 밝음과 어둠 역시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모든 존재한다는 것의 특성이다. 존재의 상호연관성 이것이 제법 무아이다. 단독자는 없다.

제행은 무상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을 항상함이 없다라고 한다. 그래서 고인 것이다. 고이므로 무아이다. 이를 존재의 참모습(무상, 고, 무아)이라 하며 즉 삼법인이다.


참모습의 이치를 알게 되면 모든 괴로움은 사라진다. 열반인 것이다. 괴로워해야 할 일이 없는 것을 깨닫는다.

착각에서 깨어나면 원리 전도몽상 구경열반한다. 주관과 객관이 서로 연관되어있다. 반야심경에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공과 색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


欲知兩段 元是一空

욕지양단 원시일공


양단(유무)을 알고자하면, 원래 이것이 하나의 공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색은 공으로부터 일어나고, 공은 색으로부터 일어난다.

양단에 치우쳐 있을 때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고 저것 아니면 이것이다.

그러나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닌 도리를 알면 동산이 되기도 하고 서산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一空同兩 齊含萬象

일공동량 제함만상


하나의 공은 양단과 같다. 만상을 품은 것과 같다.

하나도 세우지 않을 때 진정한 공(하나)이 된다. 진정한 하나는 공이다.[모양 없음이다]

여기서 일공은 곧 중도를 말한다.


不見精麤 寧有偏黨

불견정추 영유편당


세밀하거나 아주 거칠음을 둘로 보지 않는다.

어찌 편당이 있겠는가?


세밀하고 거칠음을 둘로 보면 진리에서 어긋남이다. 어찌 편당.. 지우쳐 무리를 짓는 일이 있겠는가? 라는 뜻.

절대성을 떠날 때 ‘공’ [空]이다. 크다 할 때 큰 것의 속성이 없고, 작다 하더라도 작은 것의 속성이 없다. 저사람 나쁘다 할 때도  나쁘다고 할 어떤 속성이 없다.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존재는 그냥 존재이다. 한쪽에 지우치는 것은 도가 아니다. 사물의 모습은 그냥 그것이다. 산은 산, 물은 물. 다만 한 물건 일 뿐이다.


[신심명 11강]

大道體寬 無易無難

대도체관 무이무난


큰 도는 본체가 없어, 쉬운 것도 어려운 것도 없다.


우리는 쉬운 일이 있고 어려운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어떤 사람은 어렵다하고 어떤 사람은 쉽다 하지만, 일 자체는 쉽고 어려움이 없다. 다만 사람에 따라서 혹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진리(대도)는 넓어서 쉬고 어려움이 없다. 바로 양단을 떠나기만 하면 된다.

일 자체는 쉽고 어려움이 없으며, 그것은 마음에 있다. 마음내면 쉽게 되기도 한다.


小見狐疑 轉急轉遲

소견호의 전급전지


마음 씀씀이(견해)가 좁으면 여우같이 의심하고,

더욱 급할수록 더욱 더뎌진다.


‘소견호의’는  좁은 견해로 보기 때문에 늘 의심한다.

손과 손가락은 좁은 구멍(견해)으로 보면 손가락 5개로 보지만, 큰 눈으로 보면 한손이다. 우리에게는 가리워져서 손가락이 각 별개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모두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도 뭉뚱거려진 한 개가 아니라 서로 연관된 별개(하나)이다. 이것을 불일불이 이라한다.(이 세상 만물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콩 한 되가 있다 치면, 이 콩들은 모두가 모양이 서로 다른 콩이다. 그러나 팥이 옆에 있어 팥과 비교하면 이 콩들은 모두 같은 콩들이다 고 이야기한다.

팥과 콩을 채소와 비교하면 팥과 콩은 같은 곡물이다. 나아가 계속 비교해나가면 예를 들어 돌에 비교하면 이들은 모두 같은 음식이 된다.

이 때, 이 콩들은 정말 같은 것이냐? 정말 다른 것이냐? 한다면 이건 어리석은 생각이다. 상황에 따라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는 것이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따로 없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뿐, 이 모두 마음에서 생겨난 것이며, 실상이 아니며, 꿈같은 것이다.

좁은 견해로 보기 때문에 늘 의심한다.


[신심명12강]


‘전급전지’은 서두를수록 더뎌진다는 뜻인데,

아침햇살이 비치면 깨끗하던 방안에 먼지가 보인다. 이를 쓸어내려하면 빗자루 질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은 먼지가 생긴다. 고요해지려 할수록 애쓸수록 더 어지러워진다. 고요해 지려는 마음이 더욱더 불화를 조장한다. 애쓸수록 상기가 된다.

가만히 내버려 두어야한다.


어떤 사람이 부처님의 법문에 감동 받아 출가하였다.

그는 열심히 정진했는데 도무지 깨달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조급해졌다.

그래서 더더욱 정진하였는데 역시 진전이 없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생각하길, ‘나는 소질이 없나 보다, 차라리 돈이나 벌어 보시나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였다.

떠나려 부처님께 작별을 고하니, 부처님께서 물으시길,  “왜 그러느냐?”

그래서 사실대로 말하였다. “저는 열심히 수행하였는데도 진전이 없습니다. 그래서 소질이 없는 것 같으니, 돈이나 벌어 스님들 뒷바라지나 할까합니다.” 하였다.

부처님께서 물으셨다. “너는 출가 전에 무엇을 잘 하였느냐?”

“예, 거문고를 잘 탓습니다.”

“그럼 그 거문고는 줄을 빡빡하게 조여야 소리가 잘 나느냐?”

“아닙니다, 너무 조이면 좋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그럼 줄을 느슨하게  해야 좋은 소리가 나느냐?”

“아닙니다. 너무 느슨해도 좋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좋은 소리가 나느냐?”

그러자 그 수행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거문고는 줄을 너무 조여서도 안되고, 너무 느슨해서도 안되며 잘 맞게 조여야 좋은 소리가 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 하셨다. “그렇다! 수행도 이와 같아서, 너무 열심히 하려 해도, 또 너무 나태해서도 안된다. 조급한 마음을 버려야한다.”

조급한 마음을 버리는 것이 나태하라는 것은 아니다.


執之失度 必入邪路

집지실도 필입사로

집착하면 도를 잃게 되고,

반드시 삿된 길(틀린 길)로 들어서게 된다.


도를 얻어야지 깨달아야지 하면 오히려 도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정답을 찾으려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편안하게 선입견 없이 접근해야한다.

우리는 거부 하다가 집착하다가 하면서 세월을 보낸다.

그렇게 하여 지우치다가도,

어느 순간 벗어나면 환하게 보인다.


放之自然 體無去住

방지자연 체무거주


집착하지 않고 놓아버리면, 스스로 진리의 길을 간다.

본체는 머무름도 없고 감도 없다.


상을 놓아 버리면 저절로 이루어진다.

얼음은 모양이 정해져 버렸기에 모양이 다른 곳에 넣으려면 깨트려야 한다.

인연을 따라 흐르는 물처럼 살아가지만, 고집할 때에 갈등이 생긴다.


언제나, 갈등은 하나를 고집할 때 생긴다.

관계에서 유연하지 못하면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적절하게 항상 맞추어야 한다.

상이 벗어지면 저절로 맞춰진다.

놓아 버리면 자연히 돌아가므로 본체가 가거나 머무름이 없다.


[신심명 13강]

任性合道 逍遙絶惱

임성합도 소요절뇌


성품[본성, 자성]에 맡기면, 도에 계합하게 되어,

‘왔다 갔다’ 하는 번뇌가 끊어져 저절로 멀리 사라진다.

맡길 임, 성품에 맡기면 도에 계합하게 된다. 저절로 번뇌가 사라진다.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끊으려하면 번뇌가 끝없이 일어나고 놔두고 지켜보면 사라진다.


*수식관; 숨에 몰입하여, 있지만 옆에서 떠들면 놓친다. 그러나 숨은 계속 된다. 알아차림이 집중되어 있으면 떠드는 줄 알면서도 알아차린다. 머리 속의 온갖 생각, 번뇌가 일어나던 말던 호흡만 집중하면 번뇌는 치성 했다가도 저절로 사라진다.

이때 번뇌는 가만 내버려둔다. 다만 번뇌에 빠져 허우적 되지 않기 위해, 호흡에 집중한다. 다른 것을 모두 내버려 둔다. 놔버리는 것이다.


담배, 담배 피우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안피워야지 하지도 말고, 피워서 없애려하지 말고 내 버려둔다. 그러다 안 피우고도 사라지는 것을 보면 놔두게 될 수도 있다. 어떻게 되나 가만히 볼 수 있는 것이다. 한대만 피워 볼까? 아니 참아야지 하는 것들은 시간 낭비이다.

졸음 오는 것도 내버려둔다. 졸음은 오는 원인이 있으니 그것의 성품에 맡겨 두면, 그러다 어느 순간 사라진다. ‘잠깐 자고 올까(이건 빠져 드는 것이다. 깨어있지 못함이다.)? 그래서는 안된다.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깨어있지 못함이다.


繫念乖眞 昏沈不好

계념괴진 혼침불호


생각에 매달리고 얽매이게 되면 참됨(진리)에서 어긋나 버리며,

어지러움에 빠져서 좋지 않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얽매이게 되면 진리에 어긋나 버린다. 그러면 어지러움에 빠져 버린다. 좋치 않다.


不好勞神 何用疎親

불호노신 하용소친


기분이 좋지 않으면 정신이 수고롭다(피곤하다).

어찌 멀고 가까움을 가리랴?


기분이 좋지 않으면 정신이 피곤하다. 우리는 늘 멀고 가까움을 가린다. 멀고 가까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欲趣一乘 勿惡六塵

욕치일승 물오육진

일승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육진(경계)을 미워하지 말라.


삼승(성문승, 연각승, 대승 보살승)이 따로 없이 부처되는 길을 가고자하면,

육진이란 6가지 경계(색성향미촉법)로 육진을 미워하지 말라.

경계를 탓하지 말라. 세상을 미워하지 말라.

경계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그것은 그것일 뿐이다.

이건 자기 업식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六塵不惡 還同正覺

육진불오 환동정각


육진을 미워하지 않으면,

도리어 정각과 같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으며, 그것이 바로 정각과 동일하다(좋다, 나쁘다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본다면 그대로 깨달음이다).


나를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것, 즉 나의 업식을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것을 ‘아상’ 이라 한다. 아상을 객관적 진실로 여기면, 그게 ‘내가 옳다’고 고집 세우는 것이고 이것을 ‘아집’이라한다. 여기서 아집이 모든 고뇌 번뇌 갈등의 원인이다.  우선 수행자로써 아집은 무조건 끊어야한다. 그러면 아상인 줄 알면서도 갈등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상을 아상인줄 안다면 서로 다른 느낌과 서로 다른 취향이 공존할 수 있다.

‘내 보기는 이렇네, 내 입에는 좋네’ 정도로  표현하면 갈등은 없다. 아상은 생겨도 갈등은 없다.


딱 사로 잡히면, 아 내가 사로 잡혔구나, 내가 또 주관을 객관으로 여기고 있구나, 내 입장을 절대화 시켰구나. 상을 버리지는 못해도 고집은 부리지는 말자. 이것만으로도 우리 고뇌의 80-90%는 해결된다고 본다.


[신심명 14강]


智者無爲 愚人自縛

지자무위 우인자박


지혜로운 자는 함이 없거늘,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결박하고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생활에 걸림이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속박하고 있다.

도신 사미가 승찬 대사에게 ‘저를 해탈케 하소서’ 하자 ‘사미여, 누가 너를 속박하고 있느냐?’ 하자, 그때 자기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나를 속박하고 있지 않다.

불안한 마음을 찾아본다. 자기를 돌아본다. 이것이 관하는 것이고, 조견 이라한다.

눈을 뜨면 없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함(노력할게 없다)이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속박한다.


法無異法 妄自愛着

법무이법 망자애착


진짜 법이라고 할 다른 법이 없거늘,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상을 지어 집착하여 진리라는 것을 만든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법이라고 할 것이 없다. 이것이 진리다라고 할 어떤 진리가 따로 있지 않다. 꿈을 깨면 남을 해치는 강도도 없고, 나를 구원해주는 보살도 없다.

진짜 진리라고 하는, 진리 아닌 것과 대별되는 진짜 진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상을 지어 집착하여 진리라고하는 것을 만든다.


將心用心 豈非大錯

장심용심 기비대착


마음가지고 마음을 쓴다면(용쓴다면), 크게 어긋남이 아니겠는가?


그냥 벌떡 일어나면 되는데 ‘일어나야지, 하고 있다.’

용을 쓰는 것은 이미 어긋나 버린 것이다.


迷生寂亂 悟無好惡

미생적란 오무호오


어리석으면 고요함과 어지러움(혼란)이 생기고,

깨달으면 좋고 싫음이 없어지도다.


어리석을 때 혼란이 온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고요함과 혼란이 구분되면 어리석은 것이다.

어리석으면 깨끗하고 더럽고가 있다. 그러나 지혜로우면 그런 것이 없다.

육도 윤회나 천상에 가는 것 모두가 꿈속의 이야기 이다.

꿈에서 깨면 강도도 보살도 아무것도 없다.


一切二邊 良由斟酌

일체이변 양유짐작


모든 두 견해(선악, 시비, 구정, 생멸)는 자못 짐작하여 생겨난다.


모든 상대적인 두 견해는 짐작(잔에 술을 따른다)하는데서, 즉 두 견해란 결국 선악을 헤아려 분별하는데서 양변이 생겨나는 것이다.


夢幻空華 何勞把捉

몽환공화 하로파착


꿈속의 허깨비나 허공의 꽃을 보았다면,

어찌 알지 못하고 잡으려고 애쓰는가?


착각하여 헛것을 본 것을 잡으려 애쓰는가?

우리가 근심 걱정하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있는가? 본인은 있다고 착각하지만, 눈을 뜨면 없다. 사실은 눈을 안떠도 없는 것이다. 다만 모를 뿐이다.


得失是非 一時放却

득실시비 일시방각


얻고 잃음(옳고 그름)을 일시에 놓아 버려라.


이 신심명 전체 가르침의 핵심은 양단을 떠나는 것이다. 즉 일체 유심조라는 것이다.

꿈에서 깨지 못하면 엄청나게 할일이 많지만, 깨고 나면 아무런 할일이 없다.

도망가지 말고 뒤 돌아서서 정면으로 살펴보라. 조견하라. 

놓아 버리는 것이 눈을 뜨는 것이다. 모든 게 사라져 버린다.


[신심명 15강]

眼若不睡 諸夢自除 안약불수 제몽자제

눈에 만약, 졸음이 없다면, 모든 꿈이 스스로 사라져 버린다.


눈에 졸음이 없다는 것은 잠에서 깨어난다.

눈에 졸음이 있다는 것은 즉 미혹하다, 자기 생각에 사로 잡혔다는 뜻이다.


心若不異 萬法一如

심약불이 만법일여


만약에 마음에 다름이 없다면, 만법이 한결 같다.


마음에 다름이 없다는 것은, 좋았다 싫었다가 하는 게 없으면,

다시 말해 마음이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지 않으면 이라는 뜻이고,

항상 우리 마음이 촉새 꽁지처럼 움직인다.


만법이 한결같고 허물이 없다.  ‘공’이다.

즉 바깥의 모든 존재가 그대로이다. 산은 산, 물은 물.

그래서 맞고 틀림이 없고 깨끗함과 더러움이 없다.

만물에는 본래 값어치가 없으며, 그 값어치라는 것은 우리 마음에 있을 뿐이다.

다만 인연따라 그때그때 정해지는 것이다.

[피난 비유 생략함]

만약에 마음이 다르지 않으면, 만법이 한결 같다.


一如體玄 兀爾忘緣

일여체현 올이망연


본체가 한결 같으면, 그 우뚝 선 모양이 인연을 다 잊게 한다.


만법이 한결 같다는 것은 공이다 라는 말이다.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다. 이것이 한결 같음이다.

제법이 공한데서 온갖 것이 일어나므로.. 온갖 것들이 색인데 이것이 곧 공이다(색즉시공). 그런데 공에서 모든 것이 일어난다. 그래서 공즉시색이다.

제법이 공한 도리에서는 모든 인연이 사라지고, 일어나면 색이라 한다.

그 현묘한 제법이 공한 도리에서는 모든 인연이 사라진다.


萬法齊觀 歸復自然

만법제관 귀복자연


만법을 있는 그대로 보면(진여), 돌아감이 자연스럽다.

만법을 있는 그대로 보면 마치 꿈속에서 온갖 일이 벌어졌는데 눈을 떠니 사라져 버리듯이 자연스럽다.


泯其所以 不可方比

민기소이 불가방비


그 까닭을 다하면, 비교할 것이 없다.


그 까닭, 원인들이 다 사라지면, 비교하거나 견줄 것이 없다.

눈을 떠서 강도가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 느낌은 비교할 수가 없다.


[신심명 16강]

止動無動 動止無止

지동무동 동지무지


멈추면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아니요,

움직이면서 멈추니, 멈춤 또한 아니다.


앙구리말라가, “너는 멈추라는데 왜 멈추지 않았는가?” 했을 때.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멈추었다. 멈추지 않은 것은 너다. 너는 천상에 가려는 욕심에 헐떡거리고 있다.”

나는 마음에서 모든 번뇌가 멈추었다. 즉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


사람을 99명이나 죽였던 앙구리말라가 다시 죄의식에 사로 잡혔을 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비구여, 너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로 한번도 살인 한 적이 없다.”


兩旣不成 一何有爾

양기불성 일하유이


둘이 이미 성립하지 않는데, 어찌, 하나인들 있을 수 있겠는가?


이미 눈을 떠버리면 둘이 성립할 수 없다. 진은 진이라고 세울 것이 없어야 한다.

동산.서산이 시비거리가 아닌데, 비동비서가 진이다 하면 동도 아니고 서도 될 수 없다.

비동비서라는 것은 진도 가도 아니라는 것이다. 

비동비서도 고집하지 않는다.


究竟窮極 不存軌則

구경궁극 부존궤칙

마침내 궁극에 이르면,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궁극에 이른다는 것은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면 이라는 뜻이며,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궤칙이 없다는 것은 금강경에서는 무유정법이라는 표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학교선생님도 다만 그 인연에서 선생님이고, 절에서는 우바새우바이 일뿐이다.

회사 사장도 부인을 만나면, 남편일 뿐이다. 그러나 사장임을 고집하면 갈등이 생긴다.

이러한 상이 없어야 자유로와 진다.

상을 지으면 상에 갇히고, 고착화된다. 선생님과 아이가 다투면, 선생님이 먼저 화를 낸다. ‘이게 감히’ 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몇 살이다.’ 하는 것도 상이다.


契心平等 所作俱息

계심평등 소작구식


마음이 계합하여 평등해지면,

짓고 짓는 바가 모두 그친다.


다할 구 쉴식, 여기서 평등하다는 것은 ‘그냥 하나의 존재로 보면’ 이라는 뜻이고, 짓는 바가 그친다는 것은 시비분별이 스르르 가라앉는다는 말이다.


어떤 사물의 이치가 내 마음에 계합되면, 즉 색이 공함을 깨달으면(제법이 공함을 알면), 그러면 평등해진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남산도 북산도 되고 동산 서산도 된다.

즉 모든 시비분별이 사라져 버린다.

狐疑淨盡 正信調直

호의정진 정신조직

여우같은 의심이 다해버려 맑아지면,

바른 믿음이 고르고 곧으리라.


바르게 믿는 마음을 신심 혹은 정신이라 한다.

오늘의 나의 모든 믿음은 사실은 정신이 아니고 미신에 속한다.

의심이 다하고 끝나면 그때 올바른 믿음이 나온다.

바르게 믿는 마음을 신심이라 한다.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어 진다.(무상정등각)


돈 있을 때 겸손하면 돈 없을 때 구박받지 않는다.

예쁜 여자가 있었다. 많은 남자가 따랐다. 이후에 화상으로 얼굴을 망쳤다. 남자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 당연하다. 그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상에 집착하면 화를 자초한다. 상을 짓는 것은 자유를 해치는 것이며, 노년의 외로움은 돈 버는 시절, 힘 있던 시절 목에 힘을 준 과보이다.


[신심명 17강]


一切不留 無可記憶

일체불류 무가기억

일체가 머무르지 아니하므로,

어찌 기억 할 것이 있겠는가?


머물 류,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항상 함이 없는 즉 무상을 말하며, 기억할 것이 없는 것은 ‘집착할 바가 없다.’ 는 뜻. 제행이 무상하니 집착할 바가 없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변해간다. 영원한 것은 없다.


虛明自照 不勞心力

허명자조 불로심력

허허로이 밝아 스스로 비추나니, (텅 비었다)

애써 마음 쓸 일이 아니로다. (애써 노력할 일이 없다.)


다만 인연 따라 일어나므로, 오는 인연은 오는 대로 받아들이고, 가는 인연은 가는대로 받아들인다. 좋아하거나 미워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래서 마음으로 수고 할 일이 없다. 항상 싫은 사람이 오고, 좋은 사람이 간다. 그러나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만  없애면 된다.


非思量處 識情難測

비사량처 식정난측

이 도리는 생각으로 헤아릴 곳이 아니니,

알음알이와 감정으로는 측량하기가 어렵다.


량은 헤아릴 량, 식은 알음아리 식, 이 도리는 사량분별(생각)로 알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이 세계가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꿈속에서는 꿈에서 깬 소식을 알 수 없다.


[신심명 18강]


眞如法界 無他無自

진여법계 무타무자

진리의 세계에서 보면, 나도 없고 남도 없다.


진여는 진리의 세계, 제법이 공한 세계이며 법계는 우주를 뜻한다. 그래서 제법이 공한 세계에서 보면, 나도 없고 남도 없다는 것은  즉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으로 다만 연관되어있을 뿐이라는 것. 이것은 우리의 세계 생멸이 있는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다.


얼음이 녹아 물이 생기는 것은 좁은 소견에서야 물이 생긴 것으로 보이지만, 전체를 큰 눈으로 보는 견지에서는, 실재는 아니며 다만 바뀌어 모양만 바뀐 것이다.

제법이 공한 세계에서는 나와 남이 둘이 아니다.


비행기 속에 창고 속에 음식이 잔뜩 쌓여 있다. 식사시간이 되어 모두 나누어 주었다. 이제 창고에는 음식이 비워졌다. 그런데 비행기가 가벼워 졌을까? 화장실에는 대소변이 늘어  났다. 그러나 비행기는 무거워지지 않았다. 부분적으로 보면 늘어나고 줄어들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았다.


좁은 소견으로 보면 너와 나는 남이다. 큰 눈으로 보면 한손 위의 손가락들처럼 나와 남이 아니다. 진여법계에서는 둘이 아니다.


要急相應 唯言不二

요급상응 유언불이


이런 도리를 급히 상응하기(알기)를 원한다면,

오직 둘 아님을 알아야한다.


이런 도리를 담박 알고자 하면 오직 둘 아님을 알아야한다.


不二皆同 無不包容

불이개동 무불포용

둘 아닌 도리를 알면 모두가 같아서,

포용되지 않는 바가 없다.


둘이 아니면 모두가 같다는 것은 제법이 공한 도리를 알면 모두가 평등하다.

다만 인연을 따라서 움직이므로 포용되지 않는 바가 없다는 뜻인데, 

둘 아닌 도리는, 곧 제법이 공한 도리이다.


十方智者皆入此宗

시방지자 개입차종

시방의 지혜로운 분들도 모두 이 종에 들어오리라.


시방은 십방, 동서남북, 그 사이 사유와 상하를 말하는 것으로, 온 세계를 뜻하며, 온누리의 지혜로운 분이라는 것은 시방의 부처님들 이라는 뜻이다.

이 종에 들어오리라 하는 것은 이 도리 즉 제법이 공한 도리 이자, 둘 아닌 도리를 으뜸으로 삼는다. 이 도리로 깨달음으로 삼는다.


宗非促延 一念萬年

종비촉연 일념만년,

이 종은 짧다 하거나 길다 할 것이 없어서,

찰나와 긴 세월이 둘 아니다.


혹은 이것으로 종취로 삼으며, 이 도리에서 보면 길다고 할 수도, 짧다고 할 수도 없다.

법성게의 일념이 무량겁이며 무량겁이 일념이라는 같은 뜻이다.


無在不在 十方目前

무재부재 시방목전

있거나 있지 않음이 없어서, 시방이 모두 내 눈앞이로다.


댓귀가 조금 맞지 않아 다른 자료에서 보면  무재부재 시방복전 대신에

非古之今 三世一念

비고지금 삼세일념

옛과 지금이 (둘) 아니니,

삼세가 곧 찰나이다.


삼세란 과거세 현재세 미래세를 말하며, 한량없는 세월을 말한다. 길고 짧음이 없다.

(금강경의 삼세심 불가득)


極小同大 忘絶境界

극소동대 망절경계

지극히 작은 것은 큰 것과 같아서,

큰 것과 작은 것의 경계가 사라져 버렸다. (경계가 없다.)


極大同小 不見邊表

극대동소 불견변표

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같아서,

끝과 겉을 볼 수가 없다.


법성게, ‘일중일체 다중일’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하나이니. ‘일미진중 함시방’ 하나의 작은 티끌 속에 우주를 다 포함하고 있다. 일체진중 역여시.

상식이 통하지 않는 부분이다.


경험의 세계에서는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다. 우리의 경험이 너무 좁은 범위에서 관찰한, 그 경험을 모든 것에 적용하여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결과로 오늘날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정확한 게 아니다. 모든 괴로움이 여기에서 일어난다.


[신심명 19강]


有卽是無 無卽是有

유즉시무 무즉시유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니,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다. 원자 속이 텅 비어있고, 텅빈 것들은 또 차 있다.

없다하면 가득차 있다.


若不如此 不必須守

약불여차 불필수수

이와 같은 도리를 깨닫지 못했다면,

모름지기 이건 지킬 필요가 없다.

만약에 이와 같지 않다면,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라는 뜻이다.


一卽一切 一切卽一

일즉일체 일체즉일

하나가 큰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니


但能如是 何慮不畢

단능여시 하려불필

다만, 이와 같으면 

어찌 다하지 못할까 걱정하겠는가?

이런 도리를 안다면, 아무 걱정 할게 없다.


信心不二 不二信心

신심불이 불이신심

믿는 마음이 곧 둘이 아니니,

둘 아님이 곧 신심이다.


여기서의 신심은 깨달은 마음, 제법이 공한 상태의 믿음이다.

반야바라밀다는 시 대신주(신), 시 대명주(혜), 깨달음보다 가장 확실한 믿음은 없다. 이보다 더한 실천이 없다. (시 무상주), 어떤 증득보다 견줄 것이 없다. (시 등등주)


言語道斷 非去來今

언어도단 비거래금


언어가 끊어지고(말할 필요가 없이),

과거 현재 미래가 곧 일념이다.


승찬대사 이분이, 이렇게 일체가 허망함을 인생이 고 임을, 이미 몸으로 알았으므로, 그래서 이 세상에 미련이 없는 사람이었으므로 담박 깨우쳤을 것이다. 번뇌와 보리가 둘 아니요, 함이 없음은 어떤 의도가 없는 것이다.